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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 사랑하심(1)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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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사랑하심(1) (롬 8:31~39)

2009년도 총회 교육국에서 발행하는 가정예배서 집필 원고 시한 마감이 5월 30일까지 인데 다음 주에는 사역이 더 분주하게 많을 것 같아서 지난 주간에 집필을 마치고 총회로 보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 제가 맡은 부분은 요셉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창세기 37장 이하이었기에 이번에 요셉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심도 있게 성경을 통하여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개인적으로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요셉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갖게 되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요셉이 어려서 꿈을 꾸었는데 그는 그 꿈을 꾸었던 내용을 믿고 살았기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의 사람이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주일학교 시절부터 배웠습니다.
그런데 요셉 스스로가 자신의 꾼 꿈을 붙들었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음을 이번에 가정예배서를 집필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13년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요셉이 예언한 대로 7년 동안의 대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20년이 지났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찾아온 것은 7년 대 흉년의 시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시기적으로 짧게 잡아도 2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지난 뒤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바로 20년이 훨씬 지난 뒤인 그 때에 요셉의 형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때의 내용을 창 42:9절에서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찾아와서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보고 그 때까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어렸을 때 자신의 꾸었던 꿈을 그 때 비로소 본인도 생각하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동안 갖고 있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셉이 꾸었던 꿈을 붙들고 있었기에 애굽의 총리로 등극하게 되었다는 그릇된 관념을 이제는 올바르게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노예에서 일약 애굽의 총리로 등극하는 놀라운 복의 주인공이 되었던 요셉,
그는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러한 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등극하게 된 것은 꿈 때문이 아니라 요셉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요셉은 억울하게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아버지를 잃고 전혀 알지 못하는 타국에서 노예가 되어 앞날이 불투명한 노예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가 막힌 현실 앞에서 요셉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창 39:2-3절에서 노예로 있던 요셉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왜 함께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집요한 유혹 앞에서 고백한 요셉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인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 39:9절입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백성들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의 은혜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오늘 더 깊이 나누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요셉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시 이것도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고백할 수 없는 중요한 은혜입니다.
무엇입니까?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요셉이었기에 감옥에서 또 다른 하나님의 계획 하에서 같이 감옥에 투옥된 바로의 심복들이었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의 꿈을 해석하여 주면서 술 맡은 자가 방면이 될 때 부탁했던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창 40:14)라는 청을 술 맡은 관원장이 기억하지 못하고 잊고 있었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았기에 만 2년 동안을 감옥에서 또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는 요셉과 같은 심정으로 주님을 사랑한 또 다른 한 사람이 소개되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언어적인 표현으로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하나님의 사랑의 정의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주일에 본문을 중심으로 두 가지를 나누고 다음 주에 나머지 두 가지를 나누면서 로마서 8장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본문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NIV 영어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What, then, shall we say in response to this?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대항할 수 없게 하시는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 중의 한 명입니다.
바울을 생각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그토록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사람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가 자신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로마서 강해를 시작할 때 그의 천명한 고백을 들어보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는 목적이었고 로마에 들어가서 예수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은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이렇게 로마로 들어가기를 학수고대하던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드디어 로마에 들어가게 됨을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은 아마도 바울의 로마행을 설명하는 성경 중의 최고의 절정일 것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로마로 들어가는 일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는 어간 밀레도 항구에 도착을 해서 1,2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운 교회인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기쁨으로 만났습니다.
에베소교회와 밀레도 항구는 직선거리로 약 54KM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이 만류를 합니다.
죽음의 위기를 알고 있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바울을 막은 것입니다.

그런데 전술한대로 로마에 들어가는 것을 마지막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던 바울이 만류하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렇게 설교를 합니다.

내가 에베소에 와서 여러분을 어떻게 섬겼는지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겸손으로 섬겼습니다.
눈물로 섬겼습니다.
모든 유대인 간계와 시험을 참았습니다.
그리고 쉼이 없이 여러분에게 예수를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행 20:22-24절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어지는 설교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 20:31-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이 고백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는 주님에게 받은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로 올라가서 가이사 앞에 서서 예수를 증언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 사역을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중보하여 기도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유대인들의 엄청난 핍박으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어지는 사도행전을 통해 아는 것처럼 바울은 고난을 당합니다.
죄인으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신분으로 순교 여행인 바울로 떠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런 일은 해석이 안 됩니다.

