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여, 내가 보니… (요 4:19~26)

  • 잡초 잡초
  • 258
  • 0

첨부 1


주여, 내가 보니… (요 4:19~26)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명함문화입니다. 명함은, 자기 이름 석 자 외에도 자기가 무엇하며 사는 사람인지, 직업이나 신분을 밝혀주는 기능을 합니다. 명함 중에는 이런 명함도 더러 있습니다. 뒷면에,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자기 이력과 현재 맡고 있는 직함들을 죽 나열해 놓은 명함도 있습니다. 참고가 될지는 몰라도, 왠지 그리 크게 신뢰가 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이 이와 같은 것 아닌가 합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우리 시대 사람들은 연역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살아간다). 논리학에는 연역법이라는 것과 귀납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연역법은, 어떤 명제나 진리를 전제로 내세워 놓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논증해나가는 방식입니다. 삼단논법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예를 들면, (1) 모든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는 수가 있다. (2) 모든 지도다도 사람이다. (3) 그러므로 지도자도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다는 논리방식입니다.

귀납법은 연역법과 정반대입니다. 귀납법은, 어떤 진리나 명제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개별적인 특별한 사실이나 구체적인 작은 사건으로부터 출발해서, 나중에 궁극적인 진리나 원리, 결론을 도출해내는 논리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아는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내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날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좋은 사람, 나쁜 사람, 진실한 사람, 거짓된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인지). 어떤 선입견도 없이 A라는 사람을 만나서 교제합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 10년,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A라는 그 사람 말이야,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야. 그렇지, 저런 사람을 두고 예수쟁이라고 하는 거지. 맞아 맞아. 李 아무개도 예수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金 아무개도 예수 믿는다고는 하는데, 朴 아무개도 교회에서 무슨 職分을 가졌다고 말은 하는데, 그 사람들은 예수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진짜 예수쟁이가 누군지 알려면 저 ‘A라는 아무개’를 보면 알지. 이런 식의 논리를 두고 귀납법적이라고 합니다. 

우리 時代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나는 목사다, 장로다, 집사다, 권사다. 뭐다뭐다 하는 사람은 많은데, 목사 같은 목사가 적고, 장로 같은 장로가 적고, 집사 같은 집사가 적고, 권사 같은 권사가 적다는 겁니다. 교회는 많은데, 여기도 교회, 저기도 교회, 교회 얼마나 많습니까?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탄식하신 두 가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마 23장과 24장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 책망하시면서 화를 선포하십니다. 

(1) 무려 일곱 번씩이나 거듭 “禍 있을진저 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하시면서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外飾을 책망하시면서,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을 나오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 성전에서 나오셔서 길 가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 건물들을 가리키면서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나이까?”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지요.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 2; 마 24, 2; 눅 21, 5-6).

무슨 말씀입니까? 참 신앙은, 내가 교회에서 맡은 직분에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속한 종파(교파나 교단, 바리새인 서기관)에 있는 것도 아니다는 말씀이지요. 교회의 자랑거리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나 규모에 있지 않다는 말씀이지요. 나는 뭐다 나는 뭐다, 한국교회 교인 數는 1,200만 성도다, 교회 數가 자그마치 5 만이나 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 됨과 교회 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 본문을 주목해서 보십시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라는 도시가 나옵니다(구약의 분열왕국 시대,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지요, 북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 왕 당시 바알숭배의 중심지, 바알신전이 있던 곳). 그 사마리아에는 ‘수가’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수가’라는 동네에 한 女人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女人의 정체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공생애 초기(아직 공생애 사역이 시작된 지 일 년이 채 안되었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키시고는, 거기 머물면서 약 8개월 동안 사역하시다가 다시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일부러(의도적으로) 사마리아 도시를 통과하여 북쪽 갈릴리로 올라가시고자 하셨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사는 여인, 매일 낮 정오쯤에 야곱의 우물에 물 길으러 나오는 그 女人을 만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거지요. 마침,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자 예수님이 行路에 너무 피곤하셔서 야곱의 우물곁에 그냥 털썩 주저앉아 쉬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가고 없었습니다. 그 때가, 제6시쯤(낮 정오쯤)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던 바로 그 女人)이 ‘야곱의 우물’에 물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던 그 여인이 나타난 겁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보시자마자 곧바로 그 여인의 인생中心部로 파고 들어가셨습니다. 말을 거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시자마자 그의 인생중심부로 파고 들어가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그 女人은 오래전부터 예수님(메시야, 그리스도)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이 사실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예수님)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자기의 궁금증, 신앙의 고민거리, 모든 문제를 속 시원하게 다 해결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었고,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궁금증, 여러 가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신앙의 고민거리가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을 그렇게 필요로 하고 있는 그 여인에게, 예수님이 그 인생의 중심부로 어떻게 파고 들어가시는지를 留念해서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자 마자 “그래 내가, 바로 너가 기다리던 메시야다, 그리스도다, 예수다”고 선언적으로, 연역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내가 메시야다,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예수다라고 말씀하시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메시야가 아니시라면,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도저히 간파할 수 없는 그의 인생의 핵심문제를 말씀하시므로, 자신이 예수라는 것, 메시야라는 것, 그리스도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그 여인이 자기 스스로 지금 자기와 대화 하고 있는 이 사람이, 선지자구나, 메시야구나, 그리스도구나를 알게 하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내가 예수다, 메시야다, 그리스도다 연역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거지요. 歸納的으로 자신이 그 여인에게 메시야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예수이심을 밝히 드러내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女人이 타는 목마름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간파하시므로 그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단 한 마디 말씀으로, 그의 人生全部를 다 뒤흔들어 놓고 마셨습니다. “물 좀 달라.” 이 한 마디 말씀에, 그 여인은 자기 인생전부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맙니다. 그 한 마디 말씀으로, 목마름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그의 人生中心部로 곧바로 쑥 파고 들어가버리셨습니다. 

