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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 7: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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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 7:21~25)


지혜로운 재판관 앞에 죄를 지은 두 여인이 섰습니다. 재판관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의 죄가 무엇이냐?” 물음에 대한 두 여인의 대답은 극히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여인은 울먹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젊어서 남편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 결과 남편을 일찍 죽게 만든 아주 몹쓸 년이랍니다.” 다른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판관을 바라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재판관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가져올 수 있을 만큼 큰 돌이나 작은 돌을 가지고 오너라.” 자신의 죄가 크다고 생각한 여인은 힘에 부칠 정도로 큰 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죄의 댓가를 조금이라도 더 치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여인은 대충 작은 돌 몇 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재판관이 다시 말했습니다. “그 돌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도로 갖다 놓고 오너라.” 그러자 큰 돌을 가져온 여인은 쉽게 갖다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제 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대충 갖다 버리고 왔습니다. 재판관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짓는 죄도 이와 같다. 큰 죄는 바로 회개할 수 있지만 작은 죄들은 쉽게 회개할 수 없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보면 웬일인지 사도 바울이 탄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가 아직까지 구원을 받지 못해서 탄식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실 자체를 그가 의심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의 탄식은 구원받은 자의 탄식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탄식하고 있었습니까? 그 까닭은 구원받은 그가 자신의 실상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도대체 무엇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로마서 7장 15절 말씀을 보면 그가 솔직히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는 스스로 자신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물론 여기서 그가 모른다고 한 것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행위를 스스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심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괴롭다고 했던 것입니다.

죄는 마치 마약 중독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마약에 중독되는 것이 좋아서 중독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잠시 맛보는 쾌감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깊이 빠져들어 마침내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지 않습니까? 죄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죄의 종 노릇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한번 죄를 짓게 되면 그 후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죄에 끌려가게 마련입니다. 결국 죄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자신을 죄의 법으로 사로잡는 것을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극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부부 싸움을 하면서 속으로는 ‘이 싸움을 빨리 끝내야 할 텐데...’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게 생각대로 잘 됩니까? 알면서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함부로 뱉어서 상대에게 심한 상처를 줄 때도 있습니다. 집안 내력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둥, 배운 것이 없고 무식해서 할 수 없다는 둥, 심한 모욕감을 주는 말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툭하면 그런 말을 내뱉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의 속성이 바로 그렇습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죄를 짓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바리새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가슴을 치며 호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 바디매오를 고쳐 주신 기록이 있습니다. 여리고에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있었습니다. 그는 구걸하기 위해서 길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그가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그가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8) 자기의 눈을 뜨게 해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도 바울도 지금 탄식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가 왜 곤란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이라고 부르짖었습니까? 그가 흉악한 죄를 지어서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까? 그는 율법이 선한 목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율법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는 탄식하며 부르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율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복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율법은 신령한 것이고 또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율법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율법의 요구 조건을 자기 스스로 충족시켜 보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율법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해야 할 율법이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문제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탄식하며 부르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탄식할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가 정말로 몰라서 그렇게 질문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묻고 또 대답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누가 우리를 건져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무덤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믿는 믿음이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받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사랑할 줄은 모릅니다. 주님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분쟁과 다툼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김의 본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섬기는 것보다 섬김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사도 바울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비로소 곤고한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더 이상 자기를 주장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김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을 지금 여기서부터 누리는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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