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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마 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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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마 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어떤 외국 학자는 한국교회의 성장요인을 금식기도에서 찾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금식기도를 잘합니다. 전국 곳곳에는 금식기도원도 많고, 문제가 생기면 금식기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에는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그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웨슬리 듀엘이라는 분은 그의 책에서 아마 2만 명 정도 추산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40일 금식기도는 매우 힘든 기도인지라 그 과정에서 왕왕 죽기도하고 그 후유증으로 심한 장애를 갖기도 합니다. 가히 목숨을 걸고 하는 기도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가 자랑스러웠는지 가끔 어떤 부흥회 포스터에는 40일 금식 기도했다는 것이 약력으로 올라오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에도 금식했다는 기록이 있고, 초대교회에도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금식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에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2:19-20)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 이후 교회시대에 금식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셨습니다. 문제는 금식을 해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금식이냐?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어떤 것이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의 금식

주님은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금식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금식을 어떻게 했는가?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와는 달리 월요일과 목요일에 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많은 데서 자신들이 금식하는 모습을 보이며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을 땅에 질질 끌면서 길거리를 활보했다고 합니다. 자기 얼굴이 창백함을 보이기 위해 얼굴에 흰 칠을 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이 사람이 대단히 경건한 사람이라면 칭찬을 합니다. 본인도 그런 칭찬을 받으며 만족해합니다. 주님은 이런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내가 물질적인 삶을 포기한 만큼 대신 사람의 인정을 바랐습니다. 주님은 이들은 이미 자기상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금식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닙니다.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행위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이 소중한 의식조차도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금식이라는 행위에는 자기 자랑이 결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금식한다는 것은 곡기를 끊는 결연한 행동입니다. 금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 앞에 회개와 겸비함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이런 금식을 할 때는 옷을 찢거나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뿌렸습니다. 요나로부터 회개의 외침을 들었던 니느웨 백성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성문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겸비함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 통혼하는 일을 저질렀을 때도 온 민족에 금식을 선포하며 죄를 회개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방 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금식을 통하여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금식은 철저히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이지 자기만족이나 자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자꾸 사람 앞에 보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에 주님은 그때에는 일부러라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음으로서 전혀 금식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과 단독자로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성 프란치스꼬도 40일 금식을 했던 분입니다. 이분은 금식을 호수의 가운데 있는 한 무인도에서 했습니다. 들어 갈 때 빵 두 조각을 가지고 갔는데 나올 때 보니 빵 한조각과 나머지 반 조각만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예수님의 40일 금식과 같은 금식을 행함으로써 ‘허영의 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반쪽을 먹었다고 합니다. 겸손함과 은밀함의 금식이었다 할 것입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금식

그러나 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하고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곡기를 끊고 회개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문제 앞에서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결연한 행동이 곧 금식입니다. 주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같은 본래의 의도를 잃어버리고 금식이 하나의 종교 의식이 되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슥7:5) 이스라엘은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오월과 칠월 중에 민족이 패망한 날이라 하여 애통하는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금식은 자기 민족의 이익과 자기 만족을 위한 종교 행사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스가랴 7장 9절과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사랑의 실천이 없는 금식은 그 목적을 잃어버린 자기만족적 종교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보다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사야 58장 5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금식의 목적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 곧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입니다.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이며 압제 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입니다. 주린 자들을 먹이고 벗은 자들을 입혀 주는 것입니다.

40일 금식하는 분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임을 우리는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왜 금식합니까?’ 물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하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40일 금식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전혀 금식하지 않고도 순종하는 사람만 못하다 할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보다 앞서야 할 것은 사랑과 화목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는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이렇게 예배드리는 이유는 여기서 받은 은혜와 능력으로 나머지 일주일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처럼 종교적 행위와 실제 삶 속에서 행하는 사랑과 윤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열심히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헌금 생활하지만 생활에서는 전혀 모범을 보이지 않습니다. 금식은 열심히 하는데 그렇게 금식을 한 후에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완고해집니다. 금식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목적과 야망, 축복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니 그렇게 됩니다.

