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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교회가 문안하느니라 (롬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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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교회가 문안하느니라 (롬 16:1~16)

  저도 초등학교 다닐 때 '편지 쓰는 법' 따위를 국어 시간에 배웠었습니다.
  물론 수신인의 이름을 제일 먼저 써야 할 것이고, 바로 그 다음에 따라 나오는 것이 문안인사입니다.
  서로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것이 편지글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 예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로마서, 즉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도 바로 그런 문안인사로 가득 찬 부분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는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에 그 문안인사가 여느 편지처럼 제일 앞에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바울 서신의 초두는 주로 간단한 인사말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의 말이 끝나면 곧 바로 본론 즉 교회와 성도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편지의 끝 부분에 가면,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쪽 교회의 성도들이 전하는 안부, 또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있는 쪽 교회 성도들의 안부를 묻는 인사들이 가득 한 장을 메우곤 하는데, 로마서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문안 인사들의 내용도 세상 사회에서 나누는 편지의 문안인사와는 전혀 질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예의의 차원을 벗어나서,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성도들 간의 영적 교통(communion)'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정의 달 5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육신의 혈육 말고도 영적 혈육, 땅에 있는 집안 식구뿐 아니라 하늘 집에 영원히 같이 살게 될 천국 가족들이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로마서 마지막 장의 문안인사들을 통하여, 과연 이런 '예수 혈통'을 나눈 성도들 사이의 교통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바른 교회들 간의 공적 유대 관계가 '가장 수준 높은' 성도의 교통입니다. 

  1절과 2절에 "1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2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뵈뵈"란 이름의 성도가 나타나는데, 그녀를 "천거하노니"라고 번역된 말은 그냥 '소개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이 뵈뵈라는 자매를 로마교회에 보내면서 그녀에게 무슨 직분이나 일자리를 주라고 추천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문맥이나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서, 이 뵈뵈는 지금 사도 바울이 쓰고 있던 로마서를 직접 로마교회에 전달했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출신지인 "겐그레아"는 고린도 시에서 동쪽으로 7, 8km 가량 떨어져 있던 항구로서 고린도의 외항에 해당되었습니다.
  즉 지금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던 고린도 근교에 살고 있던 교인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그녀를 가리켜 겐그레아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이 말은 그냥 '집사'라고도 번역해도 되는 단어입니다.
  신약 성경 말씀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교회 내에서 여자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공식적인 직분도 가지고 있었음을 여러 군데에서 시사해 줍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 보면 '집사의 자격'에 대한 말씀 중에 "여자들도 이와 같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의 '여자들'이란 '집사된 사람의 아내'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문맥상으로 볼 때 '여자 집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초대교회사에 관련된 문헌들에 보면 '여집사'라는 직분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근거로 칼빈은 이 로마서 본문의 "일군"이란 말을 아예 '집사'라는 공적 직분의 명칭으로 번역했고, 이 뵈뵈란 여집사가 사도 바울의 편지를 공적으로 로마교회에 전달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은 이런 해석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해 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그녀를 소개하면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라고 특별한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예의를 갖추어 맞이하라'는 말이나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라'는 말은, 지금 뵈뵈가 로마교회에 사도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러 가는 공적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니만큼 또한 그녀를 공식적 차원에서 영접해 줄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뵈뵈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는 말은, 그녀가 평소에 사도 바울이나 다른 전도자들의 사역에 물질적으로 크게 후원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자들이 그 여자만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지혜와 용기와 마음 씀씀이를 발휘하여 얼마나 하나님의 일에 크게 사용되었는지를 무수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뵈뵈 역시 평소 겐그레아교회에서 그처럼 크게 주의 일에 섬기는 성도였는데, 이제는 사도 바울을 대신해서 로마교회를 방문하는 공적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두 교회 사이의 영적 교통을 위해 수종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절인 16하반절에서도 "16b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말로 사도 바울의 문안인사가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 중심으로 퍼져 있던 모든 교회의 교인들을 로마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알고 있었겠습니까?
