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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카이로에서 취리히까지 (마 2: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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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에서 취리히까지 (마 2:13~18)

        아시다시피 지난 4월 25일부터 5월 7일까지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저희 부부를 비롯한 18분이 순례단을 구성했습니다. 경비가 조금 비싼데다가 일정 역시 조금 긴 듯해서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돈이나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의미 있고 유익한 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슬림들이 일생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규율들을 다섯 가지 기둥들(Five Pillars)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Hajj인데 이슬람 성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순례하는 일입니다. 극심한 가난이나 질병 혹은 신체적인 구금 상태에 빠지지 않은 한 누구나 다 반드시 성지순례를 다녀와야만 합니다. 우리 기독교 역시 온 교인들이 일생에 한번쯤은 성지순례를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보탬이 된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이번 여행은 이집트→요르단→이스라엘→이탈리아→스위스 순으로 일정이 짜였습니다. 갈 때는 몰랐는데 돌아와서 생각하니 기막힌 코스였습니다. 정반대 순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제일 먼저 이스라엘부터 들어가서 요르단과 이집트 쪽으로 나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여행사에서 항공편이나 경비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해서 만든 일정이겠지만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코스였습니다. 그것은 유대-기독교의 야성과 순수성이 이집트 광야로부터 시작해서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거쳐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변질되고 오염되어 온 과정을 보여주는 코스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볼거리는 로마에 다 있었습니다. 성당 하나를 짓는 데에도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예술가를 총동원해서 몇 백 년이 걸려서 지었기에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옵니다. 가히 기독교 예술의 결정판이요 최고봉이 다 로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위해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상화라고 할 정도로 지나치게 현란하게 꾸몄기 때문이지요. 초대 교황이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역대 교황들을 지나치게 우상화시켜 놓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칼뱅과 에라스무스, 츠빙글리 등 종교개혁가들이 몰려들어 개혁운동의 본산지가 된 스위스를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로 삼은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 발원한 광야의 영성, 즉 신앙의 야성과 순수성을 목숨을 걸고 다시 회복하고자 했던 종교개혁 운동이 바로 스위스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신기하게도 성지순례의 첫 번째 기착지인 이집트와 최종 목적지인 스위스가 다시 만난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 고원의 불가사의들> 

        앞으로 5주간에 걸쳐서 제가 경험한 성지순례 경험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첫 번째 여행지인 이집트에서 듣고 본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4월 25일(금)부터 27일(주일)까지 2박 3일 동안 체류했습니다. 이집트는 이미 창세기부터 자주 언급하고 있는 성지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기근이 생길 때마다 자주 피신했던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6,670km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강이 이집트에 있어서 천혜의 곡창 지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야곱의 식구들이 가나안 땅을 떠나 이집트로 이주한 이유도 다름 아닌 식량 문제 때문이었지요.            

        이집트의 고대 문명은 주전 3천년부터 주전 30년까지 바로 혹은 파라오라고 일컬어지는 약 30개의 서로 다른 왕조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고대 문명과 관련해서 이집트는 볼거리가 엄청난 나라입니다. 첫날 오전에 우리는 그 유명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부터 먼저 보았습니다. 카이로 근교의 기자 고원 위에는 거대한 산과 같은 세 개의 피라미드가 서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4,600년 전부터 바로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평균 무게가 2.5톤 정도인 석회암과 화강암 200만개 이상을 다듬어서 만들었습니다. 어떤 기단석의 경우는 우리키보다도 훨씬 더 큰 15톤 이상의 무게를 자랑했습니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노동자 20만 명 정도를 동원해서 한 10년간 공사를 해야지만 하나의 피라미드가 완공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세계 3대 불가사의 중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이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피라미드 근처에 서 있는, 얼굴은 사람 모양을 하고 몸체는 짐승 모양을 한 스핑크스 역시 피라미드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참 신기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한 예수님의 가족은 물론이고 이집트의 왕자로 자라난 모세 역시 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작은 동네 나사렛에서 살았던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어린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지금 보아도 엄청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를 잠시 연상해보았습니다. 

        <Old Cairo에 꽃 핀 콥틱 기독교 유적들> 

        오후에는 옛 카이로(Old Cairo) 지역으로 이동해서 콥틱 기독교로 알려진 이집트 토착교회 유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콥틱 기독교는 이집트 원주민들의 토착교회를 말합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유적지 중에 하나가 이집트일 것입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이 피난하신 것을 기념하는 교회가 Old Cairo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아기 시절 한 3년 동안 이곳으로 피난하신 것은 물론이고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와서 복음을 전파했고 순교해서 콥틱 기독교의 초대 교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중동국가들 중에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을 보유한 나라가 이집트라고 합니다. 전체 인구의 13%나 되는 약 천만 명 정도가 콥틱 기독교 신자라고 하니까요. 

