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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함.동(나와 함께 갇힌 자요 나의 동역자) (빌 1: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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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함.동(나와 함께 갇힌 자요 나의 동역자) (빌 1:22~25)


빌레몬서는 바울이 1차 로마 감옥에 있을 동안 기록한 옥중서신입니다. 로마의 수많은 종들 가운데 한사람인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서 물건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 후 그는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게 됩니다. 잘못하면 오네시모에게 사형에 해당되는 형이 내려 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종에 대한 빌레몬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형제애로 용서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너는 나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노예제도 폐지를 직접적으로 주장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 교회는 바울이 가르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원리를 따라 노예제도의 부당성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빌레몬은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주어 다시 바울에게 되돌려 보냈을 것이라는 후문은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나중에 오네시모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하는데는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바울서신은 공적인 서신(Epistle)과 사적인 편지(letter)로 나눌 수 있는데 빌레몬서는 후자의 대표적 편지입니다. 

우리가 접근해야만 하는 본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특이합니다. 빌레몬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는 여기 다섯 명의 동역자가 골로새서 4장 10-14절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을 거명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빌레몬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한 모든 자들의 동일한 생각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하면서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도와서 복음사역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Ⅰ. 바울과 함께 갇힌 에바브라가 있습니다. 

본문 1장 23절에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라고 했습니다. 
그는 골로새 출신으로 바울이 에베소에 체류 중에 두란노 서원에서 열정적으로 전파하는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빌립보 사람 에바브로디도(Epaphro ditus)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감옥에 갇히지 아니했습니다. 체포와 구금을 당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를 가리켜 『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에바브라가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바울을 도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은 사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는 기꺼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자초한 사람입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의 평신도를 가르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7절에 『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의 신상에 대해서는 골로새서 4장 12-13절에 『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들의 횡포 앞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구하고자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가 바울을 만나 교회의 사정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를 이끌어 갈 지침서를 바울로부터 받아 가지고 와서 골로새 교회를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가리켜 함께 종된 자(골 1:7)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의 종이라고 그를 칭찬했습니다. 
골로새서 4장 12절에 『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라고 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바울의 지도에 따라 골로새 부근인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갇히지 아니했으나 갇힌 자처럼, 떨어져 있으나 곁에 있는 사람처럼 바울과 함께 한 동역자였습니다. 


Ⅱ. 바울의 동역자 마가가 있습니다. 

본문 1장 24절에 『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마가복음을 기록할 정도이지만 그에게도 연약한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을 따라 선교단의 일행이 되어 구브로 섬에서 버가로 갔을 때 그 선교단에서 빠져나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에 『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 요한은 마가와 동일인입니다. 
마가가 향수병에 걸렸는지 선교여행에 동참할 용기가 부족했는지는 모릅니다. 또 바울이 병들고 고생하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렸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는 갈등을 몰고 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나중에 다시 베드로와 바울을 도왔고 바나바도 도왔습니다. 이제 바울에게 마가는 재 등용이 된 셈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고 했습니다. 

마가는 처음에는 기회를 놓쳤으나 다시 바울에게 등용되어서 바울의 동역자로서의 길을 걸었습니다. 처음보다는 나중이 좋았던 마가였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결점과 실패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다시 정도(正道)를 좇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참된 일에는 미련을 가지고 해내고야 마는 사람입니다. 그는 바른 역사의식과 바른 가치관을 가진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Ⅲ. 바울의 동역자 아리스다고가 있습니다. 

본문 1장 24절에 『 또한 나의 동역자…아리스다고… 』라고 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에베소에서 바울과 같이 사역하다가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소동이 났을 때 가이오와 함께 투옥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9장 29절에 『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동행했고 바울이 로마에 갈 때도 그는 동행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4절에 『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2절에 『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고 했습니다. 

성경에 아리스다고에 대해서 크게 부각된 곳은 없으나 그는 사도 바울의 측근 비서로 일했던 바울의 기억에 남는 동역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크게 드러나는 일과 그 일을 함으로 크게 드러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이 있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름도 빛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기왕이면 드러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더 희생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힘들고 고생되는 일을 뻔히 알면서도 그 고난에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부요하고 남에게 희생할 수 없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믿지 않기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은 후천적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복을 받습니다. 이 땅의 축복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으로 추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마 6:33). 
그렇다면 그는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교육을 잘못 받은 것입니다. 그의 부모가 나름대로 자식을 잘 키운다고 했으나 결국 자기 배를 채우도록 키운 것입니다. 둘째로 학교 교육이 잘못된 것입니다. 셋째로 사회 교육이 잘못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교육이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가 교육적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 교육은 전인교육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입니다. 


Ⅳ. 바울의 동역자 데마가 있습니다. 

본문 1장 24절에 『 또한 나의 동역자… 데마…가 문안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데마는 바울의 일행으로 바울이 두 번째 로마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그 곁에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 못지않게 바울 곁에서 사역했던 바울의 최측근입니다. 그러한 데마에게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고 했습니다. 

데마가 바울을 왜 떠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이유는 쉽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문명의 도시였습니다. 철저하게 믿음생활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도시였습니다. 데마는 바울을 떠나 바로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데마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데마가 주님을 버렸다하지 아니하고 나를 버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이전에 마가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말 속에는 혹시 바울 자신이 데마를 위한 배려가 적어서 자기를 떠났다는 느낌을 전혀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데마가 어서 속히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도 바울의 간절함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데마 같은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교회 문화보다 세상 문화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날이 갈수록 더 노골화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우리교회를 다니다가 나오지 아니하거나 순종치 않는 성도들에 대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주님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Ⅴ. 바울의 동역자 누가가 있습니다. 

본문 1장 25절에 『 또한 나의 동역자…누가가 문안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누가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누가의 가족은 로마에 의해 점령당한 점령지역의 사람들로서 종의 신분으로 살던 중에 누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누가의 모친은 로마의 행정관리에게 재가했다고 합니다. 

누가는 의붓아버지의 도움으로 당시의 패권도시 애굽(이집트)으로 유학하여 의학을 전공하고 의사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의사가 되어 자기 고향에 돌아와 보니 그곳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병이 낫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의술로는 안 되는 병이 낫는 것을 보고 그는 바울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도자 바울도 사람인지라 그 역시 육신의 질병과 복음의 격전지에서 당하는 온갖 고난으로 병약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에게 누가는 주치의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누가는 이방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주치의였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전파하는 복음의 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로부터 신약성경 최고의 장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지 않아서 초창기 성경신학자들이 성경 기록자를 밝히는 데 매우 힘들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인 누가를 가리켜 그의 인품이나 성격을 말한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고 한 바울의 말을 감안할 때 그의 인품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복음의 투사 사도 바울이 네로 궁전에서 받게 될 심판을 앞에 놓고 있을 때입니다. 만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이 세상의 모든 여건은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때 누가는 그러한 바울을 떠나지 아니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고 74세에 버드니아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로나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데 매우 인색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의 코미디언들도 조심스럽게 정치인들을 풍자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이골이 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 아무개, 김대중 대통령과 한 아무개, 박아무개, 권아무개, 전두환 대통령과 장아무개 등 이들의 결합은 완곡한 표현으로 정치적 함수관계 때문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의 결합은 이익 분배의 함수관계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결합은 좋게 말해서 학문(연구)계승의 함수관계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동역자들은 이 세상의 이익분배의 함수관계 때문에 결속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정치적 함수관계 때문에 결속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학문계승의 함수관계 때문에 결속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은총에 감격하여 만난 사람들입니다. 마침내 그들의 보은 행위가 하나님 제일주의와 복음을 위한 신행일치의 순교정신으로 성화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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