  절대 다수의 교인들이 개인적으로는 서로 모르는 관계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모든 교회들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안부를 전한다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빈말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참된 성도의 교통은 교회와 교회, 아니 모든 교회와 모든 교회 사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천명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교회는 달라도, 아니 교단도 다르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주님으로 섬기고 있는 모든 참된 교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신비한 교통을 인식하고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교회당 위치는 달라도, 이미 영적으로 다 한 교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통'이란 한 교회 교인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교회의 임직예배에 참석하고 축하해 주는 것이나, 약한 개척교회의 성전건축을 위해 서로 헌금해 주고 돕는 것도 역시 '성도의 교통'입니다.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이 함께 큰 복음사업에 힘을 모으기 위하여 고려신학교 후원이나 선교헌금 운동에 동참하는 것 역시 훌륭한 '성도의 교통'입니다.
  특히 이단에 대하여 함께 성명서를 발표한다든지 하면서 참된 진리 지키는 교회들이 연합전선을 펴는 것은 정말 멋지고도 필수적인 '성도의 교통'인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 사이의 유대관계와 연합'을 '무조건적인 종교통합'과 혼동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지난 주중에 석가탄신일이 있었는데 천주교 성당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환영합니다.'라는 따위의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것을 흔히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위 '기독교와 천주교는 같다.'라고 하는 기독교인들은 결국 '기독교와 불교도 같다.'라고 동조하는 셈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혈통이 다르면 절대로 한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이단 기독교나 타종교와 짝하는 것은 결코 '성도의 교통'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벨리알을 억지로 조화시키려는' 아주 저질적인 배교행위일 뿐입니다.
  아무리 다수가 그런 금송아지 혼합종교에 휩쓸려 간다 해도 결코 부화뇌동하지 않고 그저 참된 교회운동의 기치만을 높이 들면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인'을 반드시 만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바른 진리를 지키는 교회들 사이에서만 나누어질 수 있는 이런 영적 유대와 연합을 통하여 가장 수준 높은 '성도의 교통'을 영위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전도와 선교 사명에 동역하는 것이 또한 '가장 폭 넓은' 성도의 교통입니다. 

  3절 이하 5절 상반절까지에 "3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5a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고 기록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이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소개하는 대로, 바울과 아주 각별히 지내던 부부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남편보다 부인 이름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은 좀 특이한 일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서도 역시 브리스가가 먼저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도 그녀가 교회에서 더 중요한 직분을 가지고 있었던지 복음 전파 사역에 더 크게 쓰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부부는 원래 로마에 살면서 로마교회의 일원으로서 신앙생활하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행전 18장 2절에 보면, 이들은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 거주 유대인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을 때 로마를 떠나서 고린도로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데, 아마 사도 바울은 이들을 통하여 로마 교회에 대한 자세한 소식들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굴라의 직업도 바울과 꼭 같이 "장막 만드는 일," 즉 텐트 제조업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고린도에서 한때 같이 동업하면서 또한 선교사역에도 동역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8장 18절부터 28절에 보면, 이후에 이 부부는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에 함께 동행도 하고 에베소에서 일정 기간 머무르면서 사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로마서가 기록되고 있을 시점에는 이들이 로마에 있었던 것을 보면, 이들은 유대인들의 로마 귀환이 허용되었을 때 로마교회로 다시 돌아가서 사역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 의하면 이 부부는 나중에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서 사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이들을 가리켜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을" 각오로 자기를 사랑했던 동역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을 얼마나 존중했으며 그 복음 전파 사역에 얼마나 충성된 자세로 협력했는지는 이 한 절만 보아도 더 이상 사족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 부부가 잠시 에베소에 와서 사도 바울과 동역했을 때 그 얼마나 충성스럽게 섬겼든지, 지금 그들이 로마로 돌아간 시점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5상반절에 "저의 교회"라는 말은 원래 '저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라고 번역해야 올바릅니다.
