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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두 가지 선택 (렘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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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렘 17 : 5 - 8
제 목 : 인생의 두 가지 선택

인생은 항상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것 중에서, 하나를 내가 고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언제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진리 아니면 거짓입니다.  옳은 것  아니면 그른 것입니다.   생명이 아니면, 사망인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 둘 중에 하나를, 우리는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 선택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나타난 결과가 있지요? 그 결과가 무엇으로 인한 결과입니까?  이전에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지나간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앞으로 내 인생의 장래에, 지금 보다 더 나은 결과를,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부터라도, 내가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항상 옳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참 쉬운 일이 아니지요.  왜입니까?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예요.  옳고 그름에 대한,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나는 분명 옳은 일인 줄 알고 행하는데, 나중에 보면,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일 때가 있습니다.  나는 분명 이 일이 선한 일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면,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는 악한 일이 되어질 때가 있다는 겁니다.    

또 저 일은 옳지 못해,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저 일에 나는 동조 못해!!  그래서 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이 옳고,   그 일이 선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이런 일들이 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인간의 판단은, 절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판단하고,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내 인생에,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  
그 기준은, 언제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어질 때, 우리는 항상 바른 판단을 하게 되고, 그래서 실패함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 !"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직도 고민되십니까?   그래서 김수희가 이런 노래를 불렀잖아요.  “선택의 귀로에 서서, 고민을 하지 말아요.  어차피 선택해야 할 거면, 말씀을 선택하세요.”  

이 노래의 제목이 뭐예요?   멍에..    그래서 주님도 말씀하잖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거운 것 같고, 때로는 부담이 될 것 같고, 또 그 말씀을   따르면, 내 모든 것 포기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입니다.  추측일 뿐인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간 성도들은, 이런 생각하지 하지 않습니다. 
왜요?  무거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순종해서 져 보니까, 안 무겁습니다. 
부담이 될 줄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 보니까, 별로 부담이 안 됩니다. 
내 모든 것 다 포기해야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나님 말씀 따라 헌신하니까, 더 남고 풍성해 집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해 보지도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계산기 두드리고 있으니 답이 안 나오지요?  그래서 손해 볼 줄 알고, 하나님 말씀을 따를 엄두도 못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생은, 어떤 인생이 됩니까?  별 볼일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인생에 항상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선택하고 따를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게 되면, 이 선택에 대한,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선택은 성도들의 자유지만, 그 선택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분명하게, 그 인생 가운데 나타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의 인생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데, 자신이 선택한 것에 따라 장차 그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아주 자세히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도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받는 인생이 될 수가 있고, 축복받은 인생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징계 받는 인생은 어떤 것이고, 또 축복받은 인생은 또 어떤 것인가?  

오늘 본문에 보면, 예레미야는 이 두 가지의 삶을, 두 개의 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이 있다는 것이지요.

6절 말씀을 보세요.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사막의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입니다.  키가 작고, 가지만 앙상한 나무이지요.  바늘과 같은 잎이 많기 때문에, “벌거벗은 나무” 라고도 불리는 나무입니다.  또 이 나무는, 열매를 맺질 못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선택한 인생,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아니하고, 세상의 허황된 소리를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이와 같은 나무라는 것입니다.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 물이 없는 사막에서, 간신히 홀로 살아남은 메마른 나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런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 이런 인생은 세상의 불신자들이 살아가는 인생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세상의 불신자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대상도, 이방인들이 아닌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이런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오늘 본문에 말하는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은, 결국 어떻게 되어질까? 
어떤 현상이 인생에 나타나게 되는가?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내 인생이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인생의 주변의 상황이, 점차 삭막한 광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예요.  

