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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경주일] 자연의 청지기직을 감당하는 사람들 (창 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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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청지기직을 감당하는 사람들 (창 1:26~31)


자연계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법칙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지으시고 거기에 자연의 법칙을 세우실 뿐 아니라 지금도 자연을 섭리하시며 지탱하고 계십니다. 화가가 그림 안에서 발견되지 않듯,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이 화가의 흔적을 나타내듯 세상 속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흔적이 숨어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주민들은 더러운 흙탕물에서 지저분하게 놀고 있는 하마들을 무용의 동물이라고 천시하고 소탕전을 벌려 결국 수백 마리의 하마들이 일시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위에서 흘러내려오던 개흙이 흐르지 않고 쌓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불도저처럼 개울 바닥의 흙들을 밀어내던 하마들이 사라지자 진흙이 개울에 쌓여 수로가 막혀 인접 농토가 침수되는 재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물뱀들이 들끓었고 물뱀들이 들끓자 혈관 속에 기생하는 주혈 흡충병이 만연하여 국민 건강을 크게 위협한 때가 있었습니다. 하마가 인간 생활에 매우 유용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많은 피해를 본 후였습니다.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대자연은 모두 그 관계가 쇠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의 단절은 큰 재해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법칙을 존중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아름답게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자연을 아름답게 지키는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할 때에 자연 속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영적 자아와 생태적 자아

저는 지금까지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을 전하면서 하반 절 말씀만을 강조해 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 이 말씀의 하반 절은 우리 사람들은 지음을 받는 날부터 영적인 자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에 그 코로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네샤마, 즉 호흡을 불어넣음으로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언제나 영적인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사랑하며 이 땅에 정의 실현을 위해 힘쓰며 하나님의 평화로 이 세상에 넘치게 할 때에만 행복합니다. 영적인 존재는 자기의 일을 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영적인 갈증을 느낍니다. 영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자기도 함께 하고 있다고 확신할 때에만 감격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온전히 행복한 삶을 사신 분이시오 하나님의 생명으로 넘치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일만을 행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다음에 그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게 하였다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왜 예수님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여 괜히 핍박을 받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 19절을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였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하시기를 원하는 그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진정으로 행복한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행복을 나누어 주는 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는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에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행함으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저는 이처럼 창세기 2장 7절의 하반 절, 곧 우리 인간은 영적인 자아를 가진 존재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상반 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본래 흙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연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워드 클라인벨 목사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의 성질을 ‘야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은 야성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야성적인 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야생성을 가진 존재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친화할 때에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연을 무시하고 자연을 오염시키고 자연을 파괴하면 불행과 저주가 온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무시하면 재앙이 옵니다.