女人이 정색을 하고 反問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동문서답으로 자기 인생의 중심부로 파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회피해보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 한 마디 말씀으로 그 여인의 인생중심부로 더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버리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예수님이 하나님의 선물이시라는 것)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물 좀 달라하는 그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여인은 너무 놀랍니다. 反問하면서 다시 요구합니다.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주여,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더 그의 人生 더 깊숙한 곳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버리십니다. 

“가서, 네 男便을 불러 오라.” 이 말씀에 여인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그의 인생 중심부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 여인의 인생을 거울 들여다보듯 훤히 다 꿰뚫어 보시면서 그의 인생의 虛妄함을 선언해버리신 겁니다(쐐기를 박은 거지요). 이쯤 되자, 女人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터져 나오고 맙니다(19절 말씀이지요).

“여자가 이르되 主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는 지금 자기와 대화하고 있는 이 사람이, 자신의 인생의 목마름과 虛妄함을 꿰뚫어보는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그리스도로는 깨닫지 못합니다. 선지자로만 인식합니다.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선지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어떻게 합니까? 자기 인생의 진짜 문젯거리로 남아 있는 본질적인 문제 속으로 막 서둘러서, 오히려 예수님보다 한 걸음 더 앞서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女人은, 이제 더 이상 자기 人生의 주변문제, 아옹다옹하며 사는 삶의 문제에 묶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감하게 그런 문제들을 뛰어넘어서기 시작합니다. 곧바로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고민하면서 끙끙거리고 있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마리아 여인을 그저 나쁜 여자, 남편 여섯 명이나 거느리고 살던 여자 이런 식으로만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인생 깊숙하게 감추어져 있던 진짜 고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문제입니다. 선지자를 만났으니, 자기가 진짜 고뇌하던 그 문제, 숙제를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거지요. “우리 조상들은 이 산(북 이스라엘, 그리심산 성전예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런데, 어느 장소에서의 예배가 진짜 예배입니까? 묻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예배가 진짜입니까? 사마리아 그리심산 성전예배가 진짜예배입니까?

예수님은, 놀라운 진리를 선포합니다. “女子여, 내 말을 믿으라. 그리심산성전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성전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場所문제/ 傳統문제/ 儀式문제가 아니다)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러자 여자가 메시야가 오시면 다 말씀해 주실 것이라 합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혀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으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答이다, 내가 열쇠다 선언하십니다. 귀납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선언하고 계신 겁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女人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 28-30). 놀랍습니다.

▶ 이제, 우리에게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을 그저 부도덕한 여인으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 여인은, 진실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여인은 자기들의 종교인 사마리아 성전종교에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남쪽 예루살렘 성전종교(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종교지요)도 참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인생이 비록 추하였지만, 그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를 기다린 것처럼,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처럼, 우리 시대도 참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있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참 교회를 찾고 있고, 그런 교회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시대의 요구 앞에, 누가 응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 어느 교회가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ㅅ교회에 ㄱ&ㅅ교인들이 수천명씩 몰려갔습니다/ 세습하지 않고, 세대교체만 교회체면 살립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나라는 1,200만 명이 그리스도인이다. 한국교회는 교회 數가 5만이나 된다고 말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믿어주지 않습니다. 이 시대가, 교회를 교회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理由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교회다고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귀납적인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과 교회 됨을 이 時代 앞에서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사는 세속적인 삶의 수준을 너머서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안디옥 교회 교인들처럼, 그리스도인이라(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불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공동체라면, 우리 안에도 있는 世俗的인 慾心들, 方法들, 傳統들,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을 긷기 위해 늘 가지고 다니던 물동이를 과감하게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세상나라 속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복음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그리할 때, 예루살렘 초기교회처럼 온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네게 말하는 내가 바로 그리스도라”하신 주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기는 축복의 말씀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비록 부족한 것 많지만 예수님을 渴望하는 者 되게 하옵소서. 이 시대가 참 그리스도인을 찾고 있습니다. 참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마시고도 또 갈증 나게 하는 물을 긷기 위해 가지고 다니던 물동이를 버리게 하시고, 이제는 예수님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자 되게 하시고, 이 시대가 원하고 바라는 참 그리스도인, 참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