  로마교회 역시 당시 대부분의 초대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집을 교회의 공식 예배처소로 삼고 있었는데, 바로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그처럼 자기 집을 교회당으로 제공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에베소에 있을 때 썼던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도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부부가 에베소에 있을 때에도 역시 자기 집을 교회당으로 제공했다는 뜻이며, 이것은 그 부부가 물질적으로 부유했고 또한 그것을 항상 교회를 위하여서 기꺼이 바쳤음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에베소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가르치는 사역을 했던 선교사들이었으니, 당연히 로마교회에서도 교회의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이처럼 사도 바울의 각별한 동역자들이요 로마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까닭에 이 문안인사에서도 제일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전도와 선교에 동역하는 것은 자기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로마교회' 등 훨씬 더 넓은 지역에서 성도의 교통을 이루게 되는 것이며, 아니 자기 교단 안에서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서바나로, 그리고 서바나에서 세계로' 뻗어가는 교회운동을 통하여 문자 그대로 '땅끝까지 이르는' 성도의 교통으로 확장됩니다. 
  즉 성도가 나눌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교통'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은 현실적으로 단 한 곳에 살면서 한 군데의 교회에 속해 있지만, 그 마음은 이미 세계를 품고 '영적 지구촌'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알고 사귀는 것을 두고 '발이 넓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다면 전도 열심히 하는 신자야말로 이웃사회에서 '아름다운 발'이 넓은 사람이며, 선교에 부지런한 교회야말로 온 세계에 그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넓은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특히 우리교회처럼 '세계를 받은 교회'를 세우고서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 하는 성도'가 될 때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제일 '발 넓은' 성도의 교통을 이미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슨 '사해동포주의' 따위를 외쳐도 민족 간의 차이와 국가 간의 이해관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전 인류 간의 교제는 결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복음만이 모든 언어, 인종, 문화의 차이들을 다 극복할 수 있으며, '땅끝에서도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주님의 구속역사만이 온갖 종류의 인간적 장벽들을 비로소 제거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지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전도하고, 또 만난다 해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민족이지만 이미 '가 있는 자'된 선교사들을 위하여 '보내는 자'의 후원 사명에 힘써 동역함으로써, 온 세계만방에 미치는 가장 광범위한 '성도의 교통'을 나누며 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교인들끼리 신앙과 봉사로 교제하는 것이 '가장 진실하고 거룩한' 성도의 교통입니다. 

  우선 5절 하반절로부터 9절에 보면 "5b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6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내의 여러 교인들에게 개인적인 문안인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에배네도"란 성도는 "처음 익은 열매" 즉 사도 바울이 아시아 전도에서 제일 처음 얻게 된 결신자였으니 누구보다도 먼저 생각난 것도 당연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라는 여성도를 가리켜서는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녀가 로마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힘든 일에 많이 봉사했음을 뜻합니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역시 부부였던 것 같은데, 여기 바울의 "친척"이라고 번역된 말은 그냥 '동족' 즉 같은 유대인임을 가리키는 말로 보이는데, 이들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사도 바울과 "함께 갇힌" 적도 있을 만큼 또한 신실하고도 충성스러운 신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사도에게도 "유명히 여김"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 말은 '평판이 좋다, 존경을 받다'라는 뜻으로서, 신앙 좋은 교인들은 목사들의 세계에서도 칭찬이 자자하게 돌게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암블리아"를 가리켜서는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자라고 했는데, 아무리 사랑할 조건이 없는 듯이 보여도 '주 안에서'는 사랑하지 못할 교우가 없으며, 또한 사랑할 때 '주 안에서'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사랑'의 교제가 될 것입니다.

  10절 이하 15절에 이어서 기록하기를 "10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아벨레"라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교회 봉사하는 생활을 통하여 교회의 신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경륜이 오래되고 신앙 지식이 많다 해도 그 생활과 섬기는 일을 통하여 교인들 사이에서 신임을 얻지 못하면 실제로는 아웃사이더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나깃수의 권속 중"에서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문안했습니다.
