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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전한 예배 - 예배가 회복되며- (대하 35: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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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예배 - 예배가 회복되며- (대하 35:16~19)


예전에, 도끼로 장작을 패본 일이 있습니다. 장작을 잘 패려면, 힘도 필요하지만, 힘 못지않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령입니다. 어느 指點에 도끼날을 내리쳐야 할지, 정확한 지점에 힘을 집중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장작을 팰 수가 있습니다. 
  
맥을 잘 짚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이지요. 분열왕국 時代 남쪽 유다의 열왕들 중에는, 歷史의 脈을 잘 잡은 왕들이 8명 정도 있습니다. 王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스, 아사랴,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 입니다. 이들은 말하자면, A학점을 받은 王들입니다(하나님과 백성들 모두에게 인정). 

A 학점을 받은 여덟 王 中에서, 특별히 A⁺학점을 받은 王이 셋 있습니다. 王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입니다. 이 왕들은, 유다 나라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 지, 歷史의 脈을 정확하게 짚고 통치했던 왕들입니다. 이들 여덟 왕들은 모두 두 가지로 평가받았습니다. (1)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더라.” (2)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본문에 나오는 主人公, 王 요시야는 패망직전에 있던 유다王國의 最後의 聖君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대하면서 사실은, 참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다. 그 理由는, 요시야 王과 그의 時代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았지만, 그 다음 後世代들은 하나님의 審判의 대상이 되어 패망하였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는 죽음 직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온 산이 떠나갈 듯한 포효를 하고 죽습니다. 별도 떨어지면서, 마지막으로 엄청나게 밝고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사라집니다. 기울어져 가는 王朝에도 마지막으로 한 번 所望의 기지개를 켜는 일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유다 왕조의 최후의 성군이었습니다. 더 이상 요시야 왕과 같은 聖君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포함하여 한국교회의 後代들이 요시야 王 以後의 時代와 같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집중시켜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다 最後의 聖君이었던 요시야 王이 패망직전에 있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찾았던 歷史의 脈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겁니다. 요시야 왕이 찾았던 나라를 세우는 길, 歷史를 살리는 脈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유다 백성들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말씀을 회복하는 일과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요시야가 왕위에 오르자 개혁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때, 대제사장 힐기야가 聖殿 안에서 먼저 가득 쌓인 律法冊을 발견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던 時代에(30여 년 전에), 後世代들에게 잊어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기 위해서 성전 안 지성소에 감추어두었던 율법책이지요. 대제사장 힐기야가 그 율법책을 발견하고는, 王 요시야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자 왕 요시야는, 서기관 사반에게 명하여, 발견한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게 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1000년 전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던 신명기 28장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읽자, 요시야는 자기 옷을 찢으며, 통곡하며 말합니다.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통탄합니다(대하 34, 21). 그리고는, 그 말씀대로 지키기로 결단합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이와 같이 당일에, 여호와를 섬길 일이 다 준비되매(무엇대로 준비했습니까? 하나님 律法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回復), 요시야 왕의 命令대로 逾月節을 지키며 燔祭를 여호와의 제단에 드렸으며(예배를 드렸다는 말씀이지요) … (그 담 말씀을 보십시오. 유다나라 歷史上 지금까지 없었던 아주 독특한 표현의 말씀이 나옵니다)/ 先知者 사무엘 以後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逾月節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무슨 말씀일까요? 요시야 왕 때에 와서야 비로소 온전한 禮拜가 회복되었다는 말씀이지요. 그 담 말씀을 또 보십시오)/ 이스라엘 모든 王들도(비교시키고 있는 말씀이지요)/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심지어 다윗 왕까지도)”(대하 35, 16-18). 