        오후에 시간이 충분치 않아서 Old Cairo 지역에 밀집된 역사적 교회들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서둘러 훑어보았습니다. 특히 주후 3세기 경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한 뒤 바벨론 성채(Roman Fortress of Babylon, 벧전 5: 13)를 축조했는데 640년대에 아랍인들이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콥트 기독교인들이 이 성채 안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바벨론 성채 안에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술로 많은 예배당들을 건축했는데 그 중에 다섯 개의 교회가 현존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천년 이상의 유장한 역사를 자랑하는 콥틱 교회들이었는데 특히 세 개의 교회가 인상 깊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에 피난 왔을 때 약 45일간 휴식을 취했다는 석굴 위에 세워진 성 세르기우스 교회(Church of St. Sergius, 혹은 Abu Sarga)는 바벨론 성채 안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콥틱 교회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인파가 너무 많아 그 석굴 안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12제자를 상징하는 교회 기둥이 흥미로웠습니다. 11개는 아주 희고 매끈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한 개만 거무칙칙한 화강암이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를 상징하는 기둥이겠지요. 기둥 위에 그려진 사도들의 그림 역시 상당히 오래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매달려 있는 교회(Hanging or Suspended Church) 혹은 성모 마리아 교회(Church of the Holy Virgin, al-Muallaqa) 역시 인상 깊었습니다. 배를 뒤집어 놓은 형상으로 성벽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기이한 교회였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이 교회는 바벨론 성채의 남쪽 수문 꼭대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매달려 있는 교회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 장식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아마 Old Cairo에 있는 교회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4세기에 지어졌으나 파괴된 뒤 11세기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이 교회가 복원된 경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콥틱 교황 아브라함 재위 시절(975-78) 이슬람 최고 지도자 칼리프가 찾아와서 겨자씨가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일 입증하지 못할 경우 모든 콥틱 기독교인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고민하던 아브라함 교황의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가나한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던 무두장이에게 안내했습니다. 이 무두장이가 무카탐 산을 움직이는 기적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성모 마리아 교회를 비롯한 숱한 콥틱 교회들의 복원을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성 죠지 교회(Church of St. George) 역시 감명 깊었습니다. 죠지는 3세기 로마군단의 장교였는데 디오클레시안 황제가 그리스도 숭배를 금하는 법령을 내렸지만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장렬하게 순교를 당했는데 인간이 가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고문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죠지가 고문 받고 순교 당하는 그림과 함께 당시에 사용했던 각종 고문기구들을 볼 때 한 인간의 위대한 신앙 앞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죠지는 3세기부터 중동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순교 성인으로 널리 추앙을 받았는데 그의 기념 교회는 10세기경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시간이 모자라 콥틱 박물관을 비롯해서 더 많은 유적들을 관람할 수 없었음은 두고두고 아쉬웠습니다. 더욱이 성 마가의 전교지요 오리겐과 아타나시우스를 배출했으며 그 유명한 셉츄아진트, 즉 70인역이 태어난 알렉산드리아가 이번 순례길에 빠진 것 역시 아쉬웠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집트에만큼은 꼭 다시 오고 싶은 마음 간절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Old Cairo 지역에 산재한 콥틱 기독교 유적지를 대충 둘러본 뒤, 26일(토) 오후 3시경부터 우리는 카이로를 벗어나 모세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위에는 지중해가, 왼쪽에는 홍해와 수에즈만이, 오른쪽에는 아카바만이 있는 그 유명한 시나이 반도를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특히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고 있었으며 아시아와 유럽 간의 해로를 15,000km 이상 단축시켜준다고 합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운하 밑으로 뚫린 해저 터널을 통과했으며 엄청난 양의 물류를 수송하는 화물선들이 지나가는 수에즈 운하 근처까지 갔지만 군인들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서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시나이 반도는 수르 광야와 에담 광야, 신 광야, 바란 광야, 진 광야를 포함하는 광대한 사막 지대였습니다. 카이로를 벗어나 옛 수르 광야를 한참 동안 달려가니 마라의 쓴 물 사건이 일어난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오늘날 이집트의 아랍인들은 Ain Musa라고 불렀습니다. 출 15장을 보면 홍해를 빠져나온 이스라엘이 수르 광야로 사흘 동안 걸어갔지만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지만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습니다. ‘마라’의 뜻이 ‘쓰다’이니 이 지역은 염기가 많은 지역이 틀림없습니다. 현장에 직접 가보니 바로 코앞에 홍해가 있어서 바닷물의 영향으로 물이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신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셔서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 일어난 최초의 기적이었지요. 

