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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가? (약 1: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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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가? (약 1:26~27)


약 1:26, 27에서는 경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에 보면 본문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을 신앙생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신앙생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헛된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들과 똑같이 종교적인 행위를 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처럼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인정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굉장히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고, 자신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인 것으로 착각했지만 오히려 주님은 그들의 외식을 책망했습니다. 마 7장에 보면 심판대 앞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도 행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가인과 함께 제사를 드렸던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로 세상을 멸하시기 전에 노아의 신앙생활을 인정해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단 앞에서 욥의 신앙생활을 인정해주셨습니다. 히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생활을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본문 앞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불행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생활을 살펴보면서 자신을 점검합시다.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가?”라고 스스로 자문하시며 이 설교를 들읍시다. 


1. 언어를 통제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혀를 재갈 물리지 않으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마치 말에게 고삐를 하고 기수가 고삐를 통해서 말을 조정하는 것과 같이 언어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언어를 통제한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어를 잘 통제해야 할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말대로 반응해주시기 때문에 말을 잘해야 합니다. 
민 14:28에서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하고자하는 일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가 말한 대로 하시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승리를 말하면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가 패배를 말하면 패배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풍성함을 말하면 풍성하게 하시고 우리가 궁핍함을 말하면 궁핍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말을 하면 긍정적인 역사를 일으켜 주시고 우리가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부정적인 역사를 일으켜주십니다. 

둘째, 인간관계도 말로서 좌우되기 때문에 말을 잘해야 합니다. 
사사기 9장에 보면 기드온이 죽은 후에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백성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가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에게 말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그가 권세를 잡을 수 있도록 은 칠십 개를 공급하며 밀어줍니다. 아비멜렉은 말로서 사람들과 재물과 권세를 얻게 된 것입니다. 삿 9:7 이하에 보면 아비멜렉의 동생 중에 요담이 나오는데 그는 말로서 형과 원수가 됩니다. 요담은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형과 백성들이 듣도록 형이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합니다. 형은 감람나무도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도 아니고 가시나무인데 가시나무 주제인 형이 왕이 될 수 없다고 소리를 치고 도망을 갔습니다. 요담은 말로서 형과 원수가 되고 도망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육체와 환경과 미래가 말에 의해서 달라지기 때문에 말을 잘해야 합니다. 
잠 13:2에 보면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라고 말합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이 말씀을 “선한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지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달변이라는 뜻이 아니라 좋은 말, 선한 말,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하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건강하려면 말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도 말대로 됩니다. 우리의 미래도 말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말씀의 능력이 있어서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말씀하신대로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한 대로 되는 것입니다. 잠 18:21에 보면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혀를 쓰면 쓴 대로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육체, 풍요로운 환경,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려면 말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언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도도 찬송도 설교도 그리고 전도도 선교도 언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묵상까지도 내면의 언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언어를 잘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2.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자기 마음을 속이는 사람의 신앙생활이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속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약 1:22에 보면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말씀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알지만 그 진리대로 순종하지 않는 것과 성령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성령의 요구에 불순종하는 것과 자신의 양심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만 그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들은 말씀이나 성령의 음성 그리고 양심을 통해서 들리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순종해서 자신을 속이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말을 해야 행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믿음의 말을 하면 믿음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롬 10:8, 10에 보면 사도들이 전한 말씀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말씀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신 30:14에서는 믿음의 말씀을 가진 자에게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면 고백한 말씀대로 살아지는 능력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고백하세요. 그러면 고백한 말씀이 나에게 실제가 되기 때문에 자신을 속이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말씀을 행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컴퓨터가가 있어도 컴퓨터를 돌릴 수 있는 동력이 있어야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돌릴 수 있는 동력은 전기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자기를 위한 사건임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스스로 말씀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무능력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겔 36:26, 27에 보면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몇 가지 일을 말씀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말씀에 보면 성령님은 거듭난 신자에게 새 마음을 주십니다. 굳은 마음을 져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자기를 속이지 않게 되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으로 충만할 때 행할 수 있습니다. 
시 119:11에 보면 시인은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에게 범죄 하지 않기 위해서 그가 한 일은 주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둔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고백하면서 자기의 마음에 말씀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죄를 떠나게 되었고 자기를 속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이 가득한 사람은 범사를 왜곡된 혁명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도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집회 현장에서는 “한총련, 김정일 동지 만세”라는 문구도 나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명박 대통령이 잘 못한 일도 있지만 김정일 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김정일이 누구입니까? 대를 이어 북한 동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독재자 아닙니까? 핵무기를 가지고 전 세계를 협박하다가 돈을 뜯어내는 강도와 같은 자 아닙니까?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물러가라”고 하면서 “김정일 만세”가 웬 말입니까? 사상에 물든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잘못된 사상은 눈을 멀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사상이 되게 하십시오. 말씀이 내 속에 채워지면 그 말씀이 나를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마치 장갑 속에 사람의 손이 들어가면 장갑이 손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지는 것처럼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 말씀의 능력으로 내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행하므로 자신을 속이지 않게 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형제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라고 말씀합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는 과부들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구약성경과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만 해도 과부와 고아는 구제의 대상 중에 1순위였습니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는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자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인 이유 몇 가지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주님이 어려움 당하는 형제자매와 자신을 동일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최후의 심판대에서 사람들이 두 종류로 나뉘게 됩니다. 오른쪽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아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자매의 아픔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이 힘들 때 자신을 돌봐줬다고 말씀하십니다. 왼쪽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자매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이 힘들 때에 주님을 돌봐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제 몸을 돌아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믿는 사람들은 몸 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저와 여러분은 한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입니다. 내 몸의 지체 중에 하나가 문제가 발생하면 다른 지체들이 모른 척 하지 않고 돌보는 이유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자매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은 자기의 몸을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교회가 어려운 교회들을 돌아보고 선교지를 돌아보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축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렵고 힘든 형제자매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그들은 우리와 한 몸 안에 붙어 있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입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픔을 당하는 형제자매를 돌아보는 것은 그들이 주님이고 그들이 우리의 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당연한 일을 하는데도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사 58:7에 보면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라고 말씀합니다. 형제의 아픔을 돌아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9절부터 그 결과를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새벽 빛 같은 영광을 주고, 치유의 은혜를 베풀고,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함께 하고 기도에 응답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구제와 선교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4. 자기를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신앙생활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속에 물들었다는 말은 세상과 하나님의 것이 혼합되었다는 뜻입니다. 싱싱한 고기와 썩은 고기가 섞여있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둘 다 먹을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경건과 세속이 섞이면 하나님 앞에서 둘 다 가증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오해해서 이분법적인 생활을 한다면 문제입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장로님도 경건을 오해하신 분입니다. 이분은 일 년 365일 동안 하루도 새벽기도회를 빠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는 인사도 하지 않고, 인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인사를 안 하는 이유가 퍽 재미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거룩한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기 전에 어떻게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 어느 해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인하여 교회 인근의 상가가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교회에 양수기를 좀 빌려달라고 했을 때, 이 장로님은 거절했습니다. 거절하는 이유는 ‘하나님 집에서 사용하는 거룩한 기물을 어떻게 교회 밖에서 사용하도록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신앙생활 큰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마치 바닷고기가 바닷물 속에 살지만 그 살이 짜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날 수 는 없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세속에 물들지 않겠습니까?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경건함을 유지했던 다니엘을 통해서 몇 가지 비결을 배워보도록 합시다.

