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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대한 장벽 앞에서 (수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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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장벽 앞에서
수 6:1-7

• Move1: 거대한 압력 앞에서
어느 날 갑자기 가족들과 함께 비밀경찰에 사로잡혀 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수용소에 갇혔기에 가족들의 안부도 모른 채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비엔나의 장래가 촉망받는 의사라는 것도, 아름다운 아내와 가족들이 있었다는 것도, 음악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의 인격도, 그의 가진 재산과 학식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엄청난 죽음의 압력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제 3학파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 그가 서있었던 그 삶의 자리는 불과 몇 년 안에 600만명이 죽어갔던 아하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사방으로 그를 압박해오는 생의 압력은 견딜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선(死線)에 서있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반드시 살아나가서 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그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한가지였습니다. “살아있어야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 그는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그의 가족들은 벌써 수용소에 죽임을 당한지 오래였습니다. 그 혹독한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 그는 인간으로서는 견디어 낼 수 없는 생의 압력을 받았지만 그러한 경험을 통해 심리치료의 제 3의 방법으로 알려진 의미요법, Logotheraphy를 창시해냈습니다. 언제 가스실로 불려갈지 모르는 불안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 수년을 살아야 했지만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그는 세계적인 학자로 발돋움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간 삶에서 고통은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그 고통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위협, 죽음의 공포,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힘들게 합니다. 만약 다시 그 자리에 서라고 한다면 결코 그리할 수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고통을 아름답게 미화하니까 그렇지 고통을 힘이 듭니다. 답답합니다.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간에 고통의 문제는 계속됩니다. 

 • Move2: 광야를 지나온 이스라엘 앞에 놓인 장벽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압력 가운데 서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일이면 이를 수 있는 길을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 지나왔습니다. 힘들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긴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긴 여정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문턱에 이른 것입니다. 말이 40년이지 얼마나 긴 시간입니까?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마치 통일의 그날을 기다리며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다가 그렇게 죽어간 이 땅의 수많은 이산가족들처럼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그렇게 사막길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길고 힘든 길을 달려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그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난관들이 계속하여 앞을 가로막습니다. 이제 고생도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가장 먼저 발목을 잡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세의 죽음이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가 사라진 것입니다. 400년 넘게 사로잡혀 있던 민족을 대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모세가 없이 어떻게 그 수많은 난관들을 헤쳐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가나안이 저 멀리 눈에 들어올 때 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모세가 없이 어떻게 한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장벽이었습니다. 그것이 여호수아 1장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젊은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워졌고, 그의 리더십을 따라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나아가는 길목에 또 다시 부딪혀온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요단강이었습니다. 우기에 범람하는 요단강을 건널 방도가 없었습니다.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 앞에서 한숨 밖에 터져 나올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3장, 4장의 기록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가나안 정복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원주민들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은 치러야 할 전쟁입니다. 그런데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 전해오는 하나님의 명령은 참으로 황당한 명령이었습니다. 도무지 수긍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전쟁을 해야 할 전쟁터에서, 싸워야 할 전사들에게 일주일 이상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누워있으라니 이것이 가당키나 한 명령입니까? 또 다시 열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 가득 안고, 그리고 고통을 느끼면서 그들은 일주일 이상 꼼짝 못하고 누워있었습니다. 이러다가 공격을 당하면 그대로 망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야 할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삶을 힘들게 합니까? 커다란 생의 압력이었습니다. 그것이 5장의 기록입니다. 
그렇게 고통의 시간들은 다 자나가고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은 또다시 거대한 장벽 앞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나아왔으면, 순종하며 그만한 모든 관문을 통과했다면 그들 앞에 순탄한 길로, 탄탄대로가 열려야 하는데,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여리고라는 거대한 성벽이었습니다. 도무지 그들의 힘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넘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는데 그 심각성이 더해집니다.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6장의 기록입니다. 어떤 문제이든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것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한 순간 우리 삶에는 굉장한 압력을 받게 됩니다. 