여러분,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기 힘든 척박한 땅입니다.  물이 메말라 있기 때문에, 살아남은 얼마 되지 않는 식물들도, 최소한의 수분만을 머금고 살아갑니다.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래서 주변에는, 동물이나 사람들이 살질 않습니다.  그저 메마른 풀들만이 황량하게 엉켜서 돌아다닐 뿐입니다.  내 인생이 결국에는, 이와 같이 변하게 되어진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수 23 : 15 - 16절 말씀을 보세요.  신앙생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인생에 어떠한 징계를 내리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일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질 않고, 여전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인생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이처럼 의도적으로  틀어 버리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때 그 인생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잘 나가던 사업이, 세상 경기의 악재를 만나 갑자기 곤두박질칩니다.  
호의적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엔가 내게 등을 돌리고, 모른 채 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물질도 잃고, 사람도 잃고, 이제는 외로이 홀로 남은 가운데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질 때, 그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가정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순간엔가 가정의 화목이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서로간의 사랑과 신뢰가 깨어지는 가운데, 분쟁이 있고 불화가 생기는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경영하는 사업, 이는 내 인생을 받쳐주는 두 기둥과 같은 것 아닙니까?  가정이 평안해야, 밖에서 하는 일에 힘이 나는 것입니다.  또 사업이 잘 돼야, 가정에 필요를 채우면서, 근심 없이 평안하게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성도들에게는, 이 두 기둥이 흔들리지 않도록 늘 붙잡아 주시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있으면서도, 끝내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그 붙잡은 손길을 하나님이 놓아 버리십니다.  
그래서 가정이 흔들리고, 직장과 사업이 갑자기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급작스럽게 돌변한 상황에 당황해하면서, 인생에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이런 징계가 계속 됨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이키지를 않는다면, 하나님의 아예 그 인생에 대해 무관심하게 대처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생은, 회복 불가능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6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무슨 말입니까? 
이제 그 인생에는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이 다시는 임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메마른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이와 같은 모습이, 우리 인생의 모습이라면,    그 인생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인생이겠습니까?   
왜 성도들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가질 못하고, 이런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이와 같이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5절 말씀에, 그 이유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더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의 도움을 더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면, 마땅히 하나님께 나아와 더 예배하며, 더 기도하며,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사람들을 더 의지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께 버림 받게 되어, 인생이 이처럼 사막의 가시떨기나무와 같이, 변하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을 떠나, 이런 불행한 인생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이런 메마른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다면, 이 시간을 통해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렘 5 : 24절에 보면,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라고 했습니다.  이른 비는, 농사꾼들이 씨를 뿌리고, 경작할 수 있도록 내려 주시는 은혜의 단비입니다.  그러면 늦은 비는 무엇입니까?   심은 농작물들이 마르지 않도록, 자라가는 과정과 말미에 내려 주시는 은혜의 단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내려 주시는 줄 믿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잘 할 수 있도록, 이른 비를 내려 주시지만, 또 늦은 비를 내려 주셔서, 늦게라도 회개하며 돌이키는 성도들에게, 다시금 회복하고, 자랄 수 있는 은혜의 기회도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도 거절하고 놓쳐버린다면, 좀처럼 그 기회가 다시 오질 않습니다.   그 때부터는, 하나님이 침묵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등한시 하는 가운데, 때를 따라 내려 주시는 이른 비를  놓쳤다면, 이제라도 하나님이 늦은 비를 내려 주실 때에, 기회를 놓치지 말고, 얼른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 그 은혜의 단비를 맞으며, 이제까지 메마른 나의 심령과, 메마른 나의 모든 인생의 환경들을, 다시금 소생케 하는 노력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언제가 우리에게 늦은 비가 내려지는 때입니까?  
언제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실 때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시간이, 늦은 비가 내리는 때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이 기도회의 시간이, 우리 인생의 갈급한 문제들이 해결 받게 되는, 구원의 때요, 은혜의 때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은혜의 단비를, 오늘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깊이 머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늦은 비를 맞음으로, 여러분의 메마른 인생에도 다시금 꽃이 피고, 또 열매도 풍성하게 맺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인생의 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앞에서 살펴 본, 사막에 심겨진 메마른 나무와는 달리, 물가에 잘 심기운 푸른 나무와 같은 인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한결같이 신앙이 변함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7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복을 받을 것이라.  

