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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우리가 지켜야 할 보금자리 (엡 5:31 ~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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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켜야 할 보금자리 (엡 5:31 ~ 엡 6:4) 

  오늘은 우리 교회 가족연합예배로 드립니다. 2부 때는 주로 어린이교회학교, 중고등부 학생들이 와서 어른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니까 참 좋았습니다. 이번 3부 예배는 교회학교 학생들은 없지만, 청년들이 어른들과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교회는 각 부서로 흩어져 있어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같은 자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족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남남이 아닙니다. 성이 최씨, 김씨, 박씨라고 해서 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갔는데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서, 자기는 아버지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면 촌수가 안 맞을 거 같아서 “하나님 할아버지!”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기도하다가 눈을 뜨고는 “야 이놈아! 너나 나나,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아버지야” 그래서 아들은 알았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알았어요! 형님. 이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유머를 이해하신 분들은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미얀마에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태풍이 불어와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사이클론 ‘나르기스’라고 이름도 어려운 태풍입니다. 미얀마에서 10만명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한 동리가 쑥대밭이 되었는데 만명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 폭우와 강풍이 어찌나 강하였던지 숟가락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쓸어갔다고 합니다. 참 어려운 상황입니다.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미얀마 군부정부가 구호단체의 손길을 거부하고 있고, 구호요원들의 입국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요즘 국내에서도 광우병이나 조류인플루엔자 등으로 혼란스러운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들, 미얀마의 강풍을 생각하면서 그 강풍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정의 위기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가정들이 이 세속화 시대의 잘못된 폭우와 태풍을 맞고 해체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정들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별거하고 이혼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전통적인 의미의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 안타까운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방임된 채로 길러지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별거하고 이혼한 가정 아이들은 길거리로, PC방으로, 또 유흥업소로 전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사회의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는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교회와 가정인데, 교회가 이 백성들에게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면 가정은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과 사랑과 교제와 용서와 화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가정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이 행복의 보금자리라고 합니다. 보금자리란 말은 새둥지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새가 둥지를 떠나면 위험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먹이를 공급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은 우리의 안식의 보금자리입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가정은 지켜져야되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성공은 바로 가정에서의 성공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바로 가정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트나 혹은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면 그 뒤편에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다는 국적표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만들었다하면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써져 있습니다. 중국에서 만들었다하면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씌여 있습니다. 한분께 물어볼까요? 미국에서 만들었다면 뭐라고 써 있습니까? ‘메이드 인 USA'. 아까 2부 예배 때 어린 친구에게 물어보니 ’아메리카‘라고 하더라구요. 보통 ’USA‘라고 씁니다. 국적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설명서가 있습니다. 이 제품은 이렇게 이렇게 사용해야 된다고 씌여있습니다. 설명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 제품은 망가지던지 제대로 사용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정을 만드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리고 가정을 설계해 주셨습니다. 우리 가정을 설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가정은 그 설계도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기독교재단 초등학교에 이사장님이 방문을 했습니다. 어느 한 반을 지정해서 그 반을 참관하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미리 준비를 시킵니다. 맨 앞에 앉은 아이 둘에게 말합니다. “분명 이사장님이 오면 너에게 이렇게 물을 거야. 얘야! 우리를 누가 만드셨지? 라고 물을 거야! 그러면 뭐라고 대답할거야?” “너무 쉽지! 하나님이지” 그리고 두 번째 아이에게 이야기 합니다. “이사장님은 너에게는 누가 우리를 기르시지?라고 물을거야. 뭐라고 답할거야?” “부모님이지” 이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계획이 뒤틀려가지고 이사장님이 공부시간에 안 오고 쉬는 시간에 들르셨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대답할 아이가 화장실 간 사이였습니다. 이사장님이 오셔서 두 번째 아이에게 첫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얘야! 우리를 만드신 분이 누구지?” 이 아이는 “우리 부모님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사장님이 “아니! 부모님 말고 하나님이 아닐까?” 그랬더니 그 아이가 “하나님이 만드신 애는 화장실 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고, 우리 가정을 설계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하려면 하나님의 설계대로 우리 가정이 이루어야 하고, 운영되어져야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경영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이 말하는 가정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설계가 있는데 그 세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는 부모공경입니다. 둘째는 부부사랑, 셋째는 자녀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이 행복하려면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생략된 말이 있다면 “부모에게 순종하라. 왜냐하면 이것이 옳기 때문에..” ‘가르’라는 원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옳기 때문에 너희는 부모에게 순종하라.” 순종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부모님 말씀을 잘 청종하여 들으라는 것입니다.
 
