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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신대로 (신 1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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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신대로 (신 16:9~12)


  맥추절만 되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보리밥 도시락이 생각납니다. 요즘은 보리밥 먹기가 쌀밥 먹기보다 더 어려운 시절입니다.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보리밥 장려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점심시간에 도시락 검사를 했습니다. 도시락에 보리밥의 비율이 낮으면 매를 맞기도 하고 혼이 난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은 아버지가 쌀농사를 많이 지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제가 몸이 부실하니까 어머님이 쌀밥을 많이 싸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검사를 받으면 혼나기에 일부러 보리밥을 쌀밥 위에 살짝 올려서 마치 보리밥인 것처럼 위장한 때가 있었습니다. 

참 세월 좋아졌습니다. 요즘은 누가 보리밥을 먹습니까? 당뇨병 걸린 분들이나 먹고 혹시 밥맛이 없어 식당에서나 보리밥을 사먹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 친구 목사는 보리밥 집에 절대로 안 들어갑니다. 왜 보리밥은 돈 주고 사먹냐는 것입니다. 보리밥만 생각하면 진저리난답니다. 그래요. 보리밥 먹지 않아도 되는 세상, 참 살기 좋아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 감사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다음 날부터 7주를 계수한 다음날 드린 절기로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드리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칠칠절이라고 도하고 오순절이라고 하는 이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 또는 장막절이라 부르는 추수감사절 3대 절기가 있습니다. 이 맥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였던 일을 생각하면서 거기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며 즐겁게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기에 이 맥추절은 단순히 보리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과거에 죄 가운데 있던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어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가 농사도 안 짓는데 왜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합니까?”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해도 여러분의 직장이 일터요. 거기서 거두는 수입이 다 추수입니다. 그 수입으로 밥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추수를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감사 조건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이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다 헤아리기 어려운데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 헤아릴 수는 없어도 그 은혜가 크고 놀랍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가 맥추 감사절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시속 약 10만 7천Km의 속도로 회전한답니다. 정확히 365일에 한 바퀴 돌고, 또 24시간에 한 바퀴 자전합니다. 일분일초도 늦거나 빠르지도 않게 돕니다. 그런데 그 지구가 돌라가는 소리가 들리나요? 아니면 어지러워 멀미하나요? 

참으로 신기한 것은 태양과 지구가 조금 더 가까이 가면 우리는 타 죽게 되고, 조금 더 멀리 떨어지면 얼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할 일이며 얼마나 오묘하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시편 50장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로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셨고 또 시편 50장 22절에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2008년도 지난 6개월 동안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되새기며 감사함으로 이 맥추절을 지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성도는 어떻게 이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할까요? 

1. 복을 주신대로 힘을 헤아려 감사해야 합니다. 

맥추절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날에 감사의 소제를 드리는데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어 드립니다. 그리고 어린 양으로 번제를 드리고 또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이 같은 제사는 왜 드리는 것일까요?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더욱 화목한 생활을 즐거운 심령으로 한다는 다짐을 드리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이 맥추절 예배를 즐겁게 드리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는 절기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2008년도 지난 6개월을 되돌아보세요. 여러분 중에는 고난을 당한 분도 있고 몸이 아파 고생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배신을 당해 가슴 아파하며 괴로울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죽을 뻔도 하였고 졸땅 망할 뻔도 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평안하십니까? 지금은 고비를 넘겼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은혜와 지금의 형편에 감사하는 성도들은 예배와 기도와 헌신을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차이가 뭡니까? 그 예물은 문제가 없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자이기에 농산물로, 아벨은 목축하는 자이기에 양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거절하시고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제물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제물보다 먼저 보신 것이 드리는 자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 맥추감사를 드리면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고 즐겁게 드려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 자신을 먼저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감사하는 나, 은혜를 기뻐하는 나, 그런 나를 먼저 드리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0절을 다 같이 읽어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감사하라 하지 않습니다. “복을 주신대로” 감사하라 하십니다. 이 말은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실상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에 도착하여 첫 열매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복을 주신대로 헤아려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잠10:22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신 것을 헤아려야 하고 그 힘을 다해 감사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의 힘을 헤아려 진정한 마음이 담긴 예물을 드리면 그 예물에 담긴 우리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예물에는 성도가의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고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는데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어린이주일, 저희 부친께서 제 막둥이 기상이에게 용돈 5000원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돈을 받고 밖으로 나가기에 용돈 까먹으러 나가나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비싼 카네이션 두 개를 사가지고 들어와 하나는 할아버지에게, 하나는 저와 집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얼마인가 알아보니 개당 2000원짜리 두 개, 4000원입니다. 저희 부친도 놀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감격하며 놀랐습니다. 

