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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의 어리석음 (마 13:24~30,36~43) - 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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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어리석음 (마 13:24~30,36~4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장마철인데 비는 제대로 오지 않고 찌는듯한 더위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건강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더위에 지쳐있을 때, 설교시간에 조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그런 사람들을 못 봐줬습니다. ‘눈 뜨세요’ ‘졸지마세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예배 후에 집에 가면 저의 내자는 제게 강하게 항의합니다. ‘왜 그러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다툼을 한 일이 사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제가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몇일 전 저는 신문에서 유쾌하지 못한 아주 큰 대문짝만한 광고를 보았습니다. 이런 광고입니다. ‘중학생에게 쇠파이프를 들게한 깡패세력을 끝까지 추적하여 법적으로 패가망신 시키자’ 이런 광고입니다. 이게 국민행동본부라는 모임의 주장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의 심정은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말 인간적 감정적 대처이지 국민이 행할 행동은 아닙니다. 국민행동본부에서 선동 설 일은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주신 말씀 가라지의 비유에서 그 해답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할 때에 그들의 일상과 밀접한 생활 속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24절과 30절에 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는 아마 그래도 어려웠던가 봐요. 36절 이하에서 사람들이 다 물러가고 난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시 그 뜻을 묻습니다. 그래서 43절까지 해설이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직접 해설하신 이 해설이 이 비유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안내가 되고 있습니다. 이 해설에 의하면 이 비유는 공동체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대한 서두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4절에 그렇게 시작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천국은 지상에서 시작된 천국공동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팔레스타인에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한 가라지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밭에서 자라고 있는 가라지 처리문제를 놓고 주인과 종의 대화입니다. 어떤 농부가 밭에 곡식 씨앗을 뿌렸는데, 얼마 후 그곳에서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농부에게 가라지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없애야 할 잡초입니다. 가라지라고 번역된 원문의 ‘지자니온’은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어릴 때 보고 자라온 보리밭에 깜부기나 벼와 함께 자라는 피와 아주 유사한 식물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곡식과 가라지가 초기에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때가 되어 둘을 구별 할 수 있을 때쯤 되면, 이미 두 식물의 뿌리는 서로 엉킨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가라지 처리문제는 근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농부는 곡식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몇 차례에 걸처 가라지를 뽑습니다. 우리의 농촌에서도 부지런한 농부는 옛날에 이 더운 여름에 세 번은 논을 메고 피를 뽑아줍니다. 그 피를 뽑는 일을 피사리라고 합니다. 피사리, 그것이 벼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일을 못하게 하고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와 알곡이 나뉘고 그 때가서 가라지를 불태워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자세하게 말하면, 거의 마지막 단계에 가면 알곡은 다 고개를 숙이고 피는 빳빳이 올라와서 그 피들을 먼저 낫으로 다 벨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쉽게 그것을 다 베어 묶어서 태우고 알곡은 곳간에 들일 수 있게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이 땅의 현실과 그것의 마지막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마치 곡식과 가라지가 한 밭에서 자라면서 서로 뿌리가 얼켜있듯이 하나님의 백성과 멸망의 자녀들이 섞여 있다 할지라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분명히 구별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의 현실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주님은 곡식이 자라야할 밭에 가라지가 가득한 것을 이해할 수 없어하는 종들, 그리고 그 가라지를 속히 제거하기를 원하는 종들에게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는 인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 땅의 혼탁함과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어 실망하며 고민하게 됩니다. 악한 세력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품게도 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 비유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종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주인의 말씀에서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고 또 이 말씀대로 행하기 쉽지 않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천국과 같은 사회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종들은 먼저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묻고 있습니다. 27절을 보시면 ‘가라지는 사람들이 잘 때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덧뿌리고 간 것이다’고 주인이 설명합니다. 곡식을 뿌려놓은 자리에 원수가 몰래 뿌려놓고 간 것입니다. 그래서 밭에는 곡식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섞여 자라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밭과 같아서 의로운 사람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독초 같은 가라지도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 왜 악한 가라지가 가득한지 우리는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안에서도 이런 곡식과 가라지처럼 상반된 두 종류의 사람들이 공존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는 처음부터 선과 악이 확연히 구별되는 자리가 아니라 마지막 심판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과 악의 공존이 가시화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 구원받을 하나님의 자녀와 거짓된 사람들이 구별되지 않고 또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상태로 지속되다가 결국 심판의 날에 결정이 난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 안에 이런 가라지들이 어떻게 생겨 난 것입니까. 주인을 미워하는 원수가 사람들이 잘 때 몰래 가라지를 뿌려놓았듯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 마귀가 가라지 씨앗을 뿌려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은 그 열매를 보지 않고는 쉽게 구별되지 않아서 뿌려서 오랜 기간, 오랜 시간 동안 곡식의 성장을 방해하고 고통을 줍니다. 이것이 원수 마귀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 안에 뿌려진 가라지는 원수마귀의 행위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원수를 알고 우리가 대적할 상대의 계책을 알 때, 우리의 사명이 분명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가라지 되게 하는 사탄의 세력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사명의식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세력을 이기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종들은 ‘가라지를 뽑을까요’ 라고 묻습니다. 28절에 보시면 가라지를 발견한 종들은 부지런한 농부가 잡초를 제거하듯이 서둘러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였습니다. 일찍 가라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가라지가 곡식의 영양분을 빼앗기 때문에 방치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종들은 주인에게 지금 가라지를 뽑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종들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하십니다. 하지만 주인은 종들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하시는 것은 지금 가라지를 뽑을 것이 아니라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고의적으로 가라지를 뿌린 의도를 그 주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가득 뿌려놓은 것은 곡식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종들이 섣불리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곡식까지 뽑게 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선과 악을 분별하려는 조급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나는 선의 편에 서서 악을 제거하려는 오만함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우리가 나 자신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됩니다. 

