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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출 1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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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출애 16:1~12)


유대인 한 사람이 아랍인 두 사람과 함께 비행기를 탔습니다. 유대인이 구두를 벗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랍인들이 유대인의 옆구리를 위협적으로 찌르면서"어이, 가서 주스 두 잔만 가지고 와"하고 다그칩니다. 유대인은 기분이 나쁘지만 싸우기 싫어서 얼른 일어나 오렌지 주스를 가지러갔습니다. 그러자 아랍인들 둘이서 유대인이 벗어 놓은 구두 속에 침을 마구 뱉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유대인이 가지고 온 주스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마셨습니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유대인이 구두를 신으려고 보니 구두 안에 침이 질퍽거렸습니다. 그 구두를 들고 유대인이 아랍인들을 보면서 말했습니다."이스라엘과 아랍이 평화로우려면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구두에 침을 뱉지 말아야 되고 유대인은 아랍인들이 마시는 오렌지 주스에 오줌을 싸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평안은 신뢰에서 옵니다. 사람은 서로 믿을 수 있을 때에 그 관계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명확합니다. 내가 그를 믿어주면 그가 나를 믿어주지만 내가 그를 믿지 못하는 한 그도 나를 믿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신의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신앙이 올발라야합니다. 

또 하나 평안은 책임에서 옵니다. 서로가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자기 책임이라고 하는 곳에는 싸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싸웁니까? 서로 네가 잘못했다는데서 싸움이 있는 것이거든요. 먼저 내 잘못이다 인정하는 데에서는 다툼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이 책임감이 문제입니다. 

[스티븐 코비]의<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워낙 베스트셀러여서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다들 알고 있습니다만 결국 그 책에서도 하는 이야기가 제목 그대로 성공한 사람의 성공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환경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성품이요, 습관이 성공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독특한 성품이 대략적으로 일곱 가지인데 통틀어서 요지가 뭐냐 하면<주도성>이라는 것입니다. 주도적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가장 쉬운 예가"내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은 남에게 떠넘기거나 남의 도움을 빌어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손해 볼 각오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먼저 희생할 마음으로 앞장서는 것입니다. 

가령 백만 원짜리의 물건이 꼭 필요하다고 합시다. 이건 반드시 필요한 물건입니다. 주도적인 성격의 사람은 내가 먼저 얼마라도 돈을 내놓습니다. 그리고는 사자고 말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진다는 의지입니다. 이 물건이 사지겠습니까 안 사지겠습니까? 사집니다. 

그런데 이 주도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장서서 큰 소리만 치면 되는 줄 압니다. 자기희생, 자기 손해, 책임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책임지는 영역만큼이 내 것입니다. 내 것만 책임지면 좁은 영역을 살지만 남의 것 까지 책임지는 사람은 그만큼 넓은 영역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 잘못까지 남에게 돌리면 내 영역은 반으로 줄어드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내 책임은 전혀 없고 완전히 남의 책임이라고 하는 순간 내 존재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스티븐 코비]의 말이 이런 주도적인 정신을 가지고, 성품을 가지고 살아서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이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이"성공할 것이다."가 아니라"성공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은 확실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환경도 탓하지 말아야 됩니다. 환경이란 수시로 변하는 것 아닙니까? 변하는 환경에 따라 내 근본마저도 또한 달라져야한다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환경에 매여 살아야 한다는 것도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간혹 보면 실패한 과거 때문에 미래를 망치는 사람들을 봅니다. 실패한 과거란 지나간 환경일 뿐이지 내 미래가 그 과거 환경 때문에 어두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로 성공한 과거가 미래를 망치는 경우도 봅니다. 

