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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되게 하시는 은혜 (엡 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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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시는 은혜 (엡 2:11~22)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먹던 자리에서 시작하신 성만찬의 의미를 유월절에서 찾아봅니다.   애굽을 탈출하던 밤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족들이 한 집에 모여 양과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었고 그 집의 문에는 어린 양의 피가 칠하여져 있었습니다.   그 밤에 온 애굽 땅은 바로의 궁궐에서부터 시작하여 맷돌을 가는 종의 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에 처음 난 생명들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른 히브리인들의 집은 그 죽음이 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그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으리라’(출12:13) 약속하신 그대로였습니다.  

   죽음의 사자들이 온 애굽을 치던 그 밤에 장자 죽음의 재앙을 만난 바로는 더 이상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붙들어 둘 수 없음을 깨닫고 그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온 집이 죽음의 공포로 떨며 부르짖던 그 밤에 히브리인들은 드디어 400여 년 동안 머물렀던 애굽을 떠나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으로의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밤이 애굽인들에게는 죽음의 밤이었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해방과 구원의 밤이었습니다.    한쪽은 죽음을 당하였지만 다른 한쪽은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애굽은 처음 태어난 자녀들을 잃은 슬픔으로 통곡하였지만, 이스라엘은 해방의 기쁨으로 그 땅을 훌훌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든 애굽을 떠나던 날 밤에 죽음의 천사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갔던 그 사건을 기억하고 예식을 행하라 명하셨습니다.   이름하여 유월절 예식입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을 따라 매년 1월14일부터 한 주간 동안 유월절, 다른 말로는 무교절을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애굽을 떠나던 밤에 하였던 것처럼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온 가족이 집에 모여 그 양을 불에 구워 누룩이 없는 떡과 쓴 나물과 함께 먹는 예식입니다.   훗날 자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 ‘이것은 유월절 제사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시고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음을 기념하는 것이다’(출12:27) 라고 가르치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지켰던 유월절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참여하는 성찬예식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인가 질문하던 것처럼 우리도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이 예식이 무슨 뜻인가 질문해 봅니다.    성찬식은 예수께서 유월절 음식을 드시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보여주시고 그 뜻을 알리신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예식을 행하므로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거룩한 예식입니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에게 유월절 음식을 먹을 준비를 하게 하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셨습니다.   떡을 들고 감사기도를 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 받아 먹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기도 하신 후 또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이니 너희가 다 받아 마시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날 밤에 행하셨던 이 예식은 훗날 예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 신약의 성도들이 예배하러 모일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성만찬 예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오늘날까지 교회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이 예식을 행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떡과 잔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약속의 음식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언약의 피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내가 죽음에서 건짐을 받게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이 음식을 먹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자녀들이 어른들에게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묻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주께서 남기신 말씀을 반복하여 전하면서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절인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의 참 주인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주님은 유월절 축제가 진행되는 기간에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심으로 그 피로 죄인들의 죽음을 대신하셨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간 것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피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넘어가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약속의 표시로 자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을 먹고 마시라 하셨습니다.    이제 구약의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유월절 예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이 되었고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주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예식을 행합니다.   

