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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 (요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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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 (요 9:1∼7)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한 시각장애인이 “한푼 주십시오. 한푼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이 장님이 된 것은 자기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까? 부모가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그때 사람들은 병이 들면 자기 죄 때문에 그렇던지 부모의 죄 때문에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통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개를 흔들면서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깜짝 놀랄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중에도 체험하는 많은 크고 작은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한 무대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촛불의 밝기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는 밤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 빛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무대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진 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게 할 때 홍해 저 윗편에는 갈대의 밭이라고 있었습니다. 물이 얕고 갈대숲이 많은 갈대의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 홍해 윗편으로 인도해서 갈대의 바다를 건너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날 필요도 없고, 그런 요란스러운 역사가 일어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홍해 저 북편에 갈대의 바다를 통해서 건너가게 하지 아니하고 넓고 깊은 곳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구태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와같이 멀고 깊은 곳으로 인도했을까요? 그래야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나타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의 정면 아득히 깊은 곳을 택하여 그 홍해가에 진을 치게 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절로 2절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마음대로 홍해 가운데로 이끌어 온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데리고 와서 장막을 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배를 타고 건널 수도 없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널 수도 없습니다. 물이 굉장히 깊고 저쪽 건너편과 이쪽의 거리가 굉장히 멉니다. 이러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그곳에 와서 천막을 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래야만 하나님이 홍해를 가를 때 정말 하나님이 역사한 표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대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다음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사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게 한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8절로 9절에 “야훼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왕을 강퍅하게 해서 그 대군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이 장막친 그 홍해가로 습격해 오도록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무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람의 힘으로 못건널 홍해가에 진치게 하시고 난 다음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해 오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어야 진짜 구원이 되고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읽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고난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될수있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좋은 기회가 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두 걸음 다가오십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충만히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한국이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경제적인 고난에다가 사회적인 혼란, 여러가지 어려움, 북한의 도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촛불시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환난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 고난 동안에 우리가 해야 될것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낼 무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리가 원망, 불평, 탄식하면 고난은 고난대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우리를 멀리 떠나 계시고 모든 것이 절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올 때 고난을 영광으로 변화시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고난을 무대로 삼아서 그 영광을 나타내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2. 나사로의 부활에 관하여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 누이들이 예수님께 연락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 저편에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으므로 와서 고쳐달라”고 부탁했는데 예수님은 그 부탁을 받고도 이틀 동안이나 있는 곳에 계시면서 베다니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6절로 7절에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머물고 계셨습니까?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죽어야 부활시키는 기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무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큰 불행이요, 큰 고통인줄 알고 탄식하고 통곡하고 먹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어둠이 와야 빛을 비취듯이 죽어야 살리는 역사를 베풀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자를 살렸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죽은 사람이 있어야 되고,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훗날에 만인을 부활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4절로 15절에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도록 한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 안믿는 사람도 죽을 병에 걸려 모든 의학이 다 필요 없을 때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님이 고쳐주십니다. 사업이 망해서 완전히 빚더미에 올라 앉아 헐벗고 굶주리고 절망에 처했을 때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서 주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그 사람 평생에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찬미하고 감사하고 주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그리스도를 만날수 있는 기회가 되고, 시련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과 환난과 시련과 고통은 하나님을 찾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무대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무대가 바로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인 것입니다.


