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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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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눅 15:11~24) 

◈ 샘이라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여인과의 사이에 우연한 관계로, 여자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자기가 좋아하는 비틀즈 맴버의 이름을 따서 루시 다이아몬드 다슨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퇴원을 하다가 엄마가 아버지와 갓난 아이를 남겨둔 채 도망쳐 버립니다. 
졸지에 엄마 없는 아이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키워야 할 지 모릅니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는 아이의 소리 때문에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가 와서 아이를 돌보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를 끔찍하게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에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주 목요일 저녁이 되면 
비디오를 보기 위해 어김없이 샘의 집에 찾아옵니다. 8년을 한 번도 어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긴 다음 샘은 비디오 보는 날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샘은 커피 전문점에서 테이블을 닦고 정리하는 단순 노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앞으로 매고 일을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 모자란 아버지의 행복이었습니다. 
루시는 아버지와는 아주 다르게 영리하게 자랍니다. 
아이가 자라서 아버지보다 더 똑똑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지능을 뛰어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루시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빠가 이렇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야 사고야?"
이 질문에 아버지는 답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그때에 루시는 "괜찮아~ 아빠! 미안해하지마 그래도 난 행운아야! 딴 아빠들은 같이 놀아주지 않잖아!"
"그래 우린 운이 좋아~ 그치!"

이렇게 바보 친구들과 이웃집 아줌마의 도움 등으로 아이는 자랍니다. 
아이가 자라서 이제는 바보 아버지를 가르칩니다. 아버지가 읽기 어려운 책을 아이가 읽어줍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경찰에 알려졌고, 경찰은 아버지의 정신연령이 7살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경찰은 아버지와 딸을 격리 보호시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재판을 시작합니다. 
아이는 임시 부모의 집에 맡겨집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2번 2시간만 아이 방문을 허락합니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못 견디는 아빠는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방문하여 아이와 지냅니다.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임시 부모의 집 근처로 이사를 합니다. 
매일 저녁 아이와 아무도 모르게 만납니다. 이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임시 어머니는 좀 모자란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합니다. 
자기가 돌보는 것보다 아버지가 돌보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은 아이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아이 엠 샘이라는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는 정신연령 7살의 바보 아버지의 큰 사랑이, 자녀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것은 부모의 지적능력이 아니라 가슴속에 담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영화입니다. 

◈ 어린 자녀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수퍼맨‘입니다. 아버지는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부서진 장난감도 아버지 손에만 가면 고쳐집니다. 못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바쁜 존재인가를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일곱 살쯤 되면 아버지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버립니다. 
학교에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산수 문제를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아빠도 모르는 게 있나 보다.' '선생님은 다 아는데.' 이 때부터 비교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점점 아버지가 아니어도 해결되는 일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10대가 되면 아버지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할 줄 아는 일이란 고함을 지르고 벌을 주는 일이 고작입니다. 
"그런 것은 선생님한테 물어 봐/ 아직 그것도 몰라! 도대체 학교에서 뭘 배웠니?" 
아이는 비로소 아버지란 존재가 얼마나 초라한지 알며 실망하게 됩니다. 
18살 소년에게 아버지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존경의 대상도 아닙니다. 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는 튀어나오고 머리는 벗겨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만 하는 존재입니다. 

성년이 된 자녀에게 아버지는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맙니다. 
어느 날 가끔 씩 생각이 날 뿐입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서 키우다 보면 문득 "내가 영락없이 아버지를 닮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아버지 모습입니다. 갈수록 아버지의 자리는 없어집니다. 

저는 아버지의 위치를 비하시키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아버지의 권위는 분명히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오늘 저는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아버지의 사랑을 새롭게 느끼면 우리의 삶에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 15장의 이야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각종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함께 식사하시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비난하였습니다.(2)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음식도 권하고 함께 먹으며, 즐거운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죄인들을 찾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통해 한 영혼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죄인들과 교제하는 것은 비난하며 불평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기뻐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 아주 좋은 부자 아버지를 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를 주는 그리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서, 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 중에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분깃은 상속받을 유산입니다. 아버지가 죽기 직전이나 죽고 난 다음 나누어주는 것인데 아직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버릇없는 무례한 요구입니다. 엄청난 불효입니다. 정말 못난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며 심하게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인격적인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 집을 떠난 아들의 모습은 세 단어로 설명됩니다. 

1. 허랑방탕 - 더 이상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하고 싶은 것 다 했습니다. 방탕하게 아버지의 귀한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2. 흉년 - 따르던 친구들도 다 떠났습니다. 그래서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14) 
3. 붙여사니 -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어서 살 수밖에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돼지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돼지보다 못한 참으로 비참한 상태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 아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 얼마나 기막힌 탄식입니까? 
그는 굶어 죽게 되자 비로소 아버지 집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도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모든 것이 넉넉하였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도 풍족합니다. 사랑도 넘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원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배반하고 아버지를 떠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죄인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18절에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 그는 죄인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인이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인가, 자격 없는 죄인인가 발견케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두 손들고 겸손한 마음으로 아버지 집에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시는 것도 큰 은혜로 알고 살고자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는 믿음으로 허랑 방탕한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더러운 돼지우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없이 자기 나름대로 살던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냄새나는 옷을 갈아입거나 더러운 몸을 씻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냄새나고 누더기 옷 입은 그대로 아버지 집으로 나아갔습니다. 

