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거짓 회개와 참된 회개 (호 5:15 ~ 호 6:6)

  • 잡초 잡초
  • 692
  • 0

첨부 1


거짓 회개와 참된 회개 (호 5:15 ~ 호 6:6)
 
사람은 보는 눈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바라봅니다.  

 사람은 각자 보는 눈이 다릅니다. 똑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시각의 차이가 있어서 다른 결과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인간의 창의적인 사고와 창의적인 활동은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만약 모두가 다 동일하다면 인간 사회의 다원화된 모습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창조성을 주시면서도 사물을 다르게 보는 눈을 주셨습니다. 그리나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서로가 다르다고 비난했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와는 다르다고 정죄하면 삶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기심과 욕심이 첨부되면 적대적인 삶의 모습으로까지 나타납니다. 사람의 차이에 대해 쓴 글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자기본위적인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남이 타협하였으면 야합, 내가 타협하면 양보. 
남이 가난하면 게으른 탓, 내가 가난하면 사회구조의 모순 탓. 
남이 한 우물을 파면 우물 안 개구리, 내가 한 우물을 파면 나는 전문가. 
남이 말을 많이 하면 지성이 없는 수다, 내가 말을 많이 하면 다양한 화술.
남이 나서면 교만, 내가 나서면 개성.

신앙인들도 이기적인 생각과 교만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신앙인들은 어떨까요? 신앙인들도 비슷한 이기적인 생각과 교만함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글은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이 손바닥만한 성경책을 가져가면 경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내가 작은 성격을 가지고 다니면 나는 활동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남이 새벽기도에 못나오는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이고, 내가 새벽기도에 못나오는 이유는 워낙 낮에 사회적인 활동이 많기 때문이다. 
남이 손뼉 치며 찬송하는 것은 유치한 신앙이기 때문이고, 내가 손뼉 치며 찬송하는 것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남이 눈물로 기도하면 유별난 신앙이고, 내가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남이 기도를 길게 하면 주책이 없는 까닭이고, 내가 기도를 길게 하는 까닭은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남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은 기복신앙 때문이고, 내가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남이 헌금을 적게 하는 것은 인색하기 때문이고, 내가 헌금을 적게 하는 것은 하나님은 과부의 엽전 두 푼을 칭찬하셨기 때문이다. 
남이 교회를 비판하면 마귀 짓이고, 내가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지성인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남이 예배 시간에 늦으면 “5분만 일찍 출발하지” 내가 늦으면 “그래도 설교가 중요하지”
남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면 “아니 벌써?” 내가 직분을 받으면 “이제야 겨우” 
남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셨는데”(마 8:20) 내가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네 지경을 넓히리니”(출 34:24)라는 응답이다. 
남이 예배시간에 졸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눅 22:46)는 말씀이,  내가 졸면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기적으로 변형시켜 이해했습니다. 

  사람의 보는 눈과 입장이 다르면 엄청나게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본문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 차이가 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비슷하지만 내용이 다릅니다. 유사한 말인 것 같은데 결과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생각이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뜻과 생각을 이기적으로 변형하여 바꿔놓은 것에 대해서 야단치십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시대의 고난을 대변하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에게 예언합니다. 주전 722년경 앗수르 제국이 쳐들어와서 자기 민족이 멸망할 직전까지 예언을 하다가 인생을 끝마칩니다. 당시 시대는 사회적인 불의가 많았고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이 억압을 받았습니다. 나라에 공의와 정의가 사라졌고 종교적인 타락이 극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섬겼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나안의 신이였던 바알과 아세라신을 동시에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신을 섬기는 혼합 신앙이었습니다. 여호와 신과 바알 신을 구별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호세아 5:15)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을 지키지 않고 당신 계신 곳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이 죄를 뉘우칠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고난을 받거나 어려움 속에 들어가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할 때에야 하나님을 찾으며 간구하는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꾸짖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으로만 불성실한 회개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더니 회개할 마음을 품고 회개를 흉내 내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여호와께로 돌아갈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6:1)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것은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회개의 언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말씀을 곰곰이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들이 값싼 회개, 불성실한 회개, 거짓된 회개를 하려고 작정했구나. 너희가 입으로는 회개를 하지만 속의 생각은 다르구나. 입으로는 돌아가자고 하는데 마음은 불성실하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호세아 6:4)

