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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는 성도 (눅 8: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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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를 대적하여 이기는 성도 (눅 8:26~39)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말하기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하였고, 주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나를 좇으라”고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이 세 종류의 사람을 통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마음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 째로, 주님을 따르려면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온 첫 번째 사람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주님의 제자가 될 것을 자청했습니다. 언뜻 보면 이 사람은 대단한 결심을 하고 나온 것 같습니다. 용기도 있고 사명감도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는 말씀으로 그 사람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청을 거절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주님의 대답을 통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했던 동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얻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심으로 주님을 따르려면 부귀영달이 아니라 희생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과 같이 순수하지 못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신기한 기적을 보기 위해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한 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공개적으로 놀라운 표적을 많이 보이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이 같은 표적들을 행하신 것은 그가 곧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제껏 행하신 표적들만 가지고도 그의 메시야 되심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찾아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또 다른 표적들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표적을 보고 믿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기적을 보여 주면 예수님을 믿겠다는 사람은 기상천외한 기적을 볼지라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한번 기적을 보여주면 계속해서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거룩한 메시야의 기적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표적을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말씀은, 몸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겠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구하는 자들은 언뜻 보기에는 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기 위해 기적을 구할 것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요즘 은사 집회를 한다는 어떤 강사는 자기가 기도하면 멀쩡한 이가 금이빨이 된다고 선전합니다. 한심한 것은 그런 사람을 초청해서 부흥회를 여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회는 신자들의 신앙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것이므로 부흥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전에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사람이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간증 집회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 그곳을 다녀왔다는 사람의 말을 들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 간증 테이프를 들어보았더니 그 내용이 너무나 비성경적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전하는 천국은 너무 초라하고, 지옥에 대한 설명은 마치 절간에 붙여놓은 지옥도를 연상시켰습니다. 신비한 말을 듣고 신비한 경험을 하면 믿음이 성장할 것 같지만 사실은 불건전한 믿음의 행태를 갖게 되어서 영적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됩니다. 

현세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축복을 받으려고요”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고 약속하셨습니다. 

문제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긴 결과로 복을 받게 되어야지, 복 받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차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복 받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만사가 형통할 때는 하나님을 잘 섬기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낙심하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불신앙의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세의 복만을 생각한다면 구태여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잘되고 성공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도 이 사회에서 성공해서 부자로 사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속적 기복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속적 기복 신앙을 가진 사람은 형통할 때는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역경에 처하고 기도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저버립니다. 그러나 형통할 때나 역경의 때를 막론하고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진실한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는 어려운 때일수록 더 신앙생활에 힘쓰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어 달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알아보시기 위해 때때로 시련의 시기를 허용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둔  믿음은 흔들리지 않지만, 기복적인 토대 위에 세운 믿음은 작은 시련에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왔던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로 세속적인 영달을 기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속을 아셨으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희생을 각오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3-24) 

역사상 그 어느 위인이 자기 제자들을 향하여 이런 요구를 한 적이 있습니까? 과연 그 누가 “나를 따르려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요구할 충분한 자격이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요구를 하실지라도 조금도 무리한 요구가 될 수 없으며, 이 같은 복음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희생도 무릅쓰고 기꺼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주님을 따르려면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번째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시자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상중에 있다거나,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청을 거절하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서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한 것과 같습니다. 한 가지 감안할 것은, 거절의 의미로 부모의 장사를 핑계로 삼는 것은 중근동 사람들의 언어관습에 속합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영국인이 중동지역에 갔다가 어느 아랍 청년을 만나서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청년이 너무 총명한지라 이 영국인은 옥스퍼드 대학에 연락해서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한 후에 그 사실을 그 청년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말하기를 “나의 부친의 장례를 지낸 후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청년의 아버지는 겨우 40세 정도에 불과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을 위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 사람이 흔쾌히 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더구나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를 귀한 줄 모르고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주님께서는 이르시기를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믿지 않는 가족들을 핑계삼아 주님을 따르는 것을 뒤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인륜을 무시하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으십니다. 당시 바리새인들 가운데는 부모를 공양할 의무를 행하지 않기 위해서 부모에게 드려야 할 생활비를 하나님께 드리노라고 선언함으로써 부모 공경의 책임이 면제되었다고 알고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부당한 이유로 어긴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온 두 번째 사람의 부친이 죽었다면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요즘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면, 부모를 핑계 삼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에 곤란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때가서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직 나는 예수 믿을 생각이 없습니다.’라는 말과 같으며, 부모는 다만 핑계거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방해거리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특히, 믿지 않는 가족이나 일가친척으로 인해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기 쉽습니다. 그러한 때에 핑계를 대고 타협하기 시작하면 결국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려면 때로는 가족이나 친척들의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할지라도 신앙의 영역은 타협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더 중하게 여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잘 섬기기 위해 부모나 자녀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가족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주 안에서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고, 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주 안에서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기회를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나에게 주신 절호의 기회로 알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핑계를 대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건강하게 살아있는 부모의 장례를 구실 삼아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믿지 않는 가족을 핑계 삼는 한 그 사람은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합니다. 기왕에 믿을 바에는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철저하게 믿어 봅시다. 