저는 이런 한국교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요즘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잘 아시다시피 장로입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의 눈으로 보기에는 매우 신실하신 분입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분은 소망교회에서도 새벽부터 주차 봉사를 3년여 동안 했던 분입니다. 기독실업인회에서도 활동하며 직장에서도 예배를 잘 드렸던 분입니다. 대기업의 CEO요 서울 시장에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성공한 분입니다.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축복받은 요즘 한국교회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생활 외에 그의 생활 속 인격과 행동에서도 이런 신앙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이미 이분이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범법 경력 등 그 어떤 대통령 후보들보다 흠결이 많았던 것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 속에서 신앙인적인 냄새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성서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의식을 볼 수 있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소수의 특권층을 옹호하는 정책들을 펼치고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복지정책은 미미합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볼 수 있는가? 아닙니다. 교육이나 공공부분에서 오히려 경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법치나 정의를 행하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힘과 공권력을 동원하여 법과 원칙들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경제 경제만 부르짖으며 대통령이 되었고, 지금도 경제만 부르짖고 있습니다. 물론 경제회복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경제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경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덕과 정의입니다. 도덕과 정의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는 경제를 살리는 결정적 힘입니다.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로 도약하지 못하도록 결정적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도덕의식과 정의감의 상실입니다. 저는 맹자 편의 다음과 같은 글을 참 좋아합니다. 양혜왕이라는 사람이 맹자를 찾아서 물었습니다. “나라의 이익이 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맹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이 나라의 이익만 생각하면 관료들은 자기 집안의 이익만 생각하고, 백성들 또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게 되어 나라 전체가 자기만을 생각하게 되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껏 물질 물질만 강조하니 사회가 이기적이고 무정한 사회가 되어 갑니다. 요즘 유괴나 실종이 많고 폭력적이 된 것은 사회의 이런 물질주의 세태를 보여줍니다. 또 물질만 강조하면 주변에 충신보다는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간신배 같은 존재들만 득세하기 마련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습니다. 위에서 혼탁한 물들이 내려오니 공무원들은 영혼 없는 존재가 되어 윗사람 눈치만 보게 만들었습니다.  

또 이 대통령이 국민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아닙니다. 쇠고기 협상을 할 때도 그러했지만, 어제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고 외쳐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품어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회는 더 극단적으로 진보 보수로 나뉘고 있는데 대통령은 그들 모두를 사랑으로 감싸 않기보다는 한쪽 편만 택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정직성은 어떠한가? 정직성도 아닙니다. 그동안의 거짓은 차치하고 이번에 쇠고기 사태에 깊이 반성한다고 사과하고서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아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폭력으로 짓밟는 거짓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통령은 신뢰를 잃어갑니다. 집권한지 갓 백일을 넘기는 그분에게 주어진 것은 독선과 교만이라는 타이틀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천주교 주최의 시국미사가 있었는데 그 시국미사의 주제가 “국민존엄을 선언하고 교만한 대통령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 시국회의 및 미사” 였습니다. 교만한 대통령! 예수님처럼 겸손한 섬김의 모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장황하게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을 지적하는 이유는 대통령의 모습이 바로 우리 한국교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장로인 대통령의 실패는 곧 한국교회의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명박 대통령은 현재 한국교회의 현재입니다. 그는 성공했습니다. 그는 축복 받았습니다. 그는 장로이면서 신앙생활도 열심입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로 윤리나 도덕, 사랑이 빠져버리고 개인의 만족과 축복을 위한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금식을 외합니까? 순종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이지 자기 축복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금식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런 금식은 결코 사회를 바꿀 수 없습니다.

촛불집회를 보면서 느꼈던 것을 좀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정부가 지난 6월 28일 촛불집회를 폭력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폭력적으로 진압하였습니다. 조선 중앙 동아의 언론에서 이들을 폭도로 몰아갔지만 인터넷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누가 더 폭력적이었는지는 검색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시청 앞 광장도 원천봉쇄하며 촛불 시민들을 진압하려 할 때 천주교에서 시국미사를 개최했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이었습니다. 이 시국미사를 계기로 촛불집회가 비폭력의 기조로 완연히 돌아섰고, 정부도 더 이상 폭력적으로 진압할 수 없는 곤혹스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시국상황을 설명하려는 데 목적이 없습니다. 이런 어려운 때를 바라보는 한국교회와 천주교의 두 시선을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주교에서 주최한 시국미사에 참여했던 한 시민의 눈입니다. 그 글 중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신부님 말씀이, 은은히 들리는 성가 소리가 많이 위로가 됐습니다. 그동안 촛불 정국을 지내면서 많이 외로웠었나 봅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의 카페 회원 분들도 다들 눈물 흘리셨다고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들 지치고 힘들 때 이렇게 사제단이 나와 모두를 위로해주셨습니다. 따뜻한 어머니 품에 안겨 실컷 울면서 위로받은 느낌입니다.”

“‘많이 힘드셨죠?’ 정말로 단순한 인사말일 뿐이지만 거기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치유의 힘이 깃들어 있는 그런 위로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습니다. 저 혼자만이 아니라 주위에 계신 많은 분들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더군요. 비록 아무런 종교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종교가 갖고 있는 순기능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거구나’라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우리와 함께 해주신 신부님 수녀님들께 존경을 담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오래도록 저희 곁에 머물러주세요.” 