        마라로 추정되는 사막 지역에 도착해서 내리니 모래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뜰 수 없는 황사가 불어 닥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군데군데 많은 우물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중 하나 마라의 우물로 여겨지는 지점에서 간단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어느 나라인지 모르지만 백인 순례단이 연이어 도착해서 우리와는 다른 우물가로 가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버스로 되돌아 올 때 우물 주변에 헛간 같은 상점을 지어놓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호객행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싸요” “비싸요” “빨리빨리” 등의 한국말을 잘 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라를 지나 열두 개의 샘과 일흔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다는 엘림으로 추정되는 지역도 지나갔습니다(출 15: 27; 민 33: 9). 마라에서 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라고 하나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차창 밖으로 사막 한가운데 종려나무들이 풍성하게 자리 잡은 곳은 어디든지 엘림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출 16장을 보면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만나를 먹었다고 합니다. 

        시나이 반도를 타고 계속 남하하던 우리는 마침내 르비딤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시나이 반도는 차로 달리는 내내 희뿌연 모래와 갖가지 색깔의 돌산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가이드 목사님에 따르면 수백 수천 가지의 천연광물들이 포함된 천혜의 산맥이라고 했습니다. 웬일인지 이집트 정부는 전혀 개발을 하는 기미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가난한 살림에 게으른 처사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순례객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발해서 경제력을 높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지금처럼 자연 상태로 그냥 놔두는 것이 출애굽 경로를 추적하는 우리에게는 훨씬 더 의미 있고 유익했습니다. 자나 깨나 자연보호라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지요. 

        르비딤은 시내산에 이르기 전에 갑자기 나타난 오아시스 지역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약 60km 떨어진 지점이었지요. 르비딤은 해발 2,000m의 세르발 산기슭에 위치한 오늘날 Wadi Feiran으로 알려진 남부 시나이에서 가장 큰 오아시스였습니다. 큰 키의 종려나무 약 3만개가 4km에 걸쳐 숲을 이룬 사막의 옥토였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당장 르비딤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아론과 훌과 더불어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한 곳으로 추정되는 야산에 올라가니 더욱 더 분명해졌습니다. 출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투를 한 기사가 나옵니다. 아마도 이 풍요한 오아시스 지역에 미리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아말렉 족속 같습니다. 갑자기 2백만 명이나 되는 인파가 쳐들어오니 전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말렉은 르비딤 오아시스를 지키려고 했을 테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든지 빼앗으려고 했겠지요. 

        놀라운 사실은 모세가 앞장서서 진두지휘를 해도 승리할까 말까인데 여호수아와 장정들만 나가서 전투를 하라는 것입니다. 산밑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과 열심히 싸웁니다. 모세가 언덕 위 야산에 올라가 지팡이를 든 팔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내려오면 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팔은 든 것은 공격신호이고 팔을 내린 것은 퇴각신호라고 해석했습니다. 현장에 가보니 매우 그럴듯한 해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비롯한 3인이 올라간 곳으로 추측되는 야산은 전망이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르비딤 동서남북을 손금 보듯이 자세히 내려다 볼 수 있었는데 멀리 산밑에서 전투를 하는 사람들까지도 산위에서 내리는 전투신호를 금방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중보기도했다는 해석이 훨씬 더 신앙적인 해석일 것입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쪽 팔을 붙들어 올려 함께 기도해서 이스라엘이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그 산언덕에서 수천 년 전의 전투를 생각하며 함께 팔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군대의 함성이 귓전에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르비딤은 이스라엘이 시내 산 지역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체류했던 장소였습니다. 르비딤 산언덕을 내려오니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정도를 달려 시내산 기슭에 있는 호텔로 가 이집트 체류 둘째 날을 보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시내산 등정이었습니다. 르비딤에서 시내산 쪽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가이드 목사님은 시내산 등반 요령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안전사고에 유념해야 할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습니다. 낙타를 타고 한 밤중에 올라가다가 떨어져 다쳤다는 이야기,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 등등 겁이 날만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미 피로에 지친 일행은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드디어 4월 27일 주일이 되었습니다. 새벽 1시에 기상해서 버스를 타고 한 10분 정도 달려가 시내산 기슭에 있는 성 케터린 기념 수도원(St. Catherine's Monastery)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전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세 분이 몸이 피곤해서 등정을 포기하고 15 명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박승옥 권사님과 박정윤 집사님을 제외한 13분이 낙타를 타기로 했습니다. 납작 엎드려 있던 낙타를 처음 타니 정말 무서웠습니다. 맨 먼저 일어날 때 아주 조심해야 했습니다. 갑자기 공중으로 튀어 오르기 때문에 쌍봉낙타의 앞과 뒤쪽에 있는 뿔을 꼭 잡지 않으면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일행 중 누구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잘 타고 올라갔습니다. 11세의 베두인 소년이 저와 황정순 권사님, 이종숙 집사님이 탄 세 마리 낙타의 몰이꾼이었는데 한국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몰랐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어두운 달밤에 그 소년의 우스꽝스러운 한 판 코미디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약 1시간 40분 정도 낙타를 타고 마침내 시내산에 오르는 돌계단 앞에 도착했습니다. 휴게실 상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가파른 돌계단 700개를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시내산은 아랍어로 Jebel Musa, 즉 모세의 산으로 알려진 해발 2,285m의 성산인데 사방이 시뻘건 바윗돌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수도원까지의 해발이 이미 1,530m 정도이므로 낙타에서 실제로 올라가는 거리는 755m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수도원에서 직접 걸어 올 경우 3,700개의 회개의 돌계단을 올라가야 한답니다. 낙타에서 내려 잠시 쉰 뒤 나머지 1/3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는데 서서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주변의 돌산들이 일제히 붉은 자태를 드러내는데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시내산 정상에는 이미 먼저 올라온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산 정상에는 6세기에 지어졌다가 허물어진 교회 터 위에다가 1934년에 다시 지은 성 삼위일체 예배당(Chapel of the Holy Spirit)이 있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모스크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멀리 태양이 솟아오를 때 그 광경 역시 천하일경(天下一景)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40주야를 지내며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전수 받았고 정상에 올라가 구름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 했을 때 모세가 죽을까봐 그 얼굴을 바위틈에 가렸을 법한 거대한 바위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실로 시내산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만큼 충분히 영험한 성산이요 명산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를 연상하면서 저 역시 하나님을 만나길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시내산 꼭대기에서 우리는 주일 아침 예배를 드렸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예배였습니다. 