제 평생 제일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버님에게 못한 생각을 제 아들이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기특하여 나도 불러서 용돈을 주었지요. 완전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믿음과 마음이 담긴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청교도 농부가 하루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어떤 박사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는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 농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박사님이 말하기를 “아직도 그 18세기 인간들의 낡은 유물을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까? 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했습니다. 

당황한 농부는 하는 수 없이 혼자 기도한 다음 식사를 시작하면서 “우리 집에도 당신 같은 식구가 하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박사가 “그것 참 다행이군요. 내 동료가 있어 기쁩니다. 그가 누군가요? 대학에 다니는 자제분인가요?”하고 묻자 농부가 대답합니다. “아니오. 우리 집 저 우리에 사는 돼지새끼들이지요.”라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천지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 존재를 믿지 못하고 그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신 것을 헤아리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489장 가사를 보세요. 한번 불러 봅시다. 

1.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후렴]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2. 세상 근심 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 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3. 세상권세 너의 앞길 막을 때 주만 믿고 낙심하지 말아라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리니 염려없이 앞만 보고 나가라 

할렐루야!  

받은 복을 세어보세요. 정말 크신 복을 여러분이 받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그래도 받은 것이 없다고요? 헤아려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세요. 그래도 없다고요? 

그러면 여러분 주변의 대형 병원을 가보세요. 감사할 것 많습니다. 그리고 공원묘지나 장례식장에 가보세요. 그리고 양로원이나 장애인 시설을 가보세요.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복을 주신대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이 맥추 감사절은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보리 추수를 하나님에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주신 것으로 예물을 드리라 하십니다. 

10절 하반 절을 다시 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중요한 점은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예물의 반대는 억지로 드리는 예물입니다. 그러기에 이 자원하는 예물 속에는 드리는 자의 즐거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움의 예물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많이는 드리지 못하나 내가 하나님께 무엇이라도 드릴 것이 있다는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드리는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하여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즐겁게 받으시고 또 하나님의 가장 좋은 자녀와 일군으로 즐겁게 쓰실 것입니다. 

자원하는 예물이란 성령에 감동된 은혜의 예물입니다. 

스스로 원해서 드릴 때 받는 이도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똑같이 드리는데 어떤 이의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어떤 이의 것은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왜요? 抑止(억지)나 自願(자원)이냐의 차이입니다. 

드리고 싶지 않은데 마지못해 드리면 그것은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받는 분도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고맙고 감사해서 기쁨으로 드리면 받는 분도 기쁘고 감동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원하는 것은 禮物(예물)이고 억지로 드리는 것은 賂物(뇌물)입니다. 

이 뇌물은 타의에 의하거나 마지못해 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과 은혜로 하는 예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부담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헤아려 지기만 하면 전혀 아깝지 않고 더 드려야 함을 알게 됩니다. 

히 11:4를 보시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하십니다. 

더 나은 제사는 예물에 담긴 믿음과 정성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예물을 기뻐 받으십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제 고향 시골집에서는 샘물을 퍼 쓰다가 어느 날 아버님이 마당에 펌프를 설치했습니다. 손으로 작두질을 하여 물을 퍼 올리는 수동식 펌프를 설치 해 놓으니 물이 잘 나왔습니다. 

문제는 이 펌프는 물을 푸기 위해서는 펌프에 먼저 한바가지 물을 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한바가지 물을 붓고 계속 펌프질을 하면 땅 속 깊은 곳에 있던 물이 올라왔습니다. 

