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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본받자 (눅 5: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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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본받자 (눅 5:15~16)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활기찬 인생을 살려면 기도에 대하여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을 보면 하나 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몇 사람만 예를 들어봅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가졌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일컬어 “나의 벗”이라고 하셨습니다(사 41:8). 이는 아브라함이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야곱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 몰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일로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피신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20년을 지내면서 거부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왔는데, 형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귀향을 알렸더니 종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에서가 군사 400인을 거느리고 말 타고 달려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야곱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얍복강 나루에 혼자 남아 밤을 새워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목숨을 건 기도를 올렸습니다. 천사가 쳐서 환도뼈가 위골되는 부상을 입었지만 끈질기게 매어달린 결과,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자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형 에서와 극적인 화해가 이뤄졌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자인 모세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맨손으로 대제국 애굽의 바로를 상대했던 모세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기도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육지처럼 걸어서 건넌 일이나 반석을 쳐서 생수를 낸 기적은 다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만에 하나님에게서 십계명 돌판을 받아 내려오는데, 산 아래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대노하셔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너로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자들을 징벌한 다음, 다시금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사십 주야를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리라’(삼상 12:23)고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위대한 사역 역시 기도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가 기도하자 삼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그가 기도하자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렸습니다. 또한 갈멜산 위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인을 상대로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중에 누가 참 신인가를 놓고 대결할 때, 그가 기도하니 하늘로서 불이 내려와 단과 제물을 살랐습니다. 이 같은 예를 들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기도에 대한 위대한 증언을 얼마든지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기도의 본을 보여주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세 번에 걸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사복음서가 증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가복음 3장 20절에 보면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고 하였고, 6장 31절에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바쁜 중에도 주님께서는 기도에 힘쓰셨다는 것입니다. 낮에는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기도할 틈을 낼 수 없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밤중에도 주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주로 새벽 시간에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보니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곤히 잠자는 새벽 시간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또한 새벽은 정신이 맑아서 기도하기에 적합합니다. 아직 일과를 시작하기 전이므로 잡념이 가장 적은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밤을 지새우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12-13)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주님께서는 철야 기도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의논하셨던 것입니다. 

때로는 모든 일을 다 제쳐놓으시고 기도에 몰두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비롯해서 각종 불치병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각색 병으로 앓는 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는 일도 중요하고, 말씀 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일 보다 기도를 더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기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 생활을 하려면 기도에 관심을 갖고 특별히 시간을 내야 합니다. 아무리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더라도 기도에 관심이 없으면 하루에 단 5분의 시간도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바빠도 기도할 시간을 마련합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는 것입니다. 무릇 인격적인 사귐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한 집에 기거할지라도 대화가 없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화한 가정은 가족 간에 대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화로나 편지로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영(靈)이시므로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십니다. 곧 시공을 초월해서 어디나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성도들의 몸을 성전 삼아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무 멀리 계서서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고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한없는 친밀함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이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한없는 친밀함과 신뢰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같은 기도의 자세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란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연속적으로 무엇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우리의 요구를 말씀드리는 것은 기도하는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내 편에서만 할 말을 하는 것은 진정한 대화가 아니며 그래서는 친밀한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기도 시간에 우리는 소원을 아뢰기도 해야겠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육신의 귀가 아닌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합니다. 어린 사무엘은 성소에서 누워 자던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자,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고 하였는데, 이야말로 기도하는 사람의 바른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요구 사항을 아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통을 나누게 되어 심령에 기쁨이 충만케 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내내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하셨습니다. 사람이 계속해서 남에게 주기만 하고 받는 것이 없다면 마치 항아리에 담긴 물을 계속 퍼내기만 하면 금방 바닥이 나듯이 결국 지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주고 베풀려면 그 만큼 자신도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위로를 베풀려면 우리도 어디선가 충분한 위로를 공급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을 이해하고 위로해 주었습니까? 제자들입니까? 병 고침을 받은 자들입니까? 아니면 떡을 얻어먹은 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의 교통을 나누심으로 한없는 위로와 안식을 받아 누리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하다가도 때때로 기운을 잃고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다가도 지쳐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핍박과 시험을 잘 이겨내다가 이제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사용만 했지 새롭게 보충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위로와 기쁨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풍성한 위로를 받게 되어 심신의 모든 피로가 사라지고 다시금 기쁜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디 하나님의 독생자시지만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신적인 능력을 나타내신 것은 항상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으며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오니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다 놀라며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말하기를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성령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에,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중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명을 감당하셨다면, 하물며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마가복음 9장에 기록된 한 사건을 통해서 그 답을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저희들이 보는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또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세 제자는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했습니다. 때에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뿐이었습니다. 

한편, 산 아래 남아 있던 제자들은 큰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남자가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했으나 제자들이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제자들의 형편을 아시고 서둘러 하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귀신 들린 아이를 데려 오게 하신 후에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니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습니다. 나중에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기에 앞서 제자들을 모이게 하셨을 때 그들은 이제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자 예수님께서는 구름을 타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을 비롯한 120여 성도들은 어느 다락방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랬더니 오순절 날에 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능력 있는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타락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황금만능주의의 풍조에 물들어서 의리니 도의 따위는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물질에만 관심을 둘 뿐, 영혼에는 무관심한 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세상일에는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우려면 과거의 성도들 보다 더 큰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았던 초대교회 120여 명의 성도들처럼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할 때, 세상이 감히 우리를 이길 수 없으며, 많은 불신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되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 쓰임 받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가리켜 탈 규범의 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전통이나 도덕을 벗어버리고 자기들이 좋은 대로 자유분방하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자유와 방종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이 시대의 사조에 영향을 받아 성도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도외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17장 6절에 보면 사사시대의 실상에 대하여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시지만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자손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둠에 속한 자들이요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내 뜻대로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할 수 있을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온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께는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는 순간을 생각할 때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거절하셨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아무 소망도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눈물의 간구를 드리심으로 구세주의 사명을 너끈히 감당케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로써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그 거룩하신 뜻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뜻대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음을 절감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도생활에 힘쓰셨는지를 말해 줍니다. 이처럼 성경에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기록해 두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기도의 본을 따르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본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마귀는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헤매며 믿는 자라도 넘어뜨릴 수만 있으면 넘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시고, 또한 밤이 맟도록 기도하시며, 모든 일을 제쳐놓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의 중요성을 깨달아 기도생활에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행하며, 성령의 능력을 받아 마귀의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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