북한이 계속적인 가난에 시달리며 식량난을 꺾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자연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농지를 확장하기 위하여 산이든지 못 쓰는 곳이든지 개간만하면 몇 년 동안 사용할 수 있다는 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차별 산을 개간하고 민둥산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하수가 60m 아래로 내려가서 곡식이 안 되는 땅으로 변하고 홍수 때문에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숨 쉬고 있습니다. 이 법을 깨뜨리면 결국 그 보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도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경제논리에 이끌리어 개간하고 하천을 파괴하여 홍수의 피해를 더 받고 있다고 합니다. 황하 발원지에 있는 수많은 호수는 비가 오면 물을 저장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것을 메꾸어 개발하였습니다. 황하가 흐르는 강변에 있는 수많은 모래벌판을 개간하여 산업단지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황하에 물이 찰 때에 물을 머무르게 하는 역할 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정호는 저수지 역할을 했는데 이것도 많은 부분 개발하여 땅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홍수가 나면 물을 저장하거나 머무르게 할 곳이 없어서 물 재앙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자연을 무시하면 결국 엄청난 재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은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흔적은 곳곳에 있으며 하나님의 법칙이 모든 것들을 떠받들어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아름답게 지키고 다스리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지키기 위한 것이요, 또한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26절에서 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시리라 하시니라.” 31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계시해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세상 속에는 하나님의 신비가 숨 쉬고 있으며 하나님의 법칙이 세상을 떠받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조세계를 보면서 존중과 감사와 찬양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청지기 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때에 진정한 인간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흙탕물의 지저분한 하마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았습니다. 지저분한 흙탕물 속의 하마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자비하게 하마들을 죽여 없앴습니다. 그러나 지저분하게 보이는 흙탕물의 하마도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마는 그 나름대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지탱하는 일에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으심을 알지 못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신비와 법칙과 목적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하마들을 소탕하여 재앙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화가의 존재는 그림에서 발견되지 않으므로 그림 속에서 화가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림 속에서 화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는 화가의 구체적인 손길이 닿아 있어 화가의 흔적이 남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 속에는 하나님의 현존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흔적과 신비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해에 말씀드렸던 이야기를 하면서 이 세상 곳곳에 숨겨진 하나님의 신비의 사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꿀벌의 신비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합니다. 꿀벌 사회에는 정찰벌이라는 게 있습니다. 정찰 벌은 한 통에 20 마리 정도 되는데 아침 일찍 꿀을 찾아서 나섭니다. 이 벌은 곳곳으로 흩어져서 꿀이 많이 있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정찰 벌들은 정찰이 끝나면 곧 자기 벌통으로 돌아와서 벌통 앞에서 8자로 엉덩이춤을 춥니다. 빠르게 추기도 하고 느리게 추기도 하고 각도를 돌려가면서 추기도 합니다. 이것은 맛있는 꿀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춤추는 각도는 방향을 지시합니다. 속도는 거리를 표시합니다. 일벌들은 정찰 벌들의 보고를 받고 꿀을 따기 위하여 몰려나갑니다.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카를 폰 프리슈는 꿀벌의 엉덩이춤으로 의사소통한다는 것을 발견하여 1973년도에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꿀벌의 신비를 발견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속에는 엄청난 신비들이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엉덩이춤도 잘 연구하면 노벨상을 받습니다.
  

박쥐의 신비

여러분 박쥐를 아시지요? 캄캄한 동굴 속에 서식하는 쥐도 아니고 새도 아닌 어정쩡한 짐승, 조금 지저분하게 보이고 역겨운 동물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박쥐에게도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박쥐를 연구하던 분이 눈이 보이지 않는 박쥐도 좁은 동굴에서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좁은 동굴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가 하는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실험을 하였습니다. 동굴에 날개를 펴면 빠져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철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박쥐의 눈을 가리고 날려 보냈습니다. 박쥐는 철창 앞에 가더니 옆으로 뉘여서 철창에 날개를 부딪치지 않게 빠져나갔습니다. 이번에는 귀를 가리고 날려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철창에 부딪쳐서 철창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눈은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철창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박쥐가 눈으로 보고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으면서 날아다닌다는 생각을 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미사일 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박쥐는 어두운 동굴에 소리를 쏘아 보내고 그 소리가 장애물에 부딪쳐서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방향과 거리를 계산하고 날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미사일을 쏘아 보낼 때에 전파를 목표물에 먼저 쏘아 보내고 그 전파가 돌아오는 것을 감지하여 방향, 속도, 거리 등을 판단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사일 원리가 나오기 수만 년 전부터 박쥐는 미사일 원리를 사용하여 어둡고 좁은 동굴을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신비입니다.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 진리, 지식, 아름다움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연의 청지기로서 사람들이 먼저 할 일을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거기 숨겨진 하나님의 신비와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자연을 아름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야할 목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모든 자연을 존중하고 섬기고 아름답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자연의 청지기는 계속적인 창조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지키는 자만이 아닙니다. 그것을 사용하여 더 많은 것을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기억하시지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창조적으로 더 많은 것들을 남기었습니다. 이것이 주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 한 달란트를 지키기 위하여 땅에 파묻었습니다. 그는 창조적으로 그 달란트를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받은 것을 창조적으로 더 하여 나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창조적으로 에덴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니라.”(창2:15). 에덴동산은 이미 하나님께서 지으신 낙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고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단순히 다스리며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다스린다’는 단어의 원어는 ‘아바드’입니다. 이 말은 경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till, 또는 cultivate입니다. 농부가 아름다운 밭을 샀습니다. 그것은 감격과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농부의 감격이 끝나지 않습니다. 농부가 거기에 자기가 원하는 씨를 심고 가꾸어 풍성한 열매를 거두면 그것은 농부의 기쁨을 배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성경에서 특수하게 사용됩니다. 레위인들은 성소를 맡아서 관리하고 지키는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소를 아름답게 만들고 외적의 침입이나 훼손되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다스린다는 말의 원어 ‘아바드’와 지킨다는 말의 원어 ‘사마르’는 레위인들이 성소를 섬기고 아름답게 만들고 외적이나 훼손에서 방어하고 지킨다고 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은 하나님의 성소와 같이 아름답게 만들고 훼손되거나 오염되거나 파손되지 않게 잘 보존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소에 임재 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연에 임재 하여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는 청지기