이 샘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처음 붓는 이 물 한바가지를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지하수가 많고 좋은 펌프가 있어도 이 ‘마중물’이 없으면 물을 퍼 올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예물도 그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물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자원하여 기쁨으로 다시 하나님께 드리면 그 예물이 마중물이 되어 차고 넘치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마중물을 드리지 않고 거저 받으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드린 맥추헌금이 자원 예물입니까? 
그 예물이 여러분의 신앙 고백으로 자원하여 힘껏 드리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감동이 될 것이나 마지못해 적당히 때우려고 드린 예물이라면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 시간에 절대로 헌금 바구니 안 돌립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왜냐? 혹시라도 자원하지 않고 억지로 마지못해 드리는 것이 한 푼이라도 들어갈까 그렇습니다. 

신앙은 마음의 중심성 문제입니다. 세상에서도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에 코끝이 찡해옵니다. 세상에서의 일도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는 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역은 어떻겠습니까? 

예전에 한경직 목사님이 영락교회를 건축할 때 교인들 대부분이 가난한 피난민들이었습니다. 그래도 한 목사님은 교회를 짓기로 다짐하고 주일날 광고를 했습니다. “다음 주일은 성전건축헌금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열흘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다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설교를 듣고 수많은 성도들이 순종했습니다. 실제로  10일 먹을 양식만 남겨두고 모두 건축헌금을 드렸답니다. 그때는 다 어려웠기에 가진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그 피난민 신세로 겨우겨우 살면서도 하나님의 전을 세우자는 설교에 순종하여 자원하여 동참했더니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때 성도들의 자원 헌금으로 영락교회는 큰 예배당을 짓고 엄청나게 부흥했고 그때 그 건축사역에 동참했던 성도들은 엄청난 축복을 받았고 대부분 한국의 재벌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마음이 감동된 사람들이 먼저 마중물을 드려야 합니다. 


3. 복을 주신대로 함께 즐거워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즐거움과 감사의 예배는 빈부귀천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11절을 보세요. 
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찌니라 

맥추절을 지킬 때에는 주인과 노비, 객과 고아 과부 모두가 함께 즐거워해야 할 날입니다. 중요한 것은 꼭 성전에서 교제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거나 감사하는 장소가 구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혼자는 즐겁지 않습니다.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배는 여럿이 함께 드려야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을 자세히 보면 혼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나옵니다. 예배는 드립니다. 그런데 다른 성도들과 함께하지 못합니다. 

남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나왔다가 축도가 끝나기 무섭게 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교회의 예배는 개회부터 축도까지만이 예배가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는 교제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koinonia(코이노니아)라는 말을 씁니다. 이 코이노니아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령의 역할 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이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 성도와 성도의 교제,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러기에 예배만 참여하고 성도와 교제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나요? 
집에서 혼자서도 예배할 수 있고 성경 볼 수 있는데 굳이 교회를 세우신 것은 함께 모여서 교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 성도가 사람과 사귀는 것이 싫다면 그 사람은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내게 행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사람을 통해 내게 도움을 주십니다. 그런데 교제를 싫어하면 그 관계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온전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다른 말로 ‘식구’라고 합니다. 식구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함께 밥상을 대하고 함께 먹으므로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가정은 식구가 많지 않은 가족임에도 한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교인들과는 매주 한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습니다. 한상에 둘러앉아 한솥밥을 먹는 관계를 ‘식구’라고 정의한다면 교인들도 이미 한 식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웃사촌보다 아니 형제자매보다 더 자주 만나는 한 식구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식구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억하라 하십니다. 
12절을 보세요. 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찌니라 

기억하라는 것은 받은바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눈앞에 잇는 문제를 보지 말고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을 중심한 은혜와 믿음의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안목이 바뀌면 문제가 문제가 아니고 기회입니다. 

골리앗을 맞이한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리앗이 너무나 거대하고 무기가 무섭기 때문에 상대할 수 없다'고 보고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보았을 때 ‘나의 물매가 너무나 잘 맞을 수 있는 거대한 목표물이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갈렙은 ‘가나안 땅의 거대한 아낙자손은 우리들의 밥이다'고 말했지만 다른 정탐꾼들은 ’우리는 비교하니 메뚜기 같더라.' 했습니다. 

같은 사건인데 어떤 이는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 하지만 똑같은 사건 앞에 어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보는 시각이 믿음의 시각이면 매사에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하게 되지만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불평불만하며 원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대로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하나님 전에서 즐거워하며 교제하길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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