메마른 사막 위에서 앙상하게 모습만 드러내 보이는,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물가에 대고, 항상 수분을 공급받으며 사시사철 푸르른 잎을 내는, 또 때를 따라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싱싱한 나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 봅시다.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얼마나 멋진 축복입니까?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흥분되게 하는 축복입니까?   이런 멋지고 귀한 인생, 이런 축복된 인생, 저와 여러분 모두가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때를 따라 내려 주시는 이른 비를 맞으며, 또 늦은 비도 어김없이 맞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축복이 나타나게 되는가? 
두 가지의 축복이, 신실한 성도들의 인생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축복이 무엇이냐?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인생의 뿌리가, 수원에 깊이 내려져있기 때문에, 가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아버지가 재벌 기업의 회장이라고 한다면, 경제가 불황이라고 해서 염려 하겠습니까?  남들은 다 죽고 사네, 염려하고 난리를 쳐도, 별로 걱정이 되질 않습니다.   왜?  자기 아버지가 재벌이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후원해 주기 때문에, 별로 염려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사람들은 에너지가 고갈되어 간다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도 가만히 보면, 에너지가 없는 나라 국민들이나 하는 염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동의 산유국을 보세요.  그들이 어디 에너지 고갈을 염려하며 살아갑니까?  그 나라 사람들은, 이런 것 염려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수 백년을 더 쓸 자원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사람들도 수백 년 지나면, 결국 고갈 될 것 아니냐?  이런 무식한 소리 하는 사람,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수백 년이 지나면,  우리가 석유 쓰고 있겠습니까?  벌써 대체 에너지가 개발되어서, 그 에너지 쓰지, 석유 안 씁니다.   그러면 산유국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것 아니냐?  
또 이런 무식한 소리 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이때 까지 석유 판 돈으로, 뭐 하겠습니까?  그런 날이 닥칠 때, 대체 에너지를 만들 연구비로 쓰고, 그래서 그들이 결국에는 또 대체 에너지  생산국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 때까지 석유 사서 쓰는 나라 사람들은, 또 그 때 가서도, 대체 에너지 사서 써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죽네 사네 하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자원이 없어서, 항상 남의 나라 자원 사서 쓰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매번 값을 치루고 사야 하니, 경제적인 부담이 생기고, 그래서 죽네 사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 놔도 걱정인 것입니다.  언제 자원이 떨어질까?  언제 또 값이 오를까?  예측 불허의 정세에, 늘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잘 하는 성도들에게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물가에 잘  심기운 나무와 같은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예측불허의 인생이, 결코 근심거리가 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불볕더위와 같은 환란 속에서, 가물어 죽겠다고 소리치는 상황에서도,  모두가 굶주려 죽는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해 그 신앙이 변치 않는 신실한 믿음의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 말씀 붙잡고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절대 망하지 않고 사는 역사가, 오히려 흥하게 되고, 더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또, 신실한 신앙의 성도들이 받는 두 번째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 잎이 청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청청하다는 말은, “푸르고 또 푸르러서” 항상 싱싱하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나고 계속해서 그 잎이 유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늘 새롭게 새로운 잎이 돋아나, 싱그러운 푸르름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간증거리가 한번만으로 그쳐서, 지금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할 것이 없는 그런 신앙의 삶이 아니라, 날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날마다 주님의 베푸신 기이한 일들을 새롭게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간증거리가 풍성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또 예배할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생겨납니다.  찬양할 때마다, 새로운 기쁨이 넘쳐납니다.  
성도들과 교제할 때마다, 늘 새로운 사랑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한없이 기쁘고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에서 살펴본, 앙상하고 메마른 사막의 떨기나무와   얼마나 좋은 대조가 됩니까?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후자의 인생, 사막의 가시떨기 나무와 같은 인생이 아닌, 물가에 뿌리를 내리고,   잘 심기워진 사시사철 푸르른 잎을 자랑하는, 싱싱한 나무가 되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스스로의 신앙을 살펴보시고, 이른 비를 맞지 못해, 현재 메마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고 한다면, 이 시간 늦은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 은혜 앞에, 다시금 엎드리어 기도하면서,  내 인생 가운데 잃어버린 기쁨과 감격, 감사를 회복하시고, 이후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신앙으로, 오직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남은 이 한해와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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