  에브라임이라는 말은 북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남쪽은 유다로 북쪽은 이스라엘로 불렸습니다. 이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아,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주랴? 남쪽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구나. 아침에 구름이 사라지고 생기다 금방 사라지는 이슬처럼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고 하면서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모습이구나. 회개하는 줄 알았더니 금방 그 모습이 사라졌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더니 네 자신을 사랑하고 있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과소평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하더니 자기 죄를 감추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를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첫 번째 문제는 자신들의 죄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셔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죄를 고백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징계한 것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를 찢으셨습니까? 왜 우리를 때리셨습니까? 때리셨으면 다시 싸매주셔야지요. 우리를 찢으셨으면 다시 고쳐주셔야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아픔과 어려움을 주실 수가 있으세요? 고치고 치유해 주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자동적으로 회복시키고 축복해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를 자복하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를 고백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죄 고백 없이 편안함을 얻으려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 없이 즐거운 마음을 찾으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내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야 시작됩니다. 진정한 회복은 내  절망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야 시작됩니다. 우리는 때로 거짓된 죄책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죄를 알지 아니 하면 내가 네게 찾아올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된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거짓된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 6:2) 

  하나님 앞에 돌아가면 생명의 부활이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틀 후부터 우리를 살리시고, 셋째 날에는 일으키시고 생명의 축복을 주셔서 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죄악이 해결되지 않으면 축복해 줄 수가 없다. 너희가 고난 속에 들어가야 겨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더냐?” 
  하나님의 심판이 빛처럼 다가오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천박한 낙관주의, 천박한 기복주의, 천박한 축복주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 받겠다는 신앙의 모습을 꾸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호세아 6:5) 

  생명의 빛, 구원의 빛, 회개의 빛이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심판의 빛, 죽음의 빛, 꾸중과 징계의 빛이 나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을 기대하지만 저주가 있고, 생명을 기대하지만 죽음이 있고, 회복을 기대하지만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축복과 생명의 빛이 새벽 빛 같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역전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을 이용하고 천박한 낙관주의에 빠져 희롱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웰빙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성공과 행복을 무차별적으로 선포하는 낙관주의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복을 받는 기복주의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악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심판의 종교입니다. 무엇인가 행세한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의 종교입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되는 신앙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 있는 종교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죄악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지 않고 축복만 구하는 천박한 낙관주의가 있다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도 하며 아름다운 말로 예찬하지만 내 죄악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세 번째 문제는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알려고 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 6:3)

  이것은 너무나 멋지고 좋은 말이지만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알자고 했는데 오해하고 있구나. 율법만을 달달 외우고 있으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제물만 드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성전에 나와서 땅만 밟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하나님께서는 예배 형식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 형식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께서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제사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사모하는 마음을 동반하지 않고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연약한 모습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아뢰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이고 입으로만 하는 예배와 기도와 제물을 못 받겠다고 꾸중하십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12-13)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예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예물, 하나님을 사랑 하지 않는 찬양은 더 이상 예배와 예물과 찬양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르고 가증이 여기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단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의 자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열망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리기 위한 곳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며 나아갈 때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어려운 위기를 당면하고 있습니다. 소망교회 장로님께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것이지만 여기에 우리가 함께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닌 문제, 우리 정치와  사회가 지닌 문제 속에 우리 신앙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먼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지도자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음 없이 입으로 고백하면 고쳐주실 것이라는 천박한 낙관주의가 우리 교회와 지도자들 속에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먼저 추구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선 영적인 것이 선해야 하는데 그것을 바르게 추구하지 못한 죄악 된 모습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행하지 못한 죄악 된 모습이 없는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기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백성과 나라를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심으로 죄악을 회개하며 고백하지 않고 남의 탓을 하기 때문에, 내 죄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기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려움을 고백하면서 나라를 위해서, 사회와 백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주님 앞에 회개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세워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 앞에 회개했던 것을 죄송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서게 하옵소서. 이 나라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고, 주님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먼저 깨달은 자들부터 회개를 시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