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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 양식 (시 8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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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양식 (시 80:4~7)

눈물! 
눈물이란 뭘까?
갓난아기는 요람 안에서 울고 / 엄마는 노래를 부른다. 
신부는 흐느껴 울고 / 높은 언덕 위 / 교회의 신의 말씀 앞에/ 시인은 뺨을 타고 / 흐르는 눈물조차도 잊어버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울고만 있는 그대여 / 과거의 여느 사람들처럼 
눈물에 젖어 헤매나/ 찾는 건 무덤뿐 / 위를 보라 / 그대의 눈물은/ 곧 아래로 아래로 흘러 긴 강이 되리라/ 그리고 별과 해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그 모습 그대로 있으리. 
라고 시인 브리우닝은 소망의 눈물을 노래했습니다.

눈물을 실험실에서 분석하면 물이 90%, 소금이 7%, 단백질이 2%, 점액소가 1%라고 합니다. 이런 요소들을 가지고는 인간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눈물을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의 생존에 필요하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인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다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눈물을 양식으로 먹게 하신다고 비유적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양식은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식은 생사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식은 매일 먹어야 하고 규칙적으로 먹어야 하고 필요에 따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Ⅰ. 눈물 양식은 고난과 슬픔을 의미합니다. 

본문 80편 5절에 『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눈물 양식(레헴 디므아)이란 말은 구약성경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눈물을 양식처럼 먹게 하신다는 비유적 표현은 고난과 슬픔이 양식처럼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양식이 필수적 요소이듯이 고난과 슬픔을 삶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다량의 눈물에서의 다량(솨라쉬)이란 말은 '삼중의' 혹은 '어떤 것의 삼분의 일' 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민수기 15장 6-7절에 『 수양이면 소제로 고운 가루 한 에바 십분지 이에 기름 한 힌의 삼분지 일을 섞어 예비하고 전제로 포도주 한 힌의 삼분지 일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롭게 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사무엘하 18장 2절에 『 그 백성을 내어 보낼새 삼분지 일은 요압의 수하에, 삼분지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수하에 붙이고 삼분지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수하에 붙이고…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고난과 슬픔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30장 20절에 『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눈물 양식에 대하여 칼빈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큰 슬픔과 재난의 연속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정체는 필연적으로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말입니다. 

남조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바벨론 여러 강변의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 놓고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시온을 기억하고 울었습니다(시 137:1-3).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국가적인 환란을 통하여 눈물 양식을 먹였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 역모를 당했을 때 그는 왕궁에서 쫓겨 나와 감람산 길로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가면서 울었습니다(삼하 15:30). 

하나님은 다윗에게 눈물 양식을 먹였습니다. 그 후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울었습니다(삼하 18:33). 부자지간에 일어난 참혹한 가정적인 환란을 통하여 눈물 양식을 먹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찢겼다는 아들들의 보고를 받고 그 아들 요셉을 위하여 울었다고 했습니다(창 37:36). 

한나도 무자함으로 인하여 울었습니다(삼상 1:10). 히스기야는 자기가 병들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간구했습니다(사 38:1-8). 욥은 환란 중에 친구의 조롱을 받고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욥 16:20).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환란이 빚어내는 눈물로 양식을 삼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5-8절에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고 했습니다. 

프랑스 속담에 "징계하지 아니하는 자식은 소금에 절이지 아니한 생선과 같아서 부패한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환란의 눈물을 먹고 성장합니다. 눈물과 더불어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고 했습니다.(J. W Goethe) 
성도는 사랑의 매를 맞으면서 인내하고 연단을 받습니다. 

잠언 10장 17절에 『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고 했습니다. 

잠언 29장 17절에 『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고 했습니다. 

환란이 찾아올 때 기뻐서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귀히 여기고 인내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축복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징계의 채찍이 없으면 연단도 없습니다. 연단이 없으면 성장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은 눈물 양식입니다. 그 눈물 속에는 성장하는 온갖 영양분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Ⅱ. 눈물 양식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시편 42편 3절에 『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102편 9절에 『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사죄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눈물 양식을 먹여서 다시 살려 내십니다. 

유다 요시야 왕 18년에 서기관 사반을 성전에 보내어 백성들이 드린 것을 계수하고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대제사장 힐기야는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사반이 이것을 요시야 왕 앞에서 낭독했습니다. 이 때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었습니다(왕하 22:1-11).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이사야가 여 선지 훌다에게 갔을 때 하나님은 훌다를 통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열왕기하 22장 19절에 『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옷을 찢는 행위는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낮추는 겸손이며 통곡은 하나님 앞에 죄를 뉘우치는 회개입니다. 

다윗은 무죄한 신하 우리야를 암몬 사람의 손에 죽게 한 죄 때문에 울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을 때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 암 양 새끼를 취했다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그는 밤마다 침상이 젖도록 울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도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말갛게 씻기시며 깨끗이 해 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가 항상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원죄와 자범죄를 인정했습니다. 주의 얼굴을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시고 모든 죄악을 도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회복시키고 붙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피 흘린 죄에서 구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어떤 제사보다도 먼저 통회하는 마음과 상한 심령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시 51:1-19). 
그 눈물의 양식이 다윗을 살게 해 주었습니다. 그 눈물의 양식을 먹고 다윗은 성군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윌리암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er)는 "눈물의 샘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슬픔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눈물 속에는 신기한 영양분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모든 직분자들을 성장시키는 종합 영양분이 그 눈물 양식 속에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 성장시키는 영양분이 그 눈물 양식 속에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영양분이 그 눈물 양식 속에 있습니다. 

