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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성공인가? (삼하 18:19~30) - 아히마아스, 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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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성공인가? (삼하 18:19~30)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버지 다윗왕을 죽이겠다고 큰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다윗왕의 신하 요압 장군, 아비새 장군, 잇대 장군이 세 편으로 나누어 압살롬의 반란군을 섬멸하였습니다. 이때 압살롬은 요압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요압 장군은 승전보와 함께 압살롬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다윗왕에게 전하기 위해 전령을 보내게 되었는데, 전령으로 두 사람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요압 장군은 구스 사람이라고만 밝힌 무명의 군사에게 이 사명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구스 사람이 출발하자 아히마아스라는 사람이 요압장군에게 자기도 전령으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요압 장군은 아히마아스에게 말합니다. "왕의 아들이 죽은 슬픈 소식인데, 왜 전령으로 가려고 하느냐? 이번 일은 슬픈 소식이기에 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히마아스가 계속 간청하기에 요압 장군은 그도 전령으로 가도록 허락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지름길을 달려 먼저 출발한 구스 사람보다 앞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아히마아스가 달려오는 것이 왕궁의 파수꾼에 의해서 왕에게 보고 되었습니다. 왕은 급히 그를 맞이하여 그로부터 승전고를 보고받았습니다. 이어서 다윗왕이 가장 궁금하던 소식인 아들 압살롬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압살롬이 무사하냐?" 

다윗왕이 묻자 아히마아스는 대답합니다.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으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나이다." 즉 아히마아스는 진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화가 난 다윗왕은 전령에게 그만 물러가라고 호령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전령으로서 상관의 뜻을 바로 전하지 못함으로 자기의 맡은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뒤를 이어 구스 사람이 왕궁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승전고와 함께 압살롬에 관한 슬픈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왕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대해 기뻐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에 대해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하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볼 때 두 사람이 전령으로서 달려갔지만, 구스 사람에 비하여 아히마아스는 부끄러운 경주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스 사람은 전령으로서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였고, 아히마아스는 좋은 것만 전하고 좋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미루었습니다. 

‘아더 밀러’의 작품 중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 작가는 ‘인간이 성공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 ‘윌리 노만’은 성공적인 세일즈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로는 충격적인 자살로 종결이 되었습니다. 즉 세상적인 성공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아히마아스는 전령으로서 구스 사람보다 지름길로 빨리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왕이 지극히 중요하게 여기던 소식은 제대로 전하지 못했습니다. 즉 그는 구스 사람보다 빨리 달려가므로 성공한 전령 같았으니 오히려 실패한 전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실패한 전령인 아히마아스를 통하여 성공과 실패에 대한 교훈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진정한 성공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1. 아히마아스는 빨리 달리는 것이 성공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소위 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속력에만 관심을 쏟을 때가 많습니다. 즉 남보다 빨리 가고, 남보다 먼저 성취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떤 사람이 달려온 시간의 길이나 속도보다는 그 내용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소년 소녀들에게 많은 모험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유명한 작가 ‘웨스’는 인도의 민화를 이용해서 ‘무덤’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도의 어느 왕국에 아주 젊고 아름다운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과 결혼한 지 1년 만에 그 왕비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왕은 너무나 슬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냈습니다. 궁리 끝에 왕은 아주 정성을 들여 왕비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왕은 무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때 왕의 눈에 비친 무덤은 너무나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신하를 시켜 왕 자신을 상징하는 훌륭한 용모의 남자 조각을 새겨 무덤 동편에 세워두었습니다. 자기는 무덤가에 있지는 못하더라도 자기를 닮은 동상이라도 두어 왕비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로부터 또 1년 뒤에 무덤을 가 보았는데, 그곳은 여전히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왕은 왕가를 상징하는 호랑이를 만들어 서편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다음에 무덤 앞에 재력을 상징하는 호화로운 집을 짓게 했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하여 1년 뒤에는 무덤 뒷편에 권력을 상징하는 훌륭한 성곽을 세웠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뒤에 무덤이 있는 동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참으로 근사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동쪽에는 미남 조각, 반대쪽에 용맹스런 호랑이 상, 거기에다 호화로운 궁전에 훌륭한 성곽까지 잘 조화되어 아름답기 그지없었습니다. 왕은 흡족한 마음으로 좀더 살펴볼 양으로 자세히 가서보니 가운데에 초라하게 서있는 무덤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가운데 있는 무덤을 치워버려라." 

