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와서 우리를 도우라 (행 16:6~10)

  • 잡초 잡초
  • 474
  • 0

첨부 1


와서 우리를 도우라 (행 16:6~10)


제가 여러분에게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계십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아마 상당한 사람들이 이 질문 앞에 당황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당연한 특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들의 무의미한 일상적인 삶의 반복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중요하냐하면 인생에는 살면 살수록 사건이 많아집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줄지어 일어나기도 하고 문제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고개를 내밀면서 어려움을 주기도합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일에 엄청난 돈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올바르게 살려고 해도 많은 유혹들이 내 안으로 밀려들고, 정직하게 살아도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도대체 어떻하면 좋겠습니까?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부딪힌 문제 앞에 우왕좌왕하는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세계역사를 바꾸어놓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선교 역사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어 놓은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는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7절에 보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바울은 애썼지만 성령께서 허락치를 않으셨어요. 무슨 말씀입니까? 말씀은 바울이 전하지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울 일지라도 그 주체는, 전도의 주체는 바울이 아니라 성령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위대하다고 하는 바울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일 뿐 역사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아셔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 가고자 한 것은 돈을 벌거나 자신의 육신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나 어떤 세상 적인 목적을 위해서 가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가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과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 다릅니다. 사55:9절에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리고 잠 16:9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가려고 했던 비두니아는 흑해 연안에 자리 잡은 지방으로서 당시 소아시아에서는 수준 높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일찍 복음을 받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왜 갑자기 바울 일행의 발걸음을 돌려 지금의 유럽인 마게도니아로 옮기게 하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이야말로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아시아는 문명이 낙후된 지역이 되었고 유럽은 선진국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유럽은 기독교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지난 1900여년 동안 세계를 주도하는 시구 문명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그 일행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니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지나고 보니깐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시아보다 유럽을 더 사랑한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두니아로 가고자하는 바울 일행을 성령께서 막으셨을 때 바울 자신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드로아에서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우리를 도우라'는 것은 소아시아를 버리라고 한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울의 뜻은 소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소아시아에 머물지 말고 좀더 세상을 넓게 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작은 산 위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큰 산 위에서 세상을 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네 지경을 넓히라', '네 시야를 넓히라', '네 생각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문제가 되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대부분 나 중심적인 태도입니다. 가족 중심, 내 자녀, 내 형제가 전부입니다. 조금 나은 사람은 교회를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사람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내 생각, 내 경험이 전부입니다. '교회는 이래야 합니다'라고 열심히 침튀기면서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이 가능합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본 것이 그게 전부입니다. 경험한 것이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해도 내 가정, 내 교회가 전부입니다. 우리 지경이 바로 거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 우리 교회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온 인류, 온 민족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바울은 그 동안 자신의 선교지에 대해 많은 연구와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계획과 의지를 겸손하게 내려놓습니다. 10절에 보면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0절에서 우리가 두 가지 관심을 가져봅니다. 하나는 바울이 환상을 본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환상을 본 후에 곧, 바로 떠나려고 힘썼습니다. 곧 바로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환상 본 후에,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서 준비하고 제 할 일 마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곧 바로 떠났습니다. 때때로 성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은퇴 후에, 이번 일을 마치고, 이런 저런 교회일 좀 하고 싶다'는 얘기 종종 듣습니다. 목사로서야 반가운 소리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정말 주의 일 하는 것은 은퇴까지 기다려야 하고 자신의 일을 마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있을 때,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는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에 대하여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해석했습니다. 마게도냐가 지금 어디인지 아십니까? 지금의 유고지역입니다. 유고 슬라비아는 여러분도 아시지만 내전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다 파괴가 된 아픔의 현장입니다. 아마 당시의 마게도냐 역시 이와 버금가는 영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꺼이 마게도냐에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게도냐와 크게 다를바 없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 믿는 성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세상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때로는 경제적으로 때로는 영적인 외로움을 호소합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도 예수가 필요해서 "우리를 도우라"고 소리지르며 손짓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라"는 음성이 들리십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지난 5일에 출발해서 11일에 돌아오는 캄보디아 사역을 은혜 가운데 잘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 그리고 철야와 기도의 불을 계속 지펴 주셔서 아무 사고 없이 다녀오게 됨을 먼저 인솔자인 제가 교회 앞에 대신 감사를 드립니다. 정글 교회와 또 몇 군데 사역지에서 예배와 의료선교, 그리고 머리를 깍는 이 미용사역, 그리고 청년들의 문화 사역은 그 지역 주민들 가슴에 아마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흥분과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역을 마치고 프놈펜에 들어와서 지난 날 공산 정권이 들어서서 200만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한 학살 현장을 가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폴포트 공산정권은 철모르는 아이들을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동족들을 죽이는 살인도구로 삼는 극악한 짓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들어서 그 자리에서 메어쳐 죽게 하고, 사람의 생체를 마치 소 돼지 잡듯이 잘라내고, 살아있는 가슴을 뜯어내고 그 곳에 독 지네를 집어넣고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것을 즐기는 그들의 행태는 사람의 형상으로는 저지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청년들이 쏟은 사랑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사역의 현장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돌아와서 더위와 물을 잘 못 갈아먹을 때 생기는 병으로 몇몇의 청년들이 고생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를 도와 달라!' 는 이 요청은 우리 교회가 해야할 일이 아닙니까?
지금 전 세계의 3/2를 차지하는 이 아시아에 복음화 %는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캄보디아 주변 나라들은 기아와 굶주림 그리고 마약과 부패로 인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김미선 선교사가 있는 미안마 역시 지금 엄청난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미얀마를 강타한 사이클론으로 이미 사망자는 40만 명에 이르고 이재민이 2백40만 명이 발생하였습니다. 음식과 물이 부족해 주민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의료시설이 낙후돼 사람들이 병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진흙탕 물위에는 시체가 떠다니고 전염병의 공포는 커져가고 있습니다.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은 기아와 병마로 쓰러져 가는 참담한 실정입니다.