시세로(W. T. Cicero)는 "눈물만큼 빨리 마르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봐봐르는 "눈물은 탄식이며 동시에 위안이다. 그리고 열이며 동시에 진정하는 서늘함이다. 눈물은 또한 최고의 도피다"라고 했습니다. 
산타아나는 " 눈물을 흘려 보지 못한 청년은 야만스럽고 웃어보지 못한 노인은 천박하다"고 했습니다. 


Ⅲ. 눈물 양식은 성찬입니다. 

마가복음 14장 22-24절에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영원한 양식입니다. 예수는 영생하는 떡이요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주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주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사람이 이것을 먹고 마시면 영생을 얻습니다. 

1)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믿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16장 33절에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세상을 이기었다는 말은 죄를 이기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죄의 결과인 사망을 이기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양식처럼 필요한 것입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간헐적으로 있어도 안 되고 믿음은 지속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2) 인내의 소망의 확신으로 나타납니다(소망).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이생의 제한된 것에 불과하다면 그 삶은 허무하고 결국 불신자보다 불쌍한 존재로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궁극적으로 내세의 소망 가운데 금세의 받을 축복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시편 42편 23절에 『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인내와 소망은 우리의 양식입니다. 주님을 고대하는 노래 가운데도 "밤이나 낮이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를 고대합니다."라고 했습니다. 

3) 사명 수행에 따르는 사랑의 수고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에 『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목회지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눈물로 양식을 삼고 감격의 눈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이 베스도 앞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때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 바울아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라고 하자 바울이 베스도에게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행 26:24-25). 

디모데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의 눈물로 양식을 삼고 보은의 눈물로 그의 목회 전선에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를 부인했지만 결국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눈물로 양식을 삼고 순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젖 나는 소 두 마리가 집에 새끼를 두고 벧세메스로 갈 때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울면서 갔습니다. 마침내 암소는 자기가 끌고 온 수레 위에 올려져 번제로 드려지고 말았습니다(삼상 6:10-16). 

사명은 의무보다 더 중한 것입니다. 사명은 다른 것으로 대신할 대용품이 없습니다. 사명은 오로지 사명 길 하나 뿐입니다. 사명은 힘 드는 것입니다. 사명은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9:16). 
그러나 그리스도의 양식을 공급 받은 자는 감당할 수 없이 방출되는 보은의 에너지로 인하여 능히 감당해 갈 수 있습니다.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고 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사랑의 양식을 제대로 먹은 사람입니다. 
사명 수행의 거룩하고 신령한 광장이 오늘 갈보리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명 받은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곳이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하는 곳입니다. 


Ⅳ. 눈물 양식은 그리스도인의 일상(日常)입니다. 

시편 42편 3절에 『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불신자들이 조롱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세상을 향하여 슬픔의 눈물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갑니다. 

시편 56편 8절에 『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눈물 흘리는 일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흘렸던 눈물을 씻음 받고 위로받는 곳은 천국뿐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7절에 『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고 했습니다.

이사야 25장 8절에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사야 35장 10절에 『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5장 19절에 『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 살 동안 눈물의 삶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49절에 『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라고 했습니다.

시편 119편 136절에 『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울었습니다.
예레미야 9장 1절에 『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천국 가는 성도는 눈물의 성도입니다. 천국에는 눈물의 보상이 있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 눈물이 없는 성도는 무엇으로 보상을 받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했습니다.
지옥은 살았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육신의 안일을 추구하는 자의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고난을 받는 자의 것입니다(눅 16:25).

빌립보서 1장 29절에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부모형제 골육친지들에게 복음전할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 간 가족만 생각하고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난 가족을 생각하며 슬픔으로 나날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구원받은데 대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은 가족이 구원받은데 대한 감사가 그 슬픔을 삼키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믿지 않고 지옥 간 우리의 골육들이 간절히 구하는 소원을 들어 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지옥 간 골육들의 소원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자기골육이 자신과 같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처럼 믿지 않고 있다가 지옥에 오지 말고 제발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눅 16:19-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눈물을 예찬했습니다. 
눈물은 궁중에 갇힌 / 사랑 잃은 나인(內人)에 의해 뿌려지고 눈물은 강가에서 / 임 실은 배를 보낸 여인(女人)에 의해 뿌려지고/ 눈물은 상강(湘江)에서 / 임을 잃은 아황(娥皇)에 의해 대(竹)에 뿌려지고/ 눈물은 현수비(峴首碑)앞에서/ 어진 백성들에 의해 뿌려지고/ 눈물은 사막으로 끌려간 / 가인(佳人)에 의해 뿌려지고/ 그러나 오늘 아침 / 다릿가에 귀인(貴人)보내고/ 홀로 처진 서생(書生)의 눈물 / 그만은 못하리

우리의 눈물은 이러한 예찬의 눈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한나의 눈물은 사무엘을 받았습니다(삼상 1:1-20). 

예수께서 마리아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그 동네에 한 죄인인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뒤로 왔습니다. 그녀는 그 발 앞에 엎드려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녀의 눈물의 회개는 죄 용서와 구원의 평안을 가져왔습니다(눅 7:36-50). 

눈물로 구할찌라도 회개할 기회를 놓친 자는 축복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7절에 『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눈물은 교회라고 하는 방주를 띄우는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눈물은 고상한 언어이자 말하지 않는 비탄의 언어라고 했습니다. 눈물은 최고의 설득력입니다. 스프곤(C. H. Spurgeon)은 "천국에는 마른 눈으로 들어가지 못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눈물을 씻어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 한마디는 많은 것이 생략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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