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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겔 47: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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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겔 47:5~12) 


지난 주 우리 교회는 창립 39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혜를 주셔서 30여명의 태신자를 보내 주셨고, 또 우리는 그들을 잘 섬겨야할 남다른 각오를 다지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도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고독과 좌절과 실망에 빠져 좌절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혀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나면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은 치유가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방황도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좋은 교회를 만나면 그곳에 내 영혼의 닻을 내리고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감격 있는 예배를 드리게 되고, 말씀을 들으며 심령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 앞에 내 삶 전체를 아낌없이 헌신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의 모습이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꿈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북한 선교에 대한 꿈을 가지고 한 주간 단동에서 출발하여 2000여 km 북녘 땅 접경 지역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 말할 수 없고 한 가지 느낀 것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의 산야가 왜 그렇게 다릅니까? 같은 산야인데 중국은 유월의 햇빛 속에 산야가 얼마나 우거지는지 모릅니다. 또 농사 역시 순조롭게 잘 경작되는데 왜 내 조국 북녘땅은 같은 햇살을 받고 같은 물줄기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민둥산이고 땅은 경작을 안 했는지 붉은 색 그대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이는 두만강 줄기를 타고 가서 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요일에서부터 금요일까지 2000여 km를 달리면서 본 북한은 모든 것을 다 잃은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장로님이 가져간 개량 옥수수도 북한에서만은 실패를 보았습니다. 얼마 전 북한 원자력 발전소 프로젝트인 케도에서 일하시고 돌아오신 우리 교회 김 집사님의 표현은 북한은 저주받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무엇을 심어도 자라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북한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김일성 부자의 우상숭배로 백성들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에스겔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2-5절을 보면 성소에서 스미어 흐르기 시작한 물이 점점 많아져 강을 이룬 장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발목이 잠기고 무릎에 오르고 허리에 차고 그러다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물이 점점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성소 문틈에서 스미어 흐르기 시작한 물은 미약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흐르는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흐르는 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고 힘있게 흐르더니 마침내 헤엄쳐도 건너기 힘든 강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물이 흐르는 곳마다 죽었던 것들이 살아나고 변화되는 심지어 죽음의 대명사로 알려진 사해바다 마져도 생명의 바다로 바뀌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강물이 흐르는 주변에 숲이 우거졌습니다. 진귀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이 벅찬 환상을 보고 견딜 수가 없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와 그발 강가의 수용소에서 꿈을 잃어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주전 597년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번째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만여 명의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에스겔의 나이는 약 25세 정도였습니다. 25살 젊음의 때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에스겔의 마음 속에는 온갖 의문과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신 것일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제사장 나라로 택하심을 받은 우리 민족이 이토록 참혹한 일들을 겪어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정말 전능하신 분일까? 정말 우리 조국 이스라엘은 영영히 멸망당하고 말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들이 에스겔 선지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포로로서 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 그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의 나이 30세에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지 5년 만에 칡 흙같이 어두운 한 밤에 어두움을 가르고 하늘이 열리며 한 줄기 빛이 절망하는 한 젊은 선지자 에스겔에게 찬란한 비전이, 이상이 내려옵니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실패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나약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 앞에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변화시켰던 이 위대한 비전, 이 찬란한 이상이 어느 날 그발 강가 포로 수용소에 있던 젊은 포로, 제사장의 후예였던 에스겔에게 임하자 그는 이 환상을 붙들고 새로운 새벽을 향해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에스겔이 보았던 성소에서 흐르는 이 생명의 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도대체 이 생수가 무엇이길래 이 물이 흐르는 곳마다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 아침!! 우리 역시 이 생수를 마시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생수는 요7:38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예수를 말씀하고 잇습니다. 요4장에 보면 한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아낙네의 눈길을 피해 뙤약볕이 내려 쬐이는 대낯에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러 오는 사건을 봅니다. 거기서 이 여인이 예수를 만납니다.