• Move3: 위기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
1절 말씀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모든 문이 닫혔습니다. 모든 가능성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대화와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만히 있습니다.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5:13-15)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여호수아가 물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입니다. 순종의 자세입니다. 모든 사건 앞에서, 모든 삶의 순간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들으려는 자세입니다. 순탄한 길을 갈 때도, 어려운 장벽 앞에서 견딜 수 없는 압력을 받을 때에도 여호수아의 자세는 그것입니다. “하나님,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요구는 그것이었습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서, 하나님의 행하심 앞에서 전적으로 항복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거대한 장벽 앞에서 여호수아가 취했던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국가적인 비상사태에서 마땅히 각료들 회의를 주재해야 할 것입니다. 각군의 지휘관들을 모아 전략회의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가만히 있습니다. 대책을 논의해야 했던 때에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명령은 너무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2개 대대는 좌로, 2개 대대는 우로, 3개 대대는 정면으로, 그리고 야간에 공수특전단은 고공 침투로, 그리고 해병대는 땅굴을 파서 침투작전을 펼쳐라. 잘하면 내가 도와줄 것이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타당한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에 나선 사람들에게 전쟁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황당한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저 성을 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6일 동안은 하루에 한번만, 그리고 7일째 되는 날에는 7바퀴를 돌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전쟁을 하는 군인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황당한 전략입니까? 아니, 이것은 전략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필이면 하루도 아니고 이레 동안입니까? 하필이면 모든 것을 노출하고 전쟁터에서 마냥 걸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수많은 방법이 있는데, 하필이면 전쟁터에서 모든 전력을 다 노출하면서 성을 돌아야 하는 것입니까? 젊은 지도자가 지금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도 버거운 일인데 이렇게 황당한 명령을 주셔서 사람을 골탕 먹일 수 있는 것입니까? 거기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쿠데타나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지도자 여호수아도 함께 거대한 장벽 앞에 서 있습니다. 모두가 열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거대한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다. 여기에서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단어가 있습니다. “그때에...” 거대한 장벽 앞에서 서있는 바로 그때에, 잔뜩 압력을 느끼고 있는 바로 그때에, 너무 힘들어 방황하고 있는 바로 그때에,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바로 그때에, 사람이 원망스럽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수아에게만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늘도 생의 거대한 장벽을 느끼며 서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함 가운데 서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리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여리고를 네 손에 넘겨주었다.” 영어 성경을 보면 그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야 보아라. 내가 네 손안에다가 여리고를 이미 옮겨 놓았다.”(See, I have delivered Jericho into your hands). 현재 완료형입니다. ‘거대한 성의 왕도, 잘 훈련된 병사들도, 최첨단의 무기로 무장한 군대들도 내가 다 네 손안에 올려놓았다.’ 쉬운 말로 하면 이 여리고 성은 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긴 싸움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주시는 명령은 여전히 황당합니다. “네 군대를 이끌고 하루에 한번씩 여리고를 돌아라. 이것을 엿새 동안 계속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계속해서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견딜 수 없는 문제들을 줄줄이 세워놓으시고 비틀거리면서 가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기도 하시는 듯 보입니다. 기독교 작가 고 정채봉 님은 그의 책,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에서 삶에 고통이 따르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합니다.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 얼음에 냉장을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썩는 길밖에 없다.” 그렇습니다. 인간 삶의 고통의 문제를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분명한 의미와 뜻이 있습니다. 