        시내산을 내려올 때 사위에 날이 환하게 밝아서 곳곳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뒤 이스라엘이 기다린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지나칠 때 묘한 감동이 일었습니다. 모세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군중들의 모습이 눈앞에 집히는 듯 했습니다. 하산은 등산보다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온 말이 있습니다. 새까만 밤이니까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세상모르고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밝은 대낮이었으면 절대로 못 올라갔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시내산 등정을 끝으로 이집트 순례는 사실상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르단으로 넘어가기 위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국경을 이루는 타바(Taba)에 도착하기 전 사막에 잠시 내려 싯딤나무와 로뎀나무를 직접 보았습니다. 싯딤나무는 결코 대단한 나무가 아니었지만 언약궤를 만드는데 쓰였습니다. 사막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재였기 때문이지요. 우리 역시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힐 때 존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막에서 본 로뎀나무 역시 가지가 많지 않은 한 1미터 4-50cm 정도 되는 아주 작은 키의 관목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다고 해서 대단히 큰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왕상 19: 4-5). 그러나 사막 뙤약볕에 그 작은 키의 로뎀나무가 만들어지는 손바닥만 한 그늘 아래 몸의 일부만 숨겨도 얼마나 서늘하고 감사한 줄 몰랐습니다. 

        <잊어서 안 될 광야여> 

        5개국 순례에서 이집트의 광야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광야는 사람 살 곳이 못 되었습니다. 모래 바람이 일어나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습니다. 사방에 싯누런 혹은 시뻘건 바윗돌 천지였습니다. 하늘만 빠끔히 뚫려 하나님만 쳐다보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유대-기독교 신앙의 발상지였습니다. 우리 영혼이 끝없이 되돌아가야 할 영혼의 고향이었습니다. 광야로 가면 아무 것도 볼게 없기 때문에 저절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광야를 잊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들어간 가나안 땅은 과연 직접 가보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먼지 나는 사막에서만 짐승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물이 있고 비옥한 땅이 있는 이스라엘 땅은 확실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사막의 영성을 잊어갔습니다. 광야의 야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가나안의 농경신 바알을 섬기며 우상숭배에 빠져들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의 야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그 때 우리는 돈과 향락과 명예라는 현대판 바알신을 섬기게 됩니다. 이번 성지순례의 결론은 광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가이드 목사님이 광야 지대를 통과하면서 차안에서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을 말씀드리고 오늘 이집트 편 설교를 마칩니다. 출애굽 경로로 추정되는 광야 지대를 통과할 때 현지체험을 하라고 차에서 내려 한 1-2km를 사막 위에서 걸으라고 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교인들의 불평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한 분만 내려서 대신 체험해보시고 나중에 자기들에게 그 느낌이 어떤지 말해달라고 주문하기가 일쑤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고 편리한 것만 추구하다보니까 광야를 멀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살기 위해 광야로 돌아가야 합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고 합니다. ‘~~으로부터’라는 ‘민’과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가 합해진 말입니다. 광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집트의 시나이 광야는 위대한 성지입니다. 모세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광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에게 모세가 준 당부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 11-16).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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