   본래 구약의 유월절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구별된 예식이었습니다.   이방인과 타국인들은 유월절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한 가지 예외 조건이 있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나 타국인일지라도 할례를 받은 사람은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이 되어 이스라엘 사람들과 똑 같은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할례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에 가입이 된다는 약속의 예식이었습니다.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표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있는 너그러운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따라 이방인도 타국인도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유월절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주가 나오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뜻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비로소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고 그의 십자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유월절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음식을 먹으며 구원을 감사드림 같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모여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예법대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어린 양의 피가 히브리인들에게는 구원의 표시요 보증이었던 것처럼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 그의 피는 곧 나의 죄를 씻으심이요 영원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구원의 은혜에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할례였다면, 주께서 주신 성찬에 동참하는 자격은 세례가 되었습니다.   할례는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속으로 들어온다는 믿음 고백을 전제로 했다면, 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죄가 사함을 입었다는 신앙고백을 전제로 합니다.   이 세례를 통해 전에 죄인으로 살던 나의 삶을 청산하고 나의 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는 주와 함께 다시 태어난 새 사람으로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곧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그 순간 우리의 죄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았고, 주께서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의 죄악된 옛 사람은 이미 죽고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연합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전에는 이방인이었고 할례가 없는 백성이며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밖에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한 시민이 되었고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분명하였습니다.   할례를 통한 혈통적 이스라엘만 언약의 공동체 안에 들어온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었고 그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아 언약의 백성으로 가입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국적도 혈통도 빈부와 노소의 차이도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를 건물로 비유할 때 그 건물의 기초석이 되고 연결 돌이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분을 통해 연결된 우리들이 교회를 이루어갑니다.   거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더 이상 없습니다.   혈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언약의 백성으로 들어가는 조건과 자격이 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을 따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적, 지리적, 율법적 차원에서 부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곧 교회이며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와 백성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었고 중간에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전에는 절대로 합할 수 없었던 둘이었지만 이제는 십자가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것이 성도의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에베소서 4장1절-6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서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이고 바른 모습입니다.   비록 교회들이 지역을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고, 교파로 구분이 되었을지라도 그 교회들의 머리가 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이심과 그분만 홀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고백하며 성령 안에서 교제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이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주 안에서 한 몸이며 한 가족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심은 바로 이 하나됨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무교병으로 성찬식을 하면서 저 나름대로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떡이나 빵을 사용하다가 이번에는 크랙커처럼 바싹 구워진 무교병을 사용하였는데 그 조각을 나눌 때마다 바삭바삭 부서지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그냥 크랙커가 잘라지는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몸이 부서지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괴롭고 듣기 싫었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 이처럼 부서졌기에 우리가 그 은혜로 하나가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와의 하나 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스런 독자를 우리 대신 형벌 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철폐하고 주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갈라진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죄 때문에 이리저리 갈라진 가정들과 교회들과 세상을 사랑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할 사명이 있는 오늘날 교회는 교파와 지역과 교리로 갈리고 나뉘어 서로 오가지 못할 사람들처럼 흩어진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고 좌파와 우파로 갈리며, 빈부의 차이로 사람을 차별하는 무지몽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고 서열을 매기지 않는 곳이 얼마나 될까요?    어딜 가나 사람이 모인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등급들, 눈에 확실하게 뜨이는 등급들이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등급이 교회 안까지 밀고 들어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셨는데, 우리는 다시 서로를 찢고 나눔으로 하나가 되게 하신 주의 은혜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가족 관계가 계급사회처럼 서열이 정해지고 생활수준과 학력과 지역 등으로 등급을 매겨 끼리끼리 모이면서 그것도 교회라고 내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구분은 너무도 단순합니다.   그분의 창조주 되심과 구원주 되심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다스림을 따라 그의 백성으로 사는가 아닌가?   믿음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왔는가 아닌가 여기에 서로 다름이 있을 뿐입니다.   주 안에서 높고 낮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가 된 공동체 속에 기꺼이 거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성전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연결된 그의 몸, 그의 집, 곧 교회입니다. 

   자고 나면 사고 소식과 재해 소식들,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의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이웃의 기쁨을 나의 기쁨처럼 함께 나누는 넉넉한 사랑이 아쉽고 그립습니다.   이웃의 재난을 보고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는 비정하고 냉혹한 사람들도 있고, 이웃의 고난을 정죄하고 그럼으로써 은근히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자랑거리로 삼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웃의 약점이 나의 이익을 배가시키는 기회가 되고 이웃의 불행이 오직 나만의 행복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고 만다면 그것만큼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의 마음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머물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라면 더 이상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새로운 사회는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는 그런 모임이 아닙니다.

   자유경쟁이라는 그럴듯한 구호를 내세워 남보다 더 많이 가진 재물과 더 많이 배운 지식과 더 많이 가진 정보를 이용하여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쌓아두면서 나만 잘살고 보자는 이기주의가 세상을 갈수록 거칠게 만듭니다.   이웃이 협력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내 것을 빼앗아 가고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쟁과 미움의 대상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삭막한 세상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와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봅시다.  주께서 마지막 밤에 떡과 잔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상기합시다.    서로 하나가 되라고 하신 것과 나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을 언제나 마음에 두고 삽시다.   자신을 나누어주시면서 생명을 살리고자 하셨던 그 은혜와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신 그 사랑을 닮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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