씨앗은 심고 흙으로 눌러 주어야 싹이 돋습니다. 솥뚜껑을 덮고서 불을 때야 쌀이 밥이 됩니다. 떡도 시루를 단단히 눌러주고 곳곳을 막고서 압력에 압력을 받아야 쌀가루가 떡이 됩니다. 씨앗을 심고 숨이 꽉 막힐 만큼 꼭꼭 눌러 주어야 딱딱한 씨앗이 새 생명의 새싹이 됩니다. 쌀이 푹 익은 밥이 되고, 가루가 떡이 되는 데는 압력이 필수입니다. 압력을 받지 않고서는 싹이 나올 수 없고, 밥이 될 수 없고, 떡이 될 수가 없습니다. 충분한 압력을 받지 못한 새싹은 비바람을 견딜 수 없고, 제대로 압력을 받지 않은 쌀과 가루는 선 밥, 선떡이 되고 맙니다. 압력은 다른 말로 하면 열입니다. 열을 받아야 무엇이 됩니다. 고온 고압, 압력과 열을 받지 않고 변화되는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문턱에서, 축복의 자리로 들이기 전에,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 앞에 세우십니다. 거대한 압력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900℃에서 흙을 구우면 토기가 됩니다. 1,100℃에서 구워 나오면 도기(陶器)가 됩니다. 그러나 1,300℃의 고온고압을 견뎌 나오면 자기(瓷器)가 됩니다. 자기는 소리가 맑고 빛깔이 곱습니다. 품위가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금강석, 다이아몬드는 나무가 변해서 된 것입니다. 나무나 석탄이나 금강석의 구성원소는 같은 “탄소”입니다. 그 탄소의 구성 배열과 밀도에 따라 나무가 되고, 석탄이 되고, 금강석이 됩니다. 나무가 흙 속에 들어가 고온 고압을 견디면 어느 날 석탄이 됩니다. 또 이 석탄이 엄청난 압력과 온도 속에서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변화된 것이 다이아몬드, 금강석입니다. 스스로 영롱한 빛을 발한다는 다이아몬드는 그냥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와 석탄이 변해서 됩니다. 나무와 석탄이 변해서 다이아몬드가 되게 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압력과 온도와 시간입니다. 견딜 수 없는 압력과 높은 온도를 견디고, 충분한 시간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주시기도 하시고, 우리 삶에 강한 압력을 가하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이겨가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거대한 장벽 앞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견딜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정결한 백성들로 빗고 계심을 믿으면서 믿음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 Move4: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살아라
우리는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다는 결과를 먼저 보고 있지만 지금 성을 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군사를 배치하고 공격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전이 아니라 작전 포기요, 항복 행동이나 다름이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은 정말 하찮은 방법으로 보였습니다.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일수록,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일수록, 사리판단에 빠른 사람일수록 매일 성을 돈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막막한 일이었을까요? “성 주위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칠 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3,4절). 무조건 성을 돌라, 침묵하며 하루에 한번씩 성을 돌라는 말씀은 얼마나 무모한 명령입니까? 얼마나 황당한 명령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살라! 아무리 좋아보여도, 아무리 굉장해 보여도 세상의 방법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라! 그것은 처음부터 믿음을 요구하는 행진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리석게 보여도, 그것이 한심하게 보여도, 그것이 내 생각과 달라도 나보다 지혜로운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내가 하나님을 믿고 그대로 행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그 고백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양식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거대한 장벽 앞에서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삶의 순간을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말씀대로 살 수 있는지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바보스럽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무런 거부나, 논쟁이나, 타협도 없습니다. ‘하나님, 그것은 우리가 죽는 길입니다. 하나님도 좀 정상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통치해 주십시오. 하나님 하필이면 7일입니까? 꼭 이레를 돌아야 됩니까? 말씀 한마디로도 가능하신 분이신데 왜 그렇게 긴 시간 고통과 불안을 당하게 하셔야 합니까? 하루만 합시다. 여호수아, 당신이 하나님께 명령을 받았으니 다시 나아가서 전략상 도저히 안 되겠으니 좀 횟수를 줄여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제사장들, 당신들은 지금 뭐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서 부탁 좀 드려보세요.’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침묵할 것을 요청합니다(10절).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려,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들은 마치 순종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처럼 묵묵히 순종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내 삶을 완성하는 끊임없는 믿음의 행진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 거대한 장벽 앞에 그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가 아니라 이레 동안, 한꺼번이 아니라 하루에 한번씩, 돌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순종합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바로 제사장들이 일어나 양각 나팔을 잡습니다. 바로 백성들이 일어납니다. 바로 무장한 군인들이 법궤를 호위하기 위해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들의 모습을 그렇게 그려줍니다.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다.”(30절). 믿음으로 행합니다.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걸어갔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있고, 하나님의 산수가 있습니다. 1+1은 2가 되고, 10-1은 9가 된다는 것은 사람의 산수입니다. 그러나 10-1은 10이 되기도 하고, 100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산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산수를 따라, 자기 방법대로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여리고성을 돌라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았더니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납니다. 완벽한 승리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기적이 아니라 일상입니다.
