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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이 정직한 사람 (시 3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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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정직한 사람 (시 32:1~11)

정직하지만 가난한 한 남자가 회당으로 들어가다가 입구에서 가방을 하나 주었습니다. 열어보니 돈이 일억 원이 들어 있는 가방이었습니다. 돈을 본 순간 살림 걱정하는 아내의 얼굴, 옷을 사달라고 조르던 딸의 얼굴, 등록금 걱정하는 아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얼른 집에다 갖다 두고 다시 회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랍비가 광고를 합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을 주워서 보관하고 있는 분이 계시면 주인에게 찾아주십시오. 가방 주인이 후사하겠답니다." 

이 말을 들은 남자는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주인에게 가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가방을 찾은 주인이 보상금을 주지 않으려는 속셈에 거짓말을 합니다. 원래 가방에 이억 원이 들어 있었는데 일억 원은 그 남자가 가지고 일억 원만 가지고 왔으니 보상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방을 찾아 주고도 도둑으로 몰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억울해서 랍비에게 재판을 청구합니다. 랍비가 먼저 가방을 잃은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이억 원이 든 가방을 잊었나요?"
"네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저 사람이 일억 원을 챙겼으니 당연히 보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나는 당신이 분명히 이억 원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남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일억 원이 들어 있는 가방을 주웠습니까?"
"네 분명합니다. 저는 한 푼도 떼지 않았습니다. 일억 원이 들어 있는 가방 그대로입니다."
"나는 당신의 말도 믿습니다."이렇게 말한 후 랍비가 결론을 내립니다.
"당신이 주운 일억 원의 가방은 저 사람이 잃어버린 이억 원의 가방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사용하여도 좋습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한자성어를 아실 것입니다. 적은 것을 얻으려다가 큰 것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사소한 것 때문에 정말 귀한 것을 잃어가면서까지 어리석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욕심 때문에 정직을 잃고 더 큰 것을 가지려고 거짓을 행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정직을 잃어서 거짓을 얻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실해야합니다. 진실이라는 말이 러시아어로는<프라우다(prauda)>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실 이라는 말 속에는<약속>이라는 뜻을 함께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 프라우다라는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하면[톨스토이]가 어느 시골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예쁜 백합꽃이 새겨진 가방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소녀가 엄마에게 톨스토이가 든 가방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톨스토이]는 열흘 뒤에 돌아올 텐데 그때 가방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돌아 와보니 소녀는 백혈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톨스토이]는"아이는 갔지만 약속은 살아있다"면서 그 소녀의 무덤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나무 십자가 묘비위에 가방을 걸어 놓게 됩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누군가가 나무대신 돌 십자가에 돌로 조각한 가방을 놓고서<프라우다>라는 비명을 새겼습니다. 그 뒤 이곳은 명소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약속은 지켜질 때 그 진실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약속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약속을 해도 국민들이 믿지 못하겠답니다. 처음에는 구체적인 제목을 두고 못 믿겠다하며 촛불시위를 했는데 이제는 무엇도, 어떻게 해도 믿지 못하겠답니다. 이런 저런 제목을 다 들고 나서서 점점 본질을 벗어나는듯해서 안타깝습니다만 이 속에 근본 문제는 신뢰거든요. 나는 정직하다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못 믿겠다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약속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요, 아무 것도 믿지 않겠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제리 화이트(Dr. Jerry White)]라는 사람이<정직, 도덕, 그리고 양심>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여기서 사람의 정직함을 네 가지로 분석해서 말해줍니다. 먼저는 일반적인 정직을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직입니다. 두 번째는 법률적 정직함이 있습니다. 누가 보던 말든 상관없이 스스로 정해진 법을 잘 지켜 나가는 정직함입니다. 세 번째는 내면적 정직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따라서 스스로 양심을 깨끗하게 지켜 가는 정직성입니다. 네 번째는 성서적 정직성입니다. 사람 앞에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정직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러기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짓을 통하여 자기합리화 하려는 경향이 더 많습니다. 가령 누가 봐도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자기 스스로 마치 재능처럼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거짓말을 했는데 상대방이 속아줍니다. 그러면 나한테 속는 저 사람은 멍청하고 속이는 나는 똑똑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정직을 가장한 또 한 가지의 합리화는 법을 어기든가 양심을 어길 때 통쾌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차를 운전하고 나가다 보면은 때때로 아직도 빨간 신호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먼저 가면서'왜 멍청하게 거기 서있냐? 나는 먼저 간다.'이러는 통쾌한 마음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의 자기 합리화는 거짓이 오히려 큰 이득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끝까지 속이면 된다는 생각이지요. 나만 알고 있으면 되고 마지막까지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거짓말은 한 번하면 계속적으로 해야만 본래의 거짓말이 감추어지는 법이거든요. 그래서 처음 거짓말로 시작하면 끝까지 거짓말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거짓이 성품화 되면서 인간성을 잃어버립니다. 거짓말이 체질화되면서 자기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있는데 이런 손해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죠.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말합니다."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이 말은 뭔가를 숨기려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거짓이 있을 때에, 내가 모든 사람 앞에 뭔가 깊은 죄악을 숨기고 있을 때에 말을 하지 않고 숨기려했더니"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고 말합니다. 뼈가 쇠하였다는 표현이 무엇이겠습니까? 정직을 말하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가지고 살았더니 육신까지도 병이 드는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되더라 그 말입니다. 진액이 다 빠져나간 뼈는 힘이 없습니다. 최악의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짓 되는 이유가 뭡니까? 거짓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왜 거짓말을 하고 왜 우리는 속이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의 하나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뭔가를 얻으려는 할 때 거짓을 합니다. 사람은 내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들면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지극한 이기심, 나 자신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거짓 되게 합니다. 

