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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멍에를 메고 (마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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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멍에를 메고 (마 11:25~30)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11:25-30

정신의학전문의 대니얼 고틀립 박사는 어린 시절 학습장애로 어렵게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후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암에 걸렸습니다. 비록 완쾌는 되었지만 고통스러운 투병생활로 부부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틀립은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이 마비되어 전동 휠체어를 의지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고틀립은 자신의 이러한 모습에 좌절했고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며 떠났습니다. 그 후 떠난 아내가 사망하고, 유일하게 의지하던 누이와 부모님이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틀립에게는 둘째 딸이 낳은 손자 샘이 있었습니다. 샘을 너무도 사랑했으며 휠체어에 기어 앉은 샘을 한없이 바라보며 샘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4개월 밖에 안 된 샘에게 ‘자폐아’라는 판정이 내려집니다. 너무도 절망적인 상황이 된 것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상황이 되면 ‘떠나라’고 말합니다. 훌훌 벗어버리고 며칠 씩, 혹은 몇 주를 떠나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보면 여전히 무거운 짐과 멍에가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자포자기하고, 또다시 절망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죽음만이 모든 고통과 멍에를 벗게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고틀립 박사는 자폐아로서 힘든 인생을 살아갈 손자 샘을 위해 편지글, 즉,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남겼는데, 그 중에 눈을 뗄 수 없는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터널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치며 출구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내 곁에 다가와 나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어줄 사람, 우리 모두에겐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샘! 상처를 입으면 널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거라. 널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않는, 네 아픔을 함께 해줄 사람 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멍청하게 왜 그러고 있니, 빨리 나와”라고 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말은 참 쉽지요. 하지만 터널 속에 그러고 있고 싶어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여 집사님이 결혼 후 8년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몸이 약해 3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7살 때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시댁의 비난과 남편의 냉담함이 심해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혼 후 교인들에게서 오는 냉담함에 놀랐고 특히 주위 사람들의 충고는 가시로 와 닿았답니다. 그분은 “그 당시 가장 필요했던 것은 충고가 아니라 나를 이해해 주고 그저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고틀립 박사가 샘에게 이야기 해준 그대로입니다.

어두운 터널 속 상황에서는 우리에게 충고해 줄 사람이 아닌, 나와 진정으로 함께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섣부른 충고도, 비난도 하지 않고, 내 아픔을 함께 하면서 그저 말없이 나의 그 어두운 터널로 내려와 있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틀립 박사가 샘에게 하는 마지막 충고는 그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분이 이미 계십니다. 우리가 찾아가지 않아도, 손만 내밀면 만질 수 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떠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짐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멀리 도망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그대로 지고 예수님께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로 가기만 하면 모든 짐을 벗기고 참된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절). 듣기만 해도 힘과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그 무거운 짐들에 짓눌러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25~26절 말씀에 나타납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당시 율법 안에 있어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알고 있고, 이런 일에는 자신만만하다고 스스로를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로 생각하고 있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처럼 내가 할 수 있고,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지혜를 믿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선 ‘어린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은 듣습니다. 또한 이에 응답하면 짐을 벗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짐을 내려놓기 전에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나의 지혜와 나의 경험과 나의 고집과 나의 자존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실은 그게 나의 가장 큰 짐입니다. 지게 위의 짐을 내리는 것보다 지게 자체를 벗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걸 내려놓지 않고서 인생의 짐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5살짜리 유치원 아이가 어깨에 큰 배낭을 메고 아빠를 바라보며 “아빠”하고 부르면 아무리 무심한 아빠라도 그 배낭을 벗겨주어 어느새 그 배낭은 아빠의 어깨에 있게 되지요. “아빠”라는 말 속에는 ‘전적으로 나를 책임져 줄 거야’라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가 보면 똑같습니다. 어려운 살림, 무심한 남편, 공부 못하는 자식,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면 그 순간 피곤한 몸과 영혼이 위로받고 격려 받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나가고, 집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세상의 수많은 짐들로 인해 스트레스는 계속해서 쌓여만 갑니다.