 3. 고난의 무대,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함

고난의 무대는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살아있는 자가 항상 죽은 것과 같은 고통에 넘어지는 이유는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아무리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힘있고 복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생활과 환경에 고통이 다가와야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서 이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온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 깨달아 알게 하고 더 큰 은혜를 받고 더 큰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깨달아 알수록 더 큰 복이 되고 하나님을 체험 할수록 더 큰 은혜가 되고 하나님과 동행 할수록 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권세와 능력과 영광이 많아도 나타나기 위해서는 무대가 만들어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에게 무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 뒤를 돌아보니 전에 모르던 것이 많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제가 17세 때 폐병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저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었습니다. 한창 청운의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며 앞날을 향하여 달리다가 폐병에 걸려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낙오자가 됐습니다. 한국전쟁 이후라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도 할 수 없고,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절망이 아니고는 두터운 불교 집안의 그 벽을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절대로 예수 믿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예수쟁이는 한걸음도 집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죽게 되니까 별도리 없었습니다. 그때야 “하나님 날 살려 주십시오”라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이 와서 제게 전도하게 되고 성경을 전달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는 한없는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 73세가 되어서 제가 돌아보니 환하게 보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 보면 그때 제가 폐병에 안걸렸으면 예수 믿게 되지 않고 우리 집안 식구들도 다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고 제가 목사도 안되고 천하만국에 나가서 복음도 못 전했을 것입니다. 그때 폐병 걸렸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 폐병을 걸리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은 무대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저를 고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은혜를 받아서 신학교에 들어오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종이 되고 말씀을 증거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세월이 지나가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그때는 원망스럽고 불평하고 탄식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큰 복을 주시려고 영광을 나타내셔서 나를 만나고 나를 더 깊이 믿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구나!’라고 느낄 것입니다. 주님께서 고난 당하신 것은 우리를 살리고 더 큰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죽음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4절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는 역사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죽음을 체험하게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 영국 사이스 웰스의 한 작은 탄광촌에서 갱이 무너져서 14명의 광부가 갱 속에 갇혔습니다. 그래서 이 광부를 찾는다고 바깥에서 그 무너진 흙더미를 뒤지는데 어디에 갇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흘동안 파헤쳤으나 광부가 어디 매몰되었는지 알수가 없어 포기하려고 하는데 조용한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귀를 기울여 보니까 “예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 이 세상 풍파 중에도 늘 보호하시리. 예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 일평생 지나갈 동안 늘 보호하소서” 찬송가 438장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 찬송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파헤쳐 들어가니까 광부들을 발견했는데 사람 14명이 하나님 앞에 기다리면서 나흘동안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못마시면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다른 구조원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줄 것을 기다리고 하나님이 찬송을 부르면서 기다렸는데 그 찬송소리가 바깥의 구조원들을 이끌어서 그들을 구원받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한사람도 남김없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감사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리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감사하며 기다리는 자를 주님께서 때가 늦지 않게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원치 않으시고 하나님은 미쁘사 시험 당할 때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중국 양주에서 선교할 때의 일입니다.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양주의 학자들과 일부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그들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선교사들을 죽이고 큰 시련과 환난이 다가왔습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영국에 전파되어 결국 국가간에 큰 문제로 확대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국 정부에서는 허드슨 테일러를 골칫거리로 생각하여 정부에서 허드슨 테일러를 박대하고 영국에서 보내는 선교헌금도 못보내게 해서 큰 시련에 빠졌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200여 명의 선교사를 거느리고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데 재정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걸려서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대의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 떠나가자. 우리 철수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거나 탄원하지 아니하고 사무실 문을 닫고 엎드려서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구차한 변명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가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어려운 문제를 사람으로 해결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부르짖는데 영국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 목사님이 2000파운드나 되는 큰 돈을 격려의 편지와 함께 그에게 보냈습니다. 아주 어려울 때 2000파운드가 와서 그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을 죽음에서 건져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동안에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서 일하는 것을 모르던 영국의 많은 교회 성도들이 이것이 신문에 나고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소문이 나자 허드슨 테일러가 영국에서 나가서 중국에서 내지선교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서 기도회가 모아지고 헌금이 모아지고 이전 보다 더 많은 돈이 모아져서 화가 변하여 큰 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시험을 당할 때는 피할 길도 예비하셔서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리의 삶 속에 다가오는 고난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따라 오시고 환난이 오면 뒤에 하나님이 따라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나타내 주시고 영광을 보여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고난 중에 있는 우리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지만 고난을 지나고 보면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올 때 원망, 불평, 탄식하지 말게 도와주시옵시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더 나은 영혼의 축복과 생활의 축복과 승리가 다가 온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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