선지자 사무엘 時代 以後부터 요시야 왕때까지 그 어느 시대에도/ 요시야 왕 때만큼/ 유월절 예배를 온전하게 드린 적이 역사이래로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요시야 왕 때 와서야 비로소 「온전한 예배가 회복되었다」는 겁니다. 禮拜回復의 求心點에, 요시야 왕이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성경은, 요시야 왕의 행적을 두 가지로 증언합니다. (1) 하나님 말씀회복이고, (2) 온전한 예배의 회복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위대한 개혁자 요시야 왕의 행적에 대해서는, 성경은 다분히 결론만 언급해 주는 정도로 그쳐버립니다. 

▶ 여기서 우리가, 눈을 돌려서 온전한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던,  또 한 사람의 예배 회복자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요시야보다 3代 先王이었던 王 히스기야입니다(요시야→ 아몬→므낫세→히스기야). 히스기야 왕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요시야 왕보다 좀 더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王 히스기야가 다스리던 時代도, 요시야가 王位에 나아갈 때나 역사적인 狀況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위에 나아갈 때, 유다는 마치 부실경영으로 不渡直前에 몰려 있던 企業과도 같았습니다. 그 때 당시, 유다는 주변국 ‘아람’과 ‘北 이스라엘’, ‘에돔’과 ‘블레셋’ 등,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면서 계속적인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승전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全敗했습니다. 마지막 희망은,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와 동맹을 맺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맹군 앗수르도 유다를 도와주기는커녕 도리어 유다를 공격해버렸습니다. 결국, 왕 아하스는 어떻게 합니까? 앗수르 왕에게, 하나님의 聖殿과 王宮과 大臣들의 집들을 다 털어서 조공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무익했습니다. 이것이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 狀況입니다. 

不渡國家를 인수한 셈이지요. 부도직전의 국가였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王位에 올랐지만 어디서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한 시대였습니다. 

先王인 아버지 아하스 왕은, 유다왕조 歷史上 最惡의 王 中 한 사람입니다.  히스기야는, 부도국가를 인수한 왕입니다. 그러나, 역대하 29, 2을 보면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히스기야의 무엇을 보시고 그를 그렇게 평가해주셨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히스기야의 예루살렘 성전 淨化와 예배의 회복을 두고 하신 평가입니다. 

아버지 ‘아하스’가 지었던 罪惡의 뿌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異邦사람들이 섬기던 偶像을 崇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理由를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아하스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이유가 뭡니까? 

성경을 보면,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변국가들의 군대가 강성하고 힘이 세자, 그 나라들의 군사력이 강하게 된 理由가 그들의 神 때문이니, 유다도 하나님 代身에 그들이 섬기는 神, 偶像에게 제사하고, 예배하면, 그 神이 유다도 강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랍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이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하스의 계속되는 惡行을 보십시오. 군사적으로 강대한 나라를 만들어보겠다고 아하스가 취한 계속된 조치를 보십시오. 

온 나라 백성들이, 더이상 하나님의 聖殿에 나아가서 예배하지 못하도록,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아예 閉鎖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聖殿의 온갖 기구들을 다 내다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罪惡을 행하였으니, 어찌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유다의 계속되는 패배와 동맹을 맺은 앗수르 軍隊의 배반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을 버린 유다(아하스 왕과 그 백성들)를 낮추시기 위함이었다 말씀합니다(역하 28, 19).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조치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아하스가 닫아버렸던 성전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일이었습니다. 16년 동안 닫아놓았던 성전, 방치해놓았던 성전, 폐허가 되어버린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다 소집하는 일이었습니다. 