어느 날인가 용감한 개미 소대를 본적이 있습니다. 월동준비를 하는지 개미들의 발걸음은 무척 바빴습니다. 그들의 몸집보다 수십배는 큰 빵 조각을 끌고 그들의 우리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낑낑대면서 온 소대가 동원되어 진땀을 빼고 있었습니다. 언덕배기로 끌어올리다가 다시 굴러 떨어지면 다시 내려가서 그것을 끌고 올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저의 능력의 팔을 뻗어 그것을 그들의 집 앞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때 개미 한 마리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다!” 개미에게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손가락 두개로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거뜬히 행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린 것은 엄청난 기적이었으나 하나님께는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이 있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 Move5: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가장 커다란 위기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 그 사실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시기에, 바로 그곳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조상들이 경험했던 그 하나님, 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일 속에서 업무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하면서 날마다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려운 난관을 통과하면서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부모님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목사님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장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견딜 수 없는 생의 압박을 경험하며 서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불평입니다. 불평을 배우는 데는 소질이 전혀 없어도 가능하고, 불평을 배우는 데는 지식도 필요 없고, 인격, 기질, 재능, 지식, 나이, 환경 다 필요 없습니다. 돈도 안 듭니다. 그러나 배우기 쉬운 불평이라고 그냥 토해 놓지 마십시오. 불평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불평한다고 마음이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불평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불평하면 할수록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거대한 장벽 앞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안타까워하시면 우리를 위해 성령님께서 중보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자로 서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경을 바라보는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삶의 여건에 의해서 좌우는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혹 거대한 장벽을 느끼면서 서있을 수도 있고, 요즘같이 어려운 때 거대한 삶의 압력을 받으며 서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지금 연단시키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나를 영롱한 믿음의 빛깔을 지닌 다이아몬드로 바꾸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우리들을 품위 있고 아름다운 자기 그릇을 만들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거대한 장벽처럼, 인생의 어려운 순간으로 느껴질 때라 할지라도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훈련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새벽녘 경부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이 남편이 운전해 가던 승용차를 들이받은 것입니다. 눈물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남편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했으나 그녀는 남편의 죽음조차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례식 내내 넋을 잃은 사람처럼 남편의 말 한마디만 생각이 났습니다. “올 여름휴가 때 태어날 우리 첫아이를 안고 고향의 바닷가로 피서가자,” 그때 그녀는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원망만 터져 나왔습니다. 가난했지만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세상을 살려고 노력하던 남편이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다니던 교회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몇 개월 후 고통 가운데 해산을 했습니다. 남편이 바라던 대로 아들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은 그녀가 제일 먼저 했던 것은 아들을 안고 남편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동해(東海)가 보이는 산자락에 남편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포대기를 열어 남편이 잠든 무덤을 아기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파도 소리는 끝없이 들려옵니다. 무덤 앞에 아이를 내려놓고 주저앉았습니다. 남편을 일찍 데려간 하나님이 다시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들을 얻은 기쁨보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더욱 컸습니다. 