또 하나는 현재만 생각하는 근시안입니다. 순간만 벗어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임시방편적으로 거짓을 행합니다. 순간만 생각하는 이 찰나주의가 거짓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말이 통합니까? 그런데도 버젓이 거짓을 행하는 것은 바로 불신앙입니다. 

행5장에 유명한[아나니아]와[삽비라]부부의 얘기가 나옵니다. 부부가 섬기던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이 필요했을 때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땅을 팔았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오늘 많은 교인들 중에 자기 집을 팔아서 혹은 자기 땅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할 사람이 몇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부부는 그런 결심을 했다는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기특한 생각을 가진 부부가 결국은 죽음을 당할 만큼 큰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팔아서 하나도 안 드리는 사람도 있는데 조금이라도 드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심판을 받은 것일까요? 약속의 문제입니다. 이미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목적으로 팔았으면 그대로 드려야 옳습니다. 팔고 보니까 의외로 돈이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거 다 드리자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얼마를 감추고 얼마만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를 드렸느냐 것이 아닙니다. 처음 마음으로 약속한 바를 지켰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혹시 하나님 앞에 약속한 바가 있습니까? 마음으로 이미 드린바 된 것을 아직도 드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질은 물론 이거니와 봉사와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상당한 부분은 감춰두고 전부를 드리는 것처럼 말하고 사도들 앞에 헌납을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행위를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이라고 책망합니다. 거짓은 하나님 앞에 분명한 죄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처음에는 자기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하는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거짓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쓴 다윗은 아주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실 우리가 아는 다윗은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도 아닙니다. 그가 행한 일들을 보면 칭찬만 할 수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른 사람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엄청난 죄를 짓고 백성들 앞에 부끄러웠고 하나님 앞에는 더 더욱 큰 죄인이었습니다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회개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할 때에 속이 썩는 것 같았지만 회개하고 나니 그렇게 자유로워졌습니다. 

정직이란 한편으로는 내가 어떤 죄를 지었던지 그 죄를 인정하고 나가서 그로 인해서 오는 모든 비방을 다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주 달게 받을 수 있어야 됩니다. 죄인을 죄인이라고 하는 데는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 다 그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거짓말로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윗에게는 그런 정직함이 있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정직, 그것이 곧 다윗의 정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직한 자에게 있는 자유함, 이 행복의 극치를 모르기 때문에 많은 거짓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로 인한 기쁨, 정직함을 회복하는 자의 간증,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정직이 회복될 때 최고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시51:10절에서"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도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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