에덴동산의 뱀의 유혹은 인간이 선악을 쉽게 판단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우리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가라지를 뽑을까요’ 라고 묻는 종들에게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은 원수 마귀가 세상에 악의 씨를 퍼뜨려 믿음의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멸망하게 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일과 우리의 사명을 구별해 주십니다.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곡식과 함께 자라게 하려는 의도는 곡식이 당하는 어려움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보호하려 하심입니다. 가라지의 뿌리는 밀 뿌리보다 억새어서 가라지를 뽑으면 밀도 뽑히거나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가라지와 곡식의 뿌리가 얽혀 함께 생존경쟁을 하며 자라면서 오히려 곡식들이 시들지 않고 알곡을 맺기를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라지는 결코 알곡을 삼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다르며 근원이 다르며 본질이 다릅니다. 그런데도 같이 모여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을 방치하며 언제까지 인내해야 합니까. 그러나 심판과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성경은 거듭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은 악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백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악을 멸하는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전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제거하려고 하기 전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악인을 멸망시키고 심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오히려 주님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그들을 제자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악과 맞설 자리와 인내해야 할 자리를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최후의 승리, 하나님의 나라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그런 신뢰와 인내로 살아가는 것이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하실 일과 우리의 사명을 분명하게 구별하며 살아가는 천국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농업에 대한 가르침으로 볼 경우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혹시 곡식을 함께 뽑는 일이 있더라도 가라지를 뽑아 버리는 것이 더 경제적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렇게 어리석은 이야기를 해 주셨을까요. 이것이 천국의 비밀이요. 이것이 천국과 세상이 다른 점입니다. 이 세상은 효율이라는 관점에서만 일을 하지만, 천국의 원리는 효율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다치는 일이라면 어리석은 일이라도 감수하는 것이 천국의 원리입니다. 이 세상 가치관으로는 이것이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천국생활을 할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사고방식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우주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도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시시비비하면서 지나치게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정말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죽을 때보면 안다고들 합니다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판단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조급해 하지 말 것입니다. 나의 판단은 나의 기분에 치우칠 뿐 아니라 흑백논리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판단은 삼가 조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우리의 공동체 구성원에게 서로 정죄하고 축출하는 일에 관심하지 말고 함께 더불어 생활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죄를 할 수 있는 분은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시는 분뿐입니다. 누가 가라지이고 누가 알곡인지 판단하실 분도 그 분 뿐이십니다. 내가 할 일은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내 자신이 가라지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과 협력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그분의 공동체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는 이 비유에서 분명한 교회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천사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의 좋은 씨앗이 만들어 놓은 공동체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사탄이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표현대로 사람들이 잘 때, 그 공동체 안에 거짓 씨앗을 뿌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익기 전까지 누가 진짜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어로 말하는 Mix Bag, 이것저것 다 함께 섞어 놓은 보따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서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안겨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도와서 알곡이 되게 하는 노력을 하면서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릴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의인을 연단하신 다는 것입니다. 가라지와 함께 한다는 것은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함께 있음으로서 서로 견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긍정적이고 유익한 면에서 받아들일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순수하게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고 환란을 통하여 강하게 되며 참된 지혜를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믿음의 성장이요 믿음의 성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일무사하여 평안한 여건이 좋을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가라지가 함께 있는 우리의 사회, 우리의 공동체 이런 상황 속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잘 자라게 하여 알곡을 맺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곡식과 가라지처럼 의인과 악인이 함께 얽혀 살아갑니다. 그것을 볼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민과 좌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선과 악, 빛과 어둠, 의와 불의를 확실히 구별해야 할 상황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뽑으려는 종들의 모습처럼 우리는 악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라지를 뽑지 않는 주인처럼 악인들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모순에 대한 최종 해결을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종말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교적 의미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훈련을 받게 되고 지혜로워지며 꾸준히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나라와 그 뜻을 보다 더 크고 온전하게 확장되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서두르지도 말고 불평도 말것이며, 우리가 당한 이 처지에서 인내하며 바르게 성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잘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하며 그 열매는 추수 때가 오기전에 충실하고 탐스러운 모습을 갖추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라지가 잔뜩 뿌려져 있는 세상에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의 삶에 고통을 주는 가라지는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내가 뽑아버리고자 하는 가라지 같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은 그것을 왜 아직까지 뽑지 않으실까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주님의 음성과 해답을 받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악 간에 분별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는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리고 혼탁해도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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