즉 진짜 중요한 내용이 없어지고 겉만 화려하게 꾸며진 잘못된 것을 지적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이런 과오를 범할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처음에는 감격스럽게도 하나님을 중심에 모셨는데, 점차 자기가 드러나고, 가문이 드러나고 재물, 명예, 권력이 드러나며, 그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하나님은 점점 사라지고 끝내 하나님은 귀찮은 존재가 되니 집어치워 버리자는 생각을 갖게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구스 사람은 비록 발걸음은 느렸으나 전령으로서 전해야 될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아히마아스는 지름길을 달릴 줄 아는 약삭빠른 수단과 방법은 가지고 있었으나 전령으로서 전해야 될 내용을 가지지 못한 부끄러운 전령이었습니다. 그는 전령으로서 달음박질하는 겉모양은 지니고 있었으나 전령으로서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인간으로서 삶의 참 의미와 보람은 상실한 채 성공만 추구하려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아히마아스는 주어진 사명보다는 자신의 명예와 출세만을 위해 달렸습니다. 

요압 장군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했지만, 아히마아스는 자기 마음대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즉 승전고의 소식을 왕에게 먼저 전하면서 왕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탈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구스 사람은 요압 장군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그는 왕이 듣기를 원하는 소식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 달렸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왕실에서 왕자의 혼인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왔음으로 인하여 잔치에서 쫓겨나는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즉 왕자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는 것이 아무리 기쁘고 다급해도 왕을 기쁘게 하는 예복을 입지 않고 그냥 왔다가 부끄러움을 당한 것입니다. 

아히마아스가 바로 이런 사람과 같습니다. 아무리 왕에게 빨리 가서 전하고 싶고, 그리고 칭찬 듣고, 상급을 받고 싶어도 왕이 원하는 바를 준비하지 못했다면 “너는 물러가라.”라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도 하나님이 원하는 예복을 입고 있는지, 혹은 벌거벗은 모습이 아닐는지 깊이 생각하고 달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명예와 출세와 성공만 바라고 빨리만 달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내용, 바른 사명을 갖추고 달려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빠르게 달리고, 아무리 화려하게 보여도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사명을 저버리고 달리는 사람들은 종착역에 가서 왕 되신 하나님 앞에서 결국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쫓겨나고 맙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여러분, 성공주의에 빠져 큰 것만 생각하다가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조그만 사명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인생을 잘못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이 아무리 작아도,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지 못해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고 살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시게 됩니다. 


3. 아히마아스는 나쁜 역할은 안하겠다고 생각하며 달렸습니다. 

압살롬은 비록 아버지 다윗왕에게 반역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다윗왕은 아들 압살롬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전령으로서 다윗왕에게 아들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분명히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구스 사람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좋은 소식도 다윗왕에게 전해야 하지만, 왕자 압살롬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도 함께 전해야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즉 괴로운 사명 즉, 십자가를 지는 사명도 함께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히마하스는 좋은 역할, 좋은 소식만 전하므로 다윗왕에게 칭찬과 상급만 받으려고 했지, 왕자가 죽은 슬픈 소식을 전하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즉 십자가를 팽개치고 자기의 성공과 출세만 위해서 빨리 뛰어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아히마하스와 같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좋은 것만 하려고 합니다. 남에게 칭찬을 듣고, 보기에 좋은 것만 하려고 합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 고통스러운 역할은 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세상적인 성공만 바라보고 그렇게 인생을 사신 이기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 히브리서 12:1,2절에 보면 예수님의 인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성공은 예수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고통까지 나누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성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곳 외국 땅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달려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진정한 성공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란 달리기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경주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히마아스처럼 자기의 명예와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빨리만 달려가려고 하는 부끄러운 경주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구스 사람처럼 비록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달려가더라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좇아 바르게 달려가야만 하겠습니다. 

일등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꼴등이라도 좋습니다. 영광스러운 경주란 빨리 달리는 것보다 내용이 있는 인생을 말합니다. 자기 위주의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삶을 말합니다. 이기적인 자기 기쁨만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참 기쁨을 내다보는 경주를 말합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도 주님을 위한 인생의 경주를 성실히 하시면서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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