시편 91편 14-16절에 보니,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전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께서 기뻐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세 번 째로, 주님을 따르려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번째 사람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잠시 집에 가서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리 없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하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사가 소 열 두 겨리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졌습니다. 겉옷을 던지는 것은 곧 그 사람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그 때 엘리사는 즉시 밭가는 것을 멈추고 엘리야에게 달려가서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 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허락하자 엘리사는 집에 가서 소 한 겨리를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이웃 사람들과 잔치를 하고는 곧바로 집을 떠나 엘리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부모를 핑계 삼아 엘리야의 부름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를 두 마리씩이나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베풂으로 자기의 결심을 확고히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온 세 번 째 사람은 엘리사와 같이 심지가 굳은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가족을 만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결심을 말한다면 그들은 일제히 그를 만류하고 놓아 보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만 그의 결심이 흔들려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포기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아셨으므로 그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자주 밭을 갈면서 뒤를 돌아보면 밭고랑이 삐뚤삐뚤하게 되어서 나중에 씨를 뿌려 가꿀 때에 애로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손에 쟁기를 잡은 자는 똑바로 앞을 쳐다보고 밭을 갈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를 마음을 가졌으나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 데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사도 바울과 함께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서신서에 그의 이름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보면 그가 한 때 열심있는 사역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데마는 초지일관하지 못했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안일한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만 사도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 버렸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 때 주님을 잘 섬겼으나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과거에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을 우연한 기회에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세 가지 경우를 대하는데, 첫째는 지난날에는 믿음 생활을 잘하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신실한 성도로 변한 모습을 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느끼는 마음의 상쾌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 상태는 날이 갈수록 향상되어야지 퇴보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는, 과거에 충실한 신자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쾌한 시간을 보냅니다. 세 번째는, 과거에는 신앙생활을 잘 했는데 그만 지금은 믿음을 잃어버리고 만 경우입니다. 그 사람이 어쩌다가 그렇게 믿음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사람을 대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롯의 처는 유황불로 멸망하는 소돔성에서 구출받았으나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들의 말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 까닭에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멸망당할 죄악 세상에서 건짐 받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과거에 주님을 모르고 살던 시절을 동경하면 안 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 삼고 믿음의 전진을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나 사업상의 일로 주님을 섬기는 일을 등한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 바빠서요. 앞으로 사업에서 손을 떼면 그 때 예수님을 잘 믿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 어리석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몸에 병이 들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불러 가시면 그 많던 일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솔로몬은 일평생 크고 위대한 사업을 많이 벌였으나 나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다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기를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자의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그 밤에 늦도록 사업 구상을 하던 부자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죽고 만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최대의 적은 세속주의입니다. 환난과 핍박을 이겨낸 성도들도 세속주의 앞에는 힘없이 넘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좀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자는 유혹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믿되 적당히 믿어야지 지나치게 믿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적당히’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어느 처녀에게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집안에서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동쪽에 사는 총각은 부잣집 아들인데 얼굴이 너무 못생겼습니다. 서쪽에 사는 총각 생기기는 귀공자처럼 잘 생겼는데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처녀의 아버지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자, 이 처녀는 ‘동가식 서가숙 하겠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밥은 동쪽 집에 가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 가서 자겠다는 것이지요. 결혼 생활을 이 처녀가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한 번 선택하면 변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도 받고 세상의 사랑도 받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자의 마음가짐을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첫째로, 희생을 각오하고, 둘째로,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이지 말고, 셋째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세 가지 가르침을 명심하고 실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충실한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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