아하스 왕 시절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도대체 무얼하고 있었을까요? 성전문이 닫혀버린 시대, 영적지도자들인 그들은 무얼했을까요? 그들도, 時代의 時流를 따라가면서 우상숭배하면서 산 것이지요. 本分을 잃어버린 지도자들이었던 거지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16년 동안 성전 문을 閉鎖하고 방치해 두었습니다. 상상만이라도 해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집을 16년 동안 방치해두었다면, 凶家도 그런 凶家가 어디 있겠습니까? 옛말에,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문제는 여러분, 建物과 環境만 폐허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면서 16년 동안 산 백성들 지도자들 王, 나라꼴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0여 년 전에, 降神巫堂을 하던 분이 예수 믿으면서 교회 나오게 되자, 巫堂집의 神堂을 철거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정작 평생을 降神巫堂을 하던 그 사람은, 겁이 나서 신당을 없애고 청소하는 일, 손 하나도 까딱하지 못했습니다. 저와 목사님들, 권사님, 교우들 몇 분이 가서, 음산한 분위기, 냄새가 얼마나 역겨운지요. 더럽기가 그지없었습니다. 무당집이 그렇게 더러운 것 첨 봤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人生의 집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히스기야의 召集命令을 받고 정신을 차린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성전정화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더렵혀진 기물들을 깨끗이 하고, 황폐해진 성전 내부를 수리했습니다. 

성전건물이 다 수리되고 정화되자, 이번에는 王과 貴人들과 百姓의 指導者들이 먼저 하나님께 贖罪祭祀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燔祭도 드렸습니다. 번제는 희생제사이면서, 헌신의 제사이지요. 그런 後에, 다음으로 유다 온 백성들이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려 예배하게 했습니다. 

역대하 29, 35-36 말씀을 보면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에게 주신 복이 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의 기름과 각 번제에 속한 전제들이 많더라.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전에서 섬기는 일이 순서대로 갖추어지니라(예배가 회복되었다. 그 담 말씀 보십시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성전정화와 예배회복의 사건이지요)/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豫備하셨으므로(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예배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시고, 기다리고 계셨다는 말씀이지요),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아멘. 모든 문제의 核心과 答은, 聖殿회복에 있었고, 예배회복에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 이제, 우리가 적용해야 할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예배하러 오신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들, 자녀들은 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市民權을 가진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히스기야 時代뿐만 아니라 요시야 時代뿐만 아니라, 온전한 예배회복입니다. 온전한 예배의 회복, 예배가 없는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惡한 罪惡이요. 敗亡의 길을 自招하는 대단히 어리석은 삶입니다. 

66주년을 보내면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或是 父母된 우리가 자식들에게, 아하스 왕과 같이 聖殿門을 닫아버리고, 성전기구를 내다버려서(하나님 말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人生의 더 중요한 主人으로 삼게 하는 惡한 罪惡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지난주일, 교회학교 진단과 성장과 발전을 위한 모색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움을 했습니다. 한 가지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요즘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지식위주의 공부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도록 直間接的으로 예배당 문을 걸어 잠그는 罪惡을 犯하고 있다는 겁니다. 

많은 교회학교 아이들이,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이 즐겁지 않은 이유를 물었을 때, “TV나 컴퓨터를 하고 싶어서”로 답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예배드리러  오기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거나 쉬고 싶어서”라고 한답니다. 얼마나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공부하면서, 입시위주의 지식교육에만 온 관심을 쏟아 붓고 있는지를 단번에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토요일 밤 늦게까지도 학원을  보내거나 심지어 주일까지도 학원을 보내거나 공부시킵니다. 공부 때문에, 아이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성전 문을 부모들이 닫아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이것은 성전 문을 폐쇄하였던 아하스의 罪惡과 다름없습니다. 

사랑하는 우리자녀들에게, 예배를 회복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人生에 하나님의 祝福이 입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온전한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 한 가지 간곡한 부탁 말씀드립니다. 당장 실천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배시간 지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 기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습관적인 지각예배 아니될 일입니다. 예배시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지각예배드리고도 마음이 불편하시지 않으십니까? 스스로 화가 나시지 않으십니까? …. 

옛날,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자동차 없던 시절에도 예배시간 보통 30분 전에는 나오셨습니다. 재종소리 듣고(5분전) 예배당에 나오면 큰 부끄러움으로 여겼습니다. 주일과 예배시간을 記憶하고, 엿새 동안 일하고 정성스런 예물을 준비해서 예배하러 나왔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온전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도 온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헌금함에 넣으십시오. 예배가 회복되면, 삶이 회복됩니다. 聖日(주일)에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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