천주교는 이 순간 촛불을 든 시민들의 위로자요 친구로 그 곁에 있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한국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물론 지난 목요일에는 개신교 주도의 시국기도회가 있었지만 그 소리는 극히 일부였습니다. 진보적 기독교와 복음주의 일부가 참여했을 뿐입니다. 한국교회의 대형교회 목회자들과 주류들은 처음부터 촛불에 대해서 반대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고 세운 장로 대통령이 잘못할 때 책망할 권리와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단지 대통령에게 이 고난의 때를 기도로 이기라는 위로의 말을 주었을 뿐입니다. 이는 분명한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의 방향을 말하지 않은 비겁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촛불집회를 폭력, 과격, 불법, 친북, 반미, 좌파, 빨갱이, 반기독교라는 타이틀만 붙이기에 바빴습니다. 촛불을 반대하는 맞불집회나 구국기도회의 중심에는 한국교회가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극 보수적 입장을 보인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어느 대형교회의 예배에 참여했다가 그 목사님이 핏대를 올리며 전교조를 비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빨갱이라는 소리와 함께 말입니다. 저는 그때 들었던 생각이 이렇게 큰 교회에는 전교조가 없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있다면 많이 상처받을 텐데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작은 소자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자의 마음일 텐데 전혀 그런 사랑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지금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피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저도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설교에서 피력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다양한 생각과 정치적 견해들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목회자는 그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는 한 공동체가 되었지 정치적 입장이나 신분 때문에 한 교회로 모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현 시국과 관련된 이런 민감한 주제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국민들의 마음에서 멀어졌고 그 결과 성장이 정체되어 가는지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번에 종교현황과 관련된 인구센서스 발표로 한국교회가 충격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1995년과 2005년의 종교 인구를 비교한 결과였습니다. 불교는 1995년보다 40만 정도 증가한 1천 70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천주교는 가장 많이 증가하여 219만 명이 증가한 515만 명이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오히려 14만 명이나 감소한 8백60만 명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인구증가를 감안하면 엄청난 감소입니다. 

이렇게 감소한 데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저는 촛불집회에서 명확히 드러난 한국 교회의 사회의식이나 시국문제를 접근하는 태도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는 가난하고 정의로운 자의 외침에 함께 하는 것 같은데, 한국교회는 보수 더 나아가 극우의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분단이 60년이 지나가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친미니 반미니, 반공이니 반북이니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이념의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압제의 사슬을 푸는 금식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이것은 진리와 정의의 문제라고 강변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세월이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언제까지 이 민족을 이런 미움과 증오, 분열과 대결로 이끌어 가려합니까? 정치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원수도 사랑하는 십자가의 은혜 위에 서 있는 교회에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여전히 구약시대의 투쟁과 심판의 논리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의 아픔을 포용하는 긍휼의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국가 통치권과 질서를 말하며 정부를 옹호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종교가 담당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종교는 다만 사랑하며 섬기며 아픔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갈등하는 한국사회에 교회는 용서와 치유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와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위로자와 화해자의 역할을 포기하면 이에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소위 의식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머물려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이들이 인터넷 상에 광범한 반기독교 세력을 형성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기독교를 버렸습니다.

정치적인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는 금식입니다.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는 금식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이며 사랑의 실천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제가 순종에 대해서 말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식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금식은 해야 합니다. 다만 그 목적을 분명히 하면서 하라는 뜻입니다. 금식의 유익은 많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금식을 자주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너무 자주해서 주변에서 말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금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금식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음식을 많이 먹으면 마음이 하나님께 향해지지 않고 기도도 되지 않는다. 열정적인 기도를 할 수 없다.” 라고 하며 역시 금식을 지지했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우리는 육체의 나태함과 정욕을 끊을 수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우리는 잡다한 생각들을 내려놓고 기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금식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비우고 부정하기까지 하는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기도보다 금식 기도가 가장 막강하고 응답도 빠릅니다. 문제가 생길 때 무엇보다 금식하십시오. 그러나 금식할 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식의 목표가 기도 응답에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금식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고 금식 기도의 목표를 말씀하셨습니다. 금식하는 이유는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을 먹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유는 내 자신을 비워 내 안에 하나님으로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금식이 하나님께 향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미 실패한 것이다. 육체적인 유익, 성공적인 기도응답 등이 초점이 되기보다는 항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금식해야 한다.” 요한 웨슬리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식은 우리의 눈을 주님께만 고정시키도록 해야 한다. 금식의 목적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 다만 그것뿐이어야 한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 된다면 다른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우리가 닥친 문제라는 것, 자녀문제나 진로의 문제나 그 모든 것은 단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에 40일 금식하신 분이 많으면서도 위대한 주님의 종들이 많지 않은 것은 그들의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목표가 되고, 부흥이나 축복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당면한 여러 문제의 해결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축복과 문제해결의 수단으로만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인격이 변화되거나 신앙이 깊어지질 않습니다. 오히려 능력을 받아서 더 완고해지거나 탐욕적이 될 때가 많습니다. 

금식은 범사에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을 보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각오로 나가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줄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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