  또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네 부모에게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모공경이 왜 약속 있는 첫 계명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10가지의 계명, 십계명을 주셨는데 4개, 1에서 4가지의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입니다. 5에서부터 10까지의 계명은 사람 사이에 대한 계명입니다. 인간에 대한 계명의 첫 번째가 바로 제 5계명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여기 약속이 있습니다. 아니 여기 현상금이 붙어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낳은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게 바로 약속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냥 계명이 아닙니다. “네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할 것이다.” 여러분 부모공경은 너무나 소중한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멸망하는 사회의 특징은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곧 부모에게 거역하는 사회입니다. 인륜이 거꾸로 돌아갈 때 그 사회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모든 윤리도덕은 볼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부모를 공경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를 잘 드리지만 동시에 돌아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너희 눈에 보이는 부모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우리 교회 교우들은 우리 육신의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는 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잘되고 장수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23장 25절에 보니까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네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정이 행복해지기 위한 두 번째 설계는 ‘부부사랑’입니다. 에베소서 5장 마지막부분에서 사도바울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아내들아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라. 남편들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아끼시고 섬기시고 교회를 위해서 그 생명을 내어주셨듯이 너희는 네 아내를 위해서 희생하라. 자기 몸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하신 설계대로 살아갈 때 부부는 화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아내를 위해서 생명을 드릴 수 있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가 된다면 우리 가정은 얼마나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같이 남편을 가정의 제사장으로, 머리로 삼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성경적 원리입니다. 남편이 가정의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남편의 권위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남편들은 꼭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일에 열심을 내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준비해 준 가정예배 순서지를 가지고 온 가족을 모아 놓고 우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자 할 때 그 남편의 진정한 권위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예배드리지 않더라도 아내들은 남편을 존귀히 여기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가정의 제사장이요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부부관계가 원만할 때 가정이 행복합니다. 부부가 서로 말도 안하고 서로 별거한 것처럼 살아간다면 가정에는 어두움의 먹구름이 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부부는 서로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미국 켈리포니아 관광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중년의 남녀가 그 관광지를 찾아왔습니다. 점심 때가 되어서 치킨을 파는 가게에 들러서 치킨을 한 상자 샀습니다. 그리고 벤치가 있는 곳으로 와서 그 치킨을 먹으려고 뚜껑을 열었더니 그 안에는 치킨을 없고 돈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이구 이게 왠 돈이지”하고 다시 들고 가게로 갔습니다. 그 주인은 남이 알지 못하게 돈을 돈 통에 넣지 않고 치킨 박스에 넣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정신없이 바빠서 치킨상자를 준다는 것이 돈 통을 줘버린 것입니다. 이런 돈 상자를 가져오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래서 너무 고마워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신문사에 전화해서 기자를 부르겠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해요.” 그랬더니 이 남자 신사가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마세요. 저 좀 살려주십시오. 사실은 이 여자가 제 아내가 아닙니다. 아내가 아닌 여자와 관광지에 놀러 왔던 것입니다.” 그는 한 면에서는 정직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걸 설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그런 가정은 결과적으로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교우들 가정은 부부간에 서로 신뢰하고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시는 그런 가정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설계하신 행복한 가정은 자녀를 사랑하는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랬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세요. 자녀의 마음 속에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을 쌓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막 짓누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을 할지언정 윽박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권위를 가지고 무조건 명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는 노를 쌓게 되고 분노하게 됩니다. 

또한 주의 교양과 훈계. 교양이라는 말은 우리가 어떤 행동적인 것을 통해서 자녀를 훈련시키는 생활습관을 바로 길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훈계라는 것은 말로 잘 타이르는 것,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부모가 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또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부모들은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안 해야 될 것을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종종 많은 가정들 중에 보면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끊어진 가정이 참 많이 있습니다. 성장한 자녀가 결혼했지만 몇 년씩 부모를 만나지 않는 가정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극복해야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됩니다. “아빠 미안해요.” “엄마 미안해요.” “얘야 미안하단다.” 그러면 되는데 그 말을 못합니다.