자연의 청지기는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의 법칙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씨를 심고 가꾸어서 아름다운 열매를 열리게 하는 농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제 아내가 조그만 텃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텃밭은 조금만 9개의 작은 단지로 되어 있습니다. 봄이 되면 그 텃밭은 거친 광야와 같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내는 그것을 보면서 마음에 계획을 세웁니다. ‘어떤 것을 어디에 어떻게 심을까? 어떻게 하면 이 텃밭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서 씨와 모종들을 구입하고 심고 가꿉니다. 처음에는 거친 광야 같던 텃밭이 씨를 심고 가꾸어 나가는 동안에 조금씩 아름다움을 더하고 지금은 채소가 자라고 열매가 열리고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서 보기에 ‘좋다!’하는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보는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연 속에 숨겨진 신비와 법칙들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서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자연으로 심고 가꾸고 열매를 거두는 일을 하라고 우리들에게 명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연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연을 아름답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입니다. 자연을 훼손하고 오염시키고 더럽게 만드는 것은 사단의 일입니다. 여러분, 사단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자연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자연을 아름답게 만드는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와! 좋다!”하셨습니다.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심히 좋았다는 것은 구어체로 하면 ‘와! 좋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와! 좋다!’의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가정을 보시면서 ‘와! 좋다!’하는 가정을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보시면서 ‘와! 좋다!’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면서 ‘와! 좋다!’고 했을까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을 아시지요?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저주의 죽음을 죽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시험을 이기고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보시고 ‘와! 좋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였습니다.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를 선택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죽더라도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은 용서하고 구원하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시면서 ‘와! 좋다!’하셨을 것입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 대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와! 좋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연을 보전하는 청지기 사명을 수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욕을 먹고 마음 상하기도 하는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저는 작년과 재작년에 여러분들에게 제시한 몇 가지 자연보전을 위한 실천사항을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드립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 십자가라도 질 수 있는 용기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자 합니다. 나도 잘 못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행하라고 말씀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연보전을 생활화 할 때에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연보전을 생활화 합시다.

1) 우리는 재활용하는 것을 습관화 시켜야 합니다.

2)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음식물 쓰레기 때문에 이 땅이 얼마나 오염되고 더러워지는지 아십니까? 특히 식당을 운영하는 분들은 반찬이나 음식을 조금씩 주고 더 채워주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한꺼번에 많이 주고 많이 남기게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가정에서 음식을 만드시는 분들도 조금 적게 만들고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법을 습관화 시켜야 합니다.

3) 나무를 심고 가꿉시다. 화초를 사랑하고 식물을 키웁시다.

4) 농약을 쓰기 않게 하십시다. 농약을 줄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자연친화 농약을 개발하여 사용하는 지혜를 가집시다.

5) 자동차의 매연을 줄이기 위해서 대중교통을 사용하든지 차를 적게 움직이는 방안을 세우셔야 합니다. 매연은 공기를 오염시키는 주범입니다.

6) 쓰레기봉투를 가지고 다니면서 쓰레기를 줍는 법을 생활화 합시다.

7) 무공해에 가까운 세제를 사용합시다. 모든 세제는 공해 물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어떤 세제는 그 함유량이 적습니다. 분별하며 사용합시다.

8)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합시다. 우리교회는 일회용품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회용품들은 썩지를 않습니다. 어떤 것은 70년을 지나야 하고 어떤 것은 100년, 어떤 것은 수백 년을 지나야 썩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훼손하는 일회용품들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9) 쇼핑가방을 들고 다닙시다.

10) 조금 덥게, 그리고 조금 춥게 사는 법을 생활화합시다. 편안하다고 난방과 냉방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그 만큼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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