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이 짐을 어찌해야할 지 몰라 당황하게 되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식의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29절 말씀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쉼을 얻는다는 뜻의 ‘유리스코’라는 단어는 ‘찾다, 발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 마음이 쉼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초청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로 가면 주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이것이 28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29절에는 우리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고 나서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면 우리 마음이 안식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발견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다른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 오면 우리는 또 쓰러지게 됩니다. 이 쉼을 어떻게 발견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29절 중반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놓치기 때문에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주님께로 가면 모든 멍에를 다 벗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나의 멍에’ 즉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지지 않고 가야 참 안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가는 것이 참 안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는 원래 소들이 밭을 갈 때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멍에를 안 매우는 소들이 있긴 있습니다. 그 소는 잡아먹기 위해 키우는 비육우입니다. 비육우는 멍에를 매게 하지 않습니다. 멍에를 메면 살이 안 쪄서 잡아먹기가 나쁩니다. 멍에를 메지 않는 소는 밭을 갈지 못합니다. 밭을 갈아야 거기에 곡식이 나고, 야채가 납니다.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멍에를 메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걱정, 근심, 어려운 상황,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멍에가 있고, 그 멍에를 메고 인생의 밭을 갈아엎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멍에를 벗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멍에를 메고 있는데, 그 고삐를 누가 잡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쾌락이 고삐를 잡으면 쾌락의 밭을 갈고 쾌락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생명을 낳긴 낳는데 죽은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욕심이 나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 욕심의 밭을 가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결국 나의 인생 밭에 사망의 열매들이 맺히게 되겠지요. 원망이 나의 고삐를 잡으면 원망의 열매들이 내 인생의 밭에 주렁주렁 맺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고삐를 잡고 계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은혜의 열매를 맺는 밭을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무엇일까요?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30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현재 내가 지고 있는 멍에보다 크기도 작고, 플라스틱처럼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무게도 적게 나가는 그런 멍에가 아닙니다. 사실 이 멍에는 십자가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멍에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너무도 무거운 것입니다. 너무도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십자가의 고생 때문에 그 멍에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을 핏방울 같이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그 안에서 깃털처럼 가벼운 자유를 누리셨습니다. 멍에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배우고 마음이 진정한 안식을 발견하면 그렇게 무겁게만 느껴지던 멍에가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벼워질 수 있습니까? 비결은 우리가 ‘주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용서해 보는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 준 그 사람 앞에서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말하고 용서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섬겨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기까지 나를 섬기신 주님처럼 최선을 다해 섬겨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온 힘을 다해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사랑의 심장이 터져버린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내 가슴도 사랑으로 터져버리도록 사랑해 보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배운다는 것은 주님의 삶을 묵상하고 주님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지고 있는 멍에가 무겁지 않게 느껴집니다. 가족의 짐, 사업의 짐, 관계의 짐, 환경의 짐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나는 기쁨으로 그 멍에를 메고, 감사함으로 짐을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참된 안식을 인생에서 꼭 발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께 배우지도 않고, 배운 것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짐만 벗겨달라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요청이고,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그저 먹으려는 습관을 이제 포기하십시오. 그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은 너무 힘들지 않습니까? 순종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며 살면 사실 너무 힘듭니다. 그렇게 힘들 때 뒤를 한번 돌아보세요. 그러면 거기에는 사랑 자체이시고, 참된 안식이신 우리 주님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여전히 서계실 것입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여러분, 잔잔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피 묻은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발견하고 주님의 그 사랑을 믿으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나의 멍에도 사랑의 피를 흘리며 나와 함께 메고 가고 계심을 눈으로 목격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까지 흘린 모든 눈물보다 훨씬 더 많은 피 흘려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믿으세요. 그 사랑에 내 몸을 던지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배워서 나에게 주어진 멍에를 가볍게 메고 기뻐하며 찬양하며 걸어가는 복된 인생길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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