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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당할 때의 자세 (벧전 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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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당할 때의 자세 (벧전 4:12~19)


터키를 여행하는 성지 순례단은 반드시 갑바도기아를 찾아간다. 갑바도기아는 벧전1:1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지명인데 당시 초대 교회에 불어온 환난의 시험이 얼마나 컸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갑바도기아는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고자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온 삶의 흔적이다. 땅속에 집을 짓고 지하에서 결혼하며 아기를 낳고 일생동안 살아간 주거의 흔적은 신앙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감동을 가져다 준다.

오늘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을 때 고난을 이겨내도록 위로하고 권면하며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이기에 산 소망이 있는 자들이다. 거듭난 크리스챤에게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허락해 주신다. 이 소망의 기업을 받게 된 크리스챤은 고난을 당할 때 어떤 태도를 지니고 사는가?

1. 이상히 여기지 말라. (벧전4:12)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늘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난의 시련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많은 질문을 한다. ‘예수 믿는 나를 하나님이 왜 지켜주지 않은가? 왜 돌봐주지 않는가? 하나님이 계신다면 피해가도록 해야 하지 않는가?’라며 삶의 사건 모두를 이상히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즉, 정상적인 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벧전4:12을 보면, ‘불시험’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무섭고 매서운 시험이면 불시험이겠는가? 그런데 이 큰 불시험을 가지고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이라고 하였다. 즉, 불의 뜨거움으로 금과 은을 제련하듯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순수한 믿음으로 제련하기 위해 불시험이란 시련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의 시련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고난이 있다.

롬8:17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오히려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 말씀에 한 술 더 떠서 벧전1:7을 보면 믿음의 시련이 금보다 더 귀하다고 하였다. 금을 불로 연단하다보면 다 녹아 없어질 수 있다. 여기에 비해 믿음의 시련은 결국 그리스도인을 순금 성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과정이기에 없어질 금에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일이다. 그러니 불시험이 오면 정상이다. 이상히 여기지 말고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합당하게 여겨야 한다. 행5:41에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하였다. 

  
2.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벧전4:13)

벧전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골짜기가 깊으면 산봉우리 정상이 높다. 이처럼 고난이 크면 영광도 크다. 아픔이 큰 만큼 즐거워하고 기뻐할 영광이 더 눈부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의 골짜기 때문에 슬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내가 겪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즐거워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여, 나를 거듭나게 하시려, 나를 구원하시려 고난 받으셨다. 나를 향한 고난이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 받는다면 어찌 슬퍼할 일인가? 나를 사랑하사 자신의 몸을 버리고 찢으신 주님, 나를 사랑하사 나무에 달려 저주받으신 주님, 나를 사랑하사 가장 가난하게 되어 버리신 예수님이시다. 내가 고난 받으므로 그 예수님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참예하는 자가 된다면 그 길이야말로 거룩한 길이요, 즐거워해야 할 길이다.

내가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자식이 어려움을 당할 때 부모의 마음은 어떠한가? 그 어려움의 고난에 함께 하고 싶어할 것이다. 대신 할 수만 있다면 대신 고난을 짊어지고 가고 싶을 것이다. 자식의 아픔을 볼 수 없어서 대신 담당하려 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므로 나는 영벌 인생에서 천국 인생이 되었다. 내가 고난 받음이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라면 기뻐해야 할 일이다. 더군다나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한다.

벧전4:14 “고난 받는 네게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내 머리 위에 함께 하신다. 고난은 낙심하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이집트에는 모카감교회가 있는데 그 말의 뜻이 “짤렸다”라는 말이다. 애굽의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을 믿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하여 쓰레기 더미에서 살아가는 이 모카감교회는 아프리카 최대의 교회다. 직장, 사회적 신분, 존귀 영광, 모두 다 없어도 쓰레기 더미를 뒤집어 쓰면서 살아도 12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한다. 바로 그들의 예배 위에 하나님의 영, 영광의 영이 임하여 놀라운 기적과 신유가 나타난다. 그들은 눈물 대신 기쁨의 찬양으로 살아간다. 

이 세상 도처에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 안에서도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다. 그래서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도 즐거운 잔치집의 걸음으로 살아간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4:16)

벧전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난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죄를 지으므로 감옥에 들어가고 도둑질하므로 손가락질 받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고난을 받으면 안된다. 죄값을 치르는 고난을 즐거워해서도 안된다. 

벧전4:15 “너희 중에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나와...”라고 하였다.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정말 숨어지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기에 손해를 보고 그리스도인이기에 왕따를 당하고 그리스도인이기에 억울한 말을 듣는다면 자랑스러운 일이다. 무고히 고난 당할 때 도리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러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주님도 마5:10~12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할렐루야!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고난을 받으면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참으로 바르게 살고 있군요.” 고난을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고 영광 돌릴 일이다.

요즘 매스컴을 보면 MBC가 편향된 메시지를 내 보내더니 이제는 SBS가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허구의 종교임을, 신화에 불과한 종교라고 방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항의할 것도 없다. 데모할 것도 없다. 「예수가 신화다.」라는 방송에 교회가 무너지지 않는다. 아니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또 기뻐하며 영광 돌려야 한다. 

기독교가 침신앙, 참생명이기에 거짓의 영, 미혹의 영이 공격한다. 핍박도 한다. 기독교가 빛이기에 어두움은 이 빛을 끄려고 한다. 어둠이 빛 앞에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불편해서 끄려는 것이다. 아, 기독교는 진리다. 그 속에서 영광을 돌리자. 세상이 아무리 공격해도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천만인이 신화라고 해도 예수만이 나를 위해 죽어 주셨다. 그러므로 자랑스럽게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고 영광을 돌리라.
  

4.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며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라. (벧전4:19)

벧전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을 행하자. 핍박하는 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선을 행하자. 기도해 줄 수 있는 힘을 구하자.

마5:4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벧전4:17~18을 보라.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 그 심판자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한다면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다루시는데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는가?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설 수 있겠는가?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인은 하늘 나라를 모른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 온 세상 사람들은 부활이 거짓말이다, 허구다라고 말하며 신이 나 한다. 부활이 없어야 온갖 더러운 죄를 행해도 되고 죽어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부활을 가지고 진리냐, 거짓이냐를 투표하면 부활이 없다고 다수표를 던질 것이다. 그래도 소용없다. 그들은 심판 앞에 설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저들이 몰라서 핍박하고 몰라서 SBS에서 방송하는 것이니 불쌍히 여기고 선을 행하자. 우리의 하나님께 영혼을 맡겨드리고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섬기고 보살피며 사랑의 길을 가자. 

히10:35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히10:39 “뒤로 물러가지 말라.”고 하였다.

히10:34 “나의 산업을 빼앗길 때도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라.”고 하였다.

그렇다.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선포하며 정면 돌파하라. 그때 고난은 승리의 자리고 바뀐다. 불시험을 당한 다니엘의 세 친구, 풀무 속에 타 죽어도 좋다. 그리고 들어갔더니 도리어 살아났다. 묶고 있던 끈이 끊어지고 불에 던지는 군인들이 타 죽었다. 오히려 세 친구의 풀무 속에는 또 한 사람이 동행하며 세 친구를 지켜주고 살려내었다.

고난을 당할 때 담대하자. 이상히 여기지 말자. 즐거워하자. 무조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선을 행하자. 고난은 상으로 바뀌고 우리는 제련의 과정을 거친 순금처럼 믿음의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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