지난날에 좀 잘된 것이 있다고 여기에만 집착되어서 오늘과 내일을 망쳐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 중에는 자기가 일류대학을 나왔다는 과거, 그것 하나 때문에 미래를 망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가하면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어떤 면으로든지 옛날에나 가능했던 일이 있습니다. 지금 될 수도 없고 앞으로도 되어 지지 않을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과거에 매달려서 그것만을 꿈꾸다가 미래를 다 망치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 놓고는 세상이 어떻고, 사람들이 어떻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실패한 과거 때문에 현실을 원망하느라 미래가 어두워도 안 되지만 성공한 과거의 환경에 매여서 교만하여 현재를 원망하느라 미래를 실패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자손만대에 노예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의 400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애굽 군대가 쫓아오지 못할 만큼 완전한 자유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자유인은 됐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비롯한 몇 사람 외에는 광야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그 이유를 혹시 아십니까? 

성경은"원망 죄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원망은 무서운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엎드려져 죽을 만큼 원망이라는 죄의 결과는 비참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원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죄는 범하지 말아야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원망을 하는지 본문 가운데에 원망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한 달이 된 어느 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곧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이 불평합니다. 애굽에서는 먹을 것이라도 있었는데 차라리 거기서 먹고 죽었으면 좋을 뻔했다는 둥 괜히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서 굶어죽게 만든다는 둥 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거침없이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십니다. 이것을 주신 의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영육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망의 내용이 정말 유치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은"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건 곧 다시 노예생활로 가자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리고 고기 이야기를 합니다만 노예주제에 무슨 마음껏 고기를 삶아 먹었겠습니까? 노예생활 할 때 주인들의 음식 만들면서 고기 가마 옆에서 갈고리로 몇 점 건져 먹었는데 그게 맛이 있었다는 겁니다. 

자 중요한 이야깁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원망하고 있는 것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우리도 가끔씩은 옛날로 돌아가서 많이 생각합니다.'그때가 좋았는데...'하는 감상에 빠져서 현실을 보지 못하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완전히 단절 되어야 할 과거는 단절해야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하는 과거와 결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했던 것도 그렇고 실패했던 것도 그렇고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같은 과거라도 해석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과거를 어떻게 해석 하느냐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오늘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 작년보다 올해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항상 과거가 오늘 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는 또 그때대로 죽을 지경으로 살아놓고도 이제 와서 그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보면 단지 이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해석능력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 길고 긴 노예생활 중에 그 잠깐 잠깐에 있었던 즐거움 그거 하나를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기 한 점 건져먹을 때 육체적이고 세속적이요, 물질적인 만족 그 기억 때문에 이성이 병들었습니다. 차라리"거기서 노예적으로 향락하기보다는 자유인으로서 광야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냐?"이 정도가 되었더라면 원망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 고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텐데 어찌 이런 저속한 인간이 되었더냐 말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정리해봅니다. 그들의 믿음이 문제였습니다. 불신앙이 원망을 만들었고 거침없는 원망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신앙 없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랑은 믿음이어야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신앙으로 자랑거리를 삼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늘 들어도 우스우면서도 찔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 한 분이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천사가 반갑게 맞이하며 중국집으로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배고픈 차에 잘되었다 생각하는데 같은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장로님보다 먼저 와서 탕수육을 맛있게 먹고 있더랍니다. 순간 장로님이 생각하기를'아, 집사님이 탕수육을 먹는 것 보니 나는 장로인데 더 맛있는 것을 주겠구나'생각하고 기다리는데 자장면이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실망한 장로님이 하나님께"아니, 하나님 집사에게는 탕수육을 주고 장로인 나에게는 겨우 자장면을 주십니까?"하고 볼멘소리로 물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장로님 귀에다 대고 하시는 말씀이"김장로! 그런 소리하지 말어! 자네교회 담임목사는 지금 자장면 배달 갔어!"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원망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환경에서도 아니고 세상사에서도 아닙니다. 또 그 누구로부터도 아닙니다. 오직 나의 불 신앙적인 교만으로부터 원망은 시작됩니다. 실패한 과거에 매이지 말고 벗어나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성공한 과거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져서 지금의 내 신앙을 살펴보아 깨끗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모든 원망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와 그 능력이 바로 우리 눈앞에 보여 질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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