필리핀 일로 일로에서 사역하시는 표석구 선교사님의 사역지에 엄청난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홍수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저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메일이 날아 왔습니다. 제가 그대로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리훗 집사님의 예배 선언이 있었습니다. "... 오늘 더러는 장화를 신고, 진흙 밭을 지나 50여명 이상의 교인들이 9시 30분에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 환난 속에서 비록 많은 교인들 가정이 집은 무너졌고, 담은 무너졌을 지라도 생명은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문제는 너무나도 두려운 일들인 것입니다.

예배가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슬픔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카바오바오 목사님은 기도를 하다가 눈물을 참지 못하여 엉엉 울었습니다. '''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아내는 예배 시작 전부터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제지를 시켜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2미터가 넘는 홍수의 물길이 16시간 이상 집 앞으로 흘렀고, 가족 모두는 급히 지붕으로 대피하여 탈출하였고, 집은 아무런 기약 없이 물 속에 잠겼습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 한국에서 들고 온 그 많던 책들도 다 물 속에 잠겼고, 컴퓨터 및 모든 것이 물에 잠겼습니다. 학교도 1층의 3분의 2 이상이 잠겼고, 교회도 그랬습니다. 일로일로에서 최초의 재앙이, 그 누구도 감히 예상치 못했던 재앙이 다른 집보다도 이곳 일로일로시 하로구 쿠바이 동과 학교가 잇는 방커스 동을 완전히 휩쓸고 간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만 쉴 뿐입니다. 신학교 기숙사도 물에 잠겼고... 하나님, 저희 교회를 도와 주십시요, 저희 그레이트 인터내셔날 학교를 도와 주십시요. 이곳 신학교와 저희 집을 도와 주십시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려서는 주로 받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숙해 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주는 것,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땅위에 아직도 예수를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의 지경을 넓히는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 일은 정말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하고 또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눔의 가치를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도 친히 그가 전도하고 양육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는 마지막 말씀에서 행전20:35에서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남조 시인의 "앓는 이를 위하여"라는 시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고통을 통하여/ 생명의 존귀함을 여기고/ 순간마다 어려움을 알기에/ 이웃의 아픔을/ 눈물로 쓰다듬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우리가 쓰다듬는 것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쓰다듬고 치유하는 신앙인이 멋지지 않습니까? 위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가지고 달려가는 것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김남조 시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믿고 있는 이상으로/ 더욱 믿으십시오." 신앙을 왜 가집니까? 눈물로 쓰다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공급받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이 필요합니까? 교회에 어떤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까? 시각을 천한 것에서 귀한 것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제 눈을 크게 떠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영혼의 사태를 바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귀를 귀울여서 건너와서 도와 달라는 마음의 울부짖음을 들읍시다. 이제는 마음을 더 넓게 열어서 그들을 품고, 또 손을 더 넓게 펴서 돕는 자가 됩시다. 여러 사람들이 먹고 남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인 아이의 작은 헌신에서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그 숱한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이 세상에 더 오래 살지 모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에 누군가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면서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전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 음성이 들리십니까? 그 현장이 어디입니까? 꼭 선교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바로 이웃이고, 나를 필요로 하는 우리 삶의 현장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돌아온 탕자를 품듯 그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도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