  제가 어느 신문기사에 보니까 이런 글이 나왔습니다. 컴퓨터 부품회사를 경영하는 박영철씨는 어버이날만 돌아오면 마음이 불편하다. 홀어머니에게 안부전화를 드리지 않은지 벌써 2년째다. 창업비용 마련을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 재산을 나눠달라고 했다가 형과 갈등이 생겼고, 형편만 드는 어머니에게 화가 나 “이 놈의 집구석에는 다시는 발길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또 한사람, 광고회사에 다니는 이혜정씨도 5월이 서글프기는 마찬가지이다. 남자친구와의 교제를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6개월 전 자취를 시작했다. 지난 설엔 홍삼선물셋트를 들고 찾아갔는데 너처럼 불효막심한 딸 둔 덕 없다며 문전박대만 당했다. “아버지 은퇴하신 마당에 집안의 기둥노릇할 거라 믿었던 맏딸이 결혼 운운하니 실망하신 거죠” 

  부모자식간의 대화가 없습니다. 단절하고 살아가는 가정들도 많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되는데 그 말을 못 합니다. 미안하다는 말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족합니다. 근데 자존심 때문에 그걸 못합니다. ‘내가 왜 미안해 미안할게 없는데’, ‘난 잘못한게 없는데, 잘못은 지가 했지.’ 이래서 화해하지 못하고, 금이가고 깨어지는 가정이 너무 많습니다. 부부간에, 가족 간에 사랑한다는 고백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한국분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잘 안 합니다. ‘마음으로 사랑하면 되지 꼭 겉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느냐?’ 아닙니다. 입술로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입술로 여러분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고백이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녀 간에도 스스럼없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TV 개그콘서트에 보면 경상도 가족이 나오는 프로가 있습니다. 얼마나 딱딱한지 밥상에 앉아서 대화가 “밥 묵자” 한마디면 끝입니다. 그렇게 할 말이 없습니다. 미안한 건 미안하다. 부모가 자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아버지입니다.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얘야 정말 미안하단다.”, “엄마 정말 미안해요. 사랑해요” 이 고백이 얼마나 좋은줄 모릅니다.

  두란노 아버지학교에서 사역팀장을 맡고 있는 정해성씨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쓴 책이 <아버지 이제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정해성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아버지라는 인상은 그저 윽박지르고 때리고 명령하고 그런 무서운 폭군같은 존재였습니다. 자기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런 기억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말 잘못하면 두드려 패는 아버지, 무조건 명령하는 아버지, 아버지 앞에서는 밥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위장병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친구집에 놀러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아버지와 씨름을 하는데 방에서 막 뒹구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목을 잡고 서로 씨름하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아버지와 씨름을 할 수 있나?’ ‘저런 아버지도 있고 저런 가정도 있구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정은 왜 저렇지 못할까? 왜 우리 아버지는 두렵기만 할까? 그는 성장해서 예수전도단 DTS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해결해야 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가 꼭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뭔데?” “저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아버지”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래, 너도 뭐든지 열심히 해라” “아버지 제가 이말은 제가 꼭 하고 싶은데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자기도 자기가 한 말에 너무 놀라서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난생 처음 30년 인생 처음 아버지보고 사랑한다고 말해봤다고 합니다. 그리고 계속 그분의 책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구정날 부모님댁에 세배를 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오늘은 아버지를 안아드리리라 결심했다. 부모님 댁에 도착해 세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제 사역자가 되었으니 주 안에서 사역을 잘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 때 내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하고 꼭 한번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앉아계신 아버지와 내가 서 있는 거리가 불과 1.5M도 안 되는데 그 거리가 마치 요단강 같이 아니 홍해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뻗어야 할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못하게 되면 나는 진정한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 속으로 강하게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서 앉아 계시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난 울면서 “아버지 사랑하고 감사해요.”라고 말하고 아버지 품에 꼭 안겼다. 

그 때 하염없이 울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그 때 아버지 역시 당신의 아버지에게 한번도 사랑의 안김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나를 안아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품이 너무 좋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도 좋았다. 옆에 계신 어머니도 울고, 뒤에 있던 아내도 울고, 그곳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거기서 천국을 경험했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어떤 불필요한 긴장감이나 어색함이 없어졌다. 진정한 평안과 기쁨만이 충만했다.

  최근에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어디세요?” “여기 마트다.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단다.” “뭔데요 아버지?” “해성아! 나 너 사랑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황급히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가족끼리 무슨 답이 있고 무슨 갈등이 있겠습니까? “미안하다.” “사랑한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그 말 한마디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그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사랑과 용서의 화해의 축복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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