◈ 20절 하(下)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누더기 옷을 입고 거지 중에 상거지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장면은 아버지가 그 동안 집나간 아들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뒤 한 번도 다리를 뻗고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혹시 돌아올 아들을 위해 대문도 잠그지 않았습니다. 불도 끄지 않았습니다. 
이 철부지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안타까움과 근심으로 하루하루 주름살이 늘어만 갔습니다. 
아버지는 늘 기도하며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둘째가 좋아하는 음식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과 저녁 기도시간에 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소문이 들려옵니다. 이렇게 아픈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눈이 쇠하도록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저 멀리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걸어오는 한 거지를 보았습니다.
한 눈에 그가 바로 그토록 기다리던 자기 아들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달려갑니다. 

②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기며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원문은 입을 많이 맞추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숨막힐 정도로 끌어안다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체면불구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달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위엄이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방탕하게 다 말아먹고 돼지우리에서 뒹굴다 온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달려가서 그의 목을 안고 그 더러운 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③ 아버지의 사랑은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지은 죄로 아버지를 뵈울 면목이 없어 아버지께 죄를 고백하고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더기를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더러운 과거를 기억치 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아들의 더러운 과거나 누더기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가락지는 그를 권위의 자리로 회복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장차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후사가 된 것입니다.
또 발에 신도 신겼습니다. 신은 그의 위치를 하인에서 아들의 위치로 회복시키고 높임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유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④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그의 아들의 돌아옴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우선 배고픈 아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회복시켜주었습니다. 역시 아버지의 집은 풍성한 곳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⑤ 아버지는 아들의 새로운 삶을 선포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 얼마나 위대한 아버지의 사랑입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날의 잘못을 조금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본래의 아들로 대우하여 주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냄새나고 추한 죄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뜨겁게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걸어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발견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달려오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죄로 인해 상하고 찢긴 영혼의 모든 상처를 말끔히 씻고도 남았습니다. 
이것이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실 뿐 아니라 아들로 후대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 사함을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주십니다. 아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늘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아들을 잃어버리면 가장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부모입니다. 
자식이 밥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애가 타는 쪽은 부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면 우리의 믿음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그러나 이런 사랑의 행동을 다르게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의 눈입니다. 큰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이런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망령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동생을 아들로 인정했지만 형은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설득으로 이 비유는 끝이 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는 예수님께서 영접하시는 죄인과 세리들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비로운 아버지는 예수님의 용서와 영접, 자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큰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축하 잔치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교제하는 식탁이 됩니다. 

큰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는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큰 아들 눈에 비친 아버지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자기는 여러 해동 안 아버지를 잘 순종하여 섬겼습니다. 한 번도 명령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에게 아버지는 염소 한 마리도 준 적이 없습니다. 
자기에게는 그렇게 엄격한 아버지가 집을 나가서 귀한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다 달린 아들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축하 잔치를 벌이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감정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구원관에는 보상주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했던 종교지도자들은 큰 아들과 같은 식으로 구원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구원은 자신들이 행한 순종과 선한 행위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보상이었습니다. 그들만 구원받을 자격이 있고 죄인과 세리들은 절대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구원은 인간의 자격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하심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격은 필요없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드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믿음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잘못된 구원관을 포기하고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도전이 됩니다. 
구원은 우리가 행한 옳은 행동이나 의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조건없이 죄인을 용서하고 자신의 아들로 영접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하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가 행하는 어떤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복음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무자격자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의 근거하여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3:16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했고, 3:17에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는 조건은 너무 간단합니다. 너무나 파격적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1억씩 내야 한다든지, 한번 죄사함 받기 위해 10억씩을 내야 한다면 재벌만 죄사함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식축구선수 O.J 심슨은 백인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일반 여론이나 심증은 그가 범인이라는게 중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그동안 번 돈을 변호사 비용으로 다 내놓고 최고의 변호사들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죄사함 받기 위해 동원할 돈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믿음 하나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141장 찬송시를 쓴 크로스비는 아이작 왓츠의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는 찬송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작은 감사에는 익숙하지만 큰 감사에는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커피 한 잔, 냉면 한 그릇, 작은 선물을 받고 난 다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합니다만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해선 잊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 기억도 다 못하는 태산 같은 죄,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무서운 죄, 
쌓이고 쌓여서 태산보다 더 큰 죄를 값없이, 공로없이 용서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감사합시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남을 죽여서 자신을 살리고자 하지만 예수는 자신을 죽여 다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살리되 자신은 죽는 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의 길입니다. 
교회 안에서 비평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일꾼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성도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귀한 사역에 기쁨으로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심인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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