오래 전에 옥한흠 목사께서 사랑의 교회를 5년 먼저 은퇴하고 지금의 오정현목사에게 계대를 넘길 때 조선일보에 ‘한국교회의 신선한 충격’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완벽한 체제를 가진 교회를 담임목사가 조기 은퇴하여 물러나는 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격찬하였는데 바울은 가장 완벽한 추앙의 시기에 순교의 선택을 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눈물겨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안 바울은 이렇게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 뿐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주님이 자기를 사랑한 것을 알았기에 담대히 고백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7-10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적어도 이 사랑을 알았던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기념비적인 고백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저의 집에 가면 로마서 8:31절의 말씀을 담은 대형액자가 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집사님 한 분이 떠나기 전에 선물로 주신 액자인데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소중히 여기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할 때가 1980년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을 하자마자 신군부의 또 다른 독재로 인해서 학교는 휴교령이 떨어지고 대학에 들어와서 품었던 꿈들은 사라지는 것 같았고 희망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앙적인 갈등은 더욱 심해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더욱 세상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어느 날 출신교회 선배로부터 편지하나가 배달되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강덕선생을 주목하여 보고 계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냥 식상한 모습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어간 글의 맨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What, then, shall we say in response to this? If God is for Lee, who can be against Lee”(Rom 8:31)

그 날 이 글귀를 읽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도 신앙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저에게 그날 이 말씀은 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원의 확신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서원을 하였고 일주일동안의 철야 기도를 드리는 어간 히브리서 9:12절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저는 지금 주의 종에 반열에까지 서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나는 이 고백의 주인공들이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본문 32-34절을 주목합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돌아온 탕자를 기쁨으로 반기는 아버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의 두 번째 단락이 집에 있는 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아버지의 집에서 충성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도와 일을 했던 큰 아들이 동생이 허랑방탕하고 돌아오자 시비를 거는 내용이 두 번째의 단락의 내용입니다.

무엇이라고 시비를 겁니까?
눅 15:29-30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였는데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준 일이 없음에도 나쁜 짓 만 하고 돌아온 동생에게는 송아지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단락의 의미로 설명하면 뭐하는 것입니까?
아버지와 동생을 둘 다 싸잡아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 시비에 대하여 아버지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참 중요합니다.

눅 15:31-32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는 점잖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인 내가 용서했는데 시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인 내가 용서했으니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습니다.
아버지인 내가 모든 것을 인정하고 용서했으니 다른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단서가 무엇입니까?

눅 15:22절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팔레스타인의 풍습 중에 가락지를 끼우는 행위는 유산을 물려줄 아들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둘째에게 다시 아들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아버지의 전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여기에 무슨 불만이 있을 수 있고 하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사랑입니다.
찬송가 563장 2절 가사가 의미가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내가 죄를 씻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늘 문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8:1-2절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롬 8:1-2절의 말씀을 적용하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5:8절도 또 다른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사랑임을 육비에 새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번에 중국의 쓰촨성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지진으로 무려 7만 여명의 사망자를 내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23일자 한겨레신문에 아이를 살린 한 어머니의 내용이 기사화되었는데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13일 베이촨의 한 무너진 가옥에서 구조대원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마치 절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릎을 꿇고, 윗몸을 구부린 채,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위에서 쏟아져 내린 건물 잔해에 짓눌린 탓인지, 허리가 많이 무너져 있었다.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가 결사적으로 품고 있던, 노란 꽃무늬가 그려진 빨간 포대기에선 3~4개월 된 아기가 상처 하나 없이 새근새근 숨쉬고 있었다. 한 의사가 그의 품을 헤쳐 포대기를 들어 올리자 아기는 곤한 듯 잠에 빠져들었다. 포대기에서 휴대전화가 삐져나왔다. 의사는 무심결에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을 봤다. 거기엔 “사랑하는 아가야!”로 시작하는, 젖먹이에게 남긴 엄마의 마지막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아이를 살린 이야기는 드라마처럼 느껴지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생명을 버린 사랑도 이처럼 고귀합니다.
그런데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사랑의 클라이막스입니다.

왜입니까?
이 하나님의 사랑이 날 사랑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격해 하는 우리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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