첫째, 기도해야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경건의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인간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생활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다니엘은 정시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에는 반드시 기도했습니다. 둘째, 다니엘은 위기를 기도로 극복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의 꿈을 알아내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할 때 그는 기도로 그 꿈을 알아냈고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셋째, 다니엘은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넷째, 다니엘은 기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면서도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했습니다. 다섯째, 다니엘은 작정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21일을 작정하고 기도하다가 천사를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여섯째, 다니엘은 기도하다가 계시가 열리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주셨고 장차 되어 질 일 즉 말세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기도합시다.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그 힘을 공급 받습니다.

둘째, 믿음의 동역자들과 교제할 때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혼자 믿음을 지켰던 것이 아닙니다. 그에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믿음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풀무불 속에 들어가면서도 믿음을 지켰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그들과 믿음의 교제를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우상의 제물로 올라갔다가 내려온 왕의 진미를 거절할 때도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했고, 왕의 꿈을 풀 때도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했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들을 사귀십시오. 거역하고 교만한 자들을 피하고 믿음의 사람들과 만나십시오. 그래야 세속에 물들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세상일도 경건하게 할 때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과 메대 파사에서 총리의 일을 했습니다. 그는 느부갓네살 왕 때로부터 다리오 왕 때까지 총리로서 쓰임 받았습니다. 그가 국가의 일을 할 때도 그의 경건함이 나타났으며 왕과 왕비에게 그리고 그의 정적들에게 까지 신앙이 인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불신자인 왕이 다니엘을 가리켜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했고 또 다니엘에게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만큼 경건하게 세상일도 경건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직장생활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주부로서 가정 일을 하든지, 학생으로서 공부를 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기도하며 일하고, 성령을 따라서 일하십시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말씀 앞에서 나를 점검해봅시다.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가 점검합시다. 언어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자기를 속이지 않으며 신앙생활합니까? 형제의 아픔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자기를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고 있습니까?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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