그녀는 인생의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서 살았지만, 그의 갈증이 해갈되기는커녕, 더 심해져 갑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타는 목마름은 세상의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요7:37절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방법으로 여러분들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갈증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생수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생수, 어떠한 갈증도 해결할 수 있는 생수, 죽은 생명도 살리는 성령의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수이신 예수를 만난 자마다 엄청난 변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그 이름 하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원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 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하여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을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 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그것이 어떤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에스겔에게 보여준 이 환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는 에스겔의 이 환상 속에서 우리가 도전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교회가 은혜와 진리로 날마다 충만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에스겔이 보았던 물은 조금씩 흐르는 물이었습니다. 2절 끝 부분에 보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똑똑 떨어지다.’ 또는 ‘졸졸 흐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성소로 말미암아 나오는 물은 아주 조금씩 스미어 나오는 물이었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흘러나온 생수는 제단을 한바퀴 돈 다음, 그 제단을 통과해서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이 물을 일천 척을 잴 때마다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이 발목에 차더니 무릎에 차더니 허리에 차더니 마침내 사람이 건너지 못할 정도로 물이 넘실거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전에서부터 시작된 생수가 우리의 발목만 살짝 적시는 강이 아니라, 우리가 헤엄쳐야만 건널 수 있을만큼 풍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수, 성령의 생수는 우리가 겨우 혀에 살짝 찍어 발라 맛만 보는 물이 아닙니다. 헤엄쳐야만 할 물, 우리를 능히 잠기게 하는 물, 넘치는 강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생수는 우리가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에도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지만, 이 땅에서 주님께서 준비하신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명만 얻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은혜의 강가에서 발목만 담그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더 깊은 성령의 생수를 맛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11절을 보십시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진펄'은 '진흙 수렁'을, '개펄'은 '물웅덩이'를 각각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두 사해 주변의 언덕에 위치한 진흙 웅덩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곧 우기에 바닷물이 넘치면 그 넘친 물이 계속 이 웅덩이 속에 고여 있게 됩니다. 따라서 그 고인 물들은 곧 증발하게 되며 그 지역은 남아 있는 소금기로 두텁게 덮이게 됩니다. 이 땅은 오히려 저주받은 땅으로 남아있는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불행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변은 다 사는데 나는 메말라갑니다. 거칠어갑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자신을 깊이 살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생수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첫째로, 생수는 생명을 살립니다.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립니다.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여러분 지금 본문의 배경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팔레스타인 지역입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폐한 사막지대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무가 심히 많아졌다고 합니다.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둘째로, 생수는 치료합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여기에서 말하는 바다는 사해 바다를 가리킵니다. 흘러내리는 생수로 인하여 죽어있는 바다, 아무 생물도 살지 않는 사해 바다가 다시 소성함을 얻는다고 합니다. 영어로 'heal', 치료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생수가 큰 강이 되어 흘러 들어가는 곳마다 모든 물이 치료됩니다. 또 9절을 보겠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죽었던 강물이 치료되어 정상적인 상태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라졌던 생물들이 다시 돌아옵니다. 사라졌던 수많은 물고기들이 다시 돌아와 헤엄치게 됩니다.

셋째로 생수는 열매맺게 합니다. 생수가 흘러가는 곳마다 각종 실과나무가 열매를 맺게 됩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생수가 큰 강이 되어 흘러 들어가는 곳마다 생물이 살아나고 고기가 심히 많아지고 식물이 되는 실과나무가 자란다고 했습니다. 나뭇잎이 시들지 아니하고 실과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물이 흘러 들어가면 치료만 임할 뿐 아니라 번영도 다가오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 생수의 강줄기를 세상으로 돌려 놓아야합니다. 생명을 살리고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세상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두 가지 유형의 인생이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는 주로 받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숙해 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주는 것,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찢고 피를 터뜨려 우리에게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나누어주신 것처럼 우리 교회도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이번 사역하는 현장에서 한 북한을 자주 다니시며 탈북자를 돕는 한 형제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 같이 간 우리 교단의 총회장님이 이런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그 분은 능력도 많으신데 왜 북조선에 들어가 지하 교회를 만들고 복음을 전하다 많은 형제들이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당신의 가까운 친척은 지금 복음을 전하다 적발이 되어 감옥에 갇혔다는 말만 들었을 뿐 생사를 모르는 이런 고난이 끝도 없이 오는데 때로 의심이 안 갑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옆에서 이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내심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의 이야기가 의외로 뜻밖이었습니다. "그래도 믿어야지요." 이는 고난이나 어려움이 와도 결코 주님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왜 그리 가슴이 찡한 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물질만 생기면 북한에 들어가 다 나누고 온답니다. 자신이 받은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니까 정말 자신의 삶 속에서 생수를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은혜의 강물이 흘러 넘치는 현장입니다. 주님에 은혜의 강물에 여러분의 문제를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은혜의 강물에 맡겨놓고 살아가십시오. 세상에서 발이 떨어지면 내가 망할 것 같지만 내가 놓으면, 내려놓을 때, 주님이 대신 잡아 주십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그곳에 성령의 생수가 흐를 것입니다. 생명이 살아날 것입니다. 치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과 같은 곳에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 성령의 생수가 흘러 수많은 나무들이 자라는 옥토와 같은 곳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죽은 사해바다와 같은 곳에 복음을 증거 할 때, 성령의 생수가 흘러 수많은 물고기 떼들이 몰려오는 것처럼 생명이 숨쉬는 곳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강 좌우에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끊이지 않고 실과를 맺는 것처럼 풍성한 삶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생수가 넘침으로 죽어 가는 세상을 살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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