“오늘이 주일인데 왜 교회에 가지 않느냐?” 산을 내려오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불렀습니다. 정이 넘치는, 햇살같이 따스한 음성이었습니다. “교회 가기 싫어서요, 아버님.” “왜?” “그이를 일찍 데려간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요.” “이렇게 어여쁜 아들을 주셨는데도?” “네, 그래도 원망스러워요.” 그녀가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이 글썽해지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마당 앞 꽃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꽃밭에는 장미와 다알리아, 채송화와 도라지꽃 등이 활짝 피어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꺾고 싶은 꽃을 하나 꺾어 보거라.” 시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었습니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것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나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단다. 얘야, 너무 슬퍼하지 말자.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이 뜻하신 게 있어서 그리하셨을 게다.”
정호승님의 책 가운데 나오는 가슴이 저리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 못지않게 아들을 잃은 슬픔도 컸을 텐데 잠잠하게 믿음으로 이겨나가고 있는 어느 시아버지의 아름다운 신앙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정말 보기가 좋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도 믿음으로 걸어갈 수 없는 것일까요? 답답함 가운데서도 우리는 믿음으로 걸어갈 수 없는 것인가요?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걸어갈 수는 없는가요? 어렵고 힘들기만 한 광야길인데 마음속에 절망을 가지고 걸어간다면 얼마나 힘이 들까요? 스코틀랜드의 한 목사가 갑자기 사랑하는 아내를 병으로 잃었습니다. 아내의 죽음 직후에 주일예배에서 그의 아픔과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가 없이 산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이렇게 고통으로 얼룩진 이 땅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게 느껴진다고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을 잃고 믿음까지 버리는 이유를 더더욱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믿음을 버리는 겁니까? 밝은 태양 아래 있는 사람들은 믿음을 선택적으로 가질 수 있지만 저와 같이 슬픔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믿음마저 없다면 정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산악인이었던 에밀 자벨은 비록 산에서 요절했지만 산행(山行)에 대한 위대한 교훈을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산을 좋아하여 산을 올랐지만 그가 산에서 찾은 것은 정상의 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산행의 순간순간을 즐겼습니다. 그 순간순간이 모여 하나의 산행이 되었고 그것이 그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산행은 출발할 때와 똑같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오는 것이었고, 그의 인생도 그랬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순간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저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 생명의 저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몇 세기 뒤의 세계가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지 그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가득한 햇살 아래 알프스가 살아있듯이 나도 또한 살아 있다. 산상의 한줄기 햇빛 속에는 철학이 말하는 모든 진실보다 더 값진 것이 있다. 그러나 정상에서의 광경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고, 또 그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들 마음속에는 그곳을 떠나 어딘가 또 다른 곳으로 향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고 주변에 눈을 돌리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산행은 출발할 때와 똑같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올 뿐이다.”
거대한 장벽 앞에 서 있으나 오늘은 성을 도는 날입니다. 혹 아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주어졌으나, 벌써 그 말씀에 의지하여 6일 동안 계속 믿음으로 걸어왔으나 돌 한 덩이도 허물어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산행은 아무런 소득 없이 내려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날마다 그분과 동행하는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그저 오늘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장벽이 무너지고,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도 계속해서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설교 부탁을 받고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제 입술에 이 찬양을 담아주셨습니다. 거의 2주가 넘도록 이 찬양에 젖어들게 하셨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혹 거대한 장벽 앞에 서있더라도 이것을 함께 고백하십시다. 
나와 함께 하시는 가장 소중한 주님,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주님
모든 것이 떠났고, 모든 걸 잃었지만 언제나 함께 하신 주
갈길 잃어 방황할 때도 고통으로 눈물 흘릴 때도 
걱정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네 형편을 알고 있느니라.
나 밖에는 너를 위로할 자 없고 나 밖에는 해결할 자 없나니
믿고 기도하라. 믿고 행하여라. 말씀하시는 소중한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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