  같은 "권속" 즉 자기 집안 가족 중에 믿는 사람 하나 있다고 다 절로 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안 있는 자" 즉 본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신앙을 확실히 간직해야만 서로 영적 가족으로서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버시"라는 성도를 가리켜서는 특별히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많이 섬기고 충성하는 것만이 다른 성도로부터 많이 사랑받는 비결이 되는 것은, 비단 교인들 앞에서 뿐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본문의 "루포"는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의 아들일 가망성이 높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자세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루포의 어머니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즉 구원신앙이 확실한 성도끼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새로운 모친, 형제, 자매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나타난 바울의 여러 개인적인 문안인사는 로마인, 헬라인, 유대인, 그 외의 이방인들 등 여러 민족에다가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로마교회는 그처럼 문화적으로 각양각색, 사회적으로 각계각층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교인들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여러 성도들에 대한 묘사를 크게 둘로 묶어 본다면, '주 안에서의 같은 신앙'과 '주 안에서 함께 섬기는 봉사'로 집약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바울은 아직까지는 로마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소문이나 소식을 통해서, 혹은 잠시 지나가는 길에 서로 만나게 된 기회를 통해서 일부 교인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사도 바울도 아무래도 신앙 좋고 교회생활에 충성하는 교인들을 더 잘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신자들이라야 남의 입에서도 칭찬 한 마디라도 더 자주 났을 것이고, 혹은 단 한번 짧게 만났을지라도 오랫동안 기억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신앙이 없고 열심히 교회 봉사하는 생활이 없으면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녀도 진정한 '성도의 교통'은 체험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하고 악수 한번 했다고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은 아닙니다.
  청와대 구경 가서 그 뜰에 직접 자기 발 들여 놓았다고 고위 정치인들과 줄이 닿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훌륭한 정치가가 되든지 그런 정치가들에게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든지 해야 정치계에 진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교적인 교제'만 가지고서 자기가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도의 교통은 인사말이나 악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주를 믿는 믿음과 함께 교회를 위하고 서로 성도를 위하여 섬기는 봉사를 통하여서만이 누릴 수 있음을 깨닫고, 이런 진실하고도 거룩한 '성도의 교통'을 이 교회의 교우들과 꼭 나눌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16상반절에 "16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예배하러 모인 자리에서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입맞춤'으로 인사했다고 초대교부들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인 입맞춤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성도 간의 특별한 사랑과 교제의 표현이었던 까닭에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즉 그냥 인사로만 입 맞추는 것은 사회적 교제나 다를 바 없지만, 같은 믿음을 가져서 영적 혈통이 통하고 서로 섬기는 봉사를 통하여 사랑이 오갈 때 진정 '거룩한 입맞춤'을 나누는 예수 가족, 천국 백성의 교제가 성립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16하반절에서는 "16b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덧붙였습니다.
  즉 '성도의 교통'이란 결코 한 교회 안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와 영적으로 다 통하게 되는 것임을 분명히 천명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의 참된 의미입니다.
  이 '교통'(communion)이란 말은 '깊은 영적 사귐'이란 뜻으로서 바로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사도신경에 보면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믿는다는 말이 "성도의 교통" 바로 앞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참된 '성도 교제'를 나누는 자는 온 '우주적인 교회' 안에서의 영적 교통 역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성도의 교통'만큼 순수하면서도 넓고 즐거우면서도 깊은 교제는 정말 없습니다.
  이런 영적 교제의 재미를 모르고 그저 '술 한 잔 마셔야 말이 통한다.'는 식의 교제나 알고 있는 불신자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교인이라 하면서도 여전히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의 교통'보다는 아직도 동창회가 더 재미있고 사교단체에 가입되는 것이 더 자랑스럽고 계모임에 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게만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교인들은 실제로는 여전히 '세상과 짝하고 있는' 자들이며 교회 안에서는 스스로 '영적 외톨이'가 되는 길을 사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천당교회에까지 함께 들어가서 영원히 같이 살게 될 성도가 틀림없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이 지상교회 안에서부터 '성령에 취하여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성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편지를 쓸 때 '문안인사'는 그저 가장 기본적인 예의에 불과하듯이, 교회 간의 연합회 일이나 교단의 행사에 적극 협조하고 내 집 근처 다니면서 전도하며 선교회에 가입하여 '보내는 자'들의 힘을 모으고 같은 교회 안의 교우들과 '같은 신앙과 함께 하는 봉사'를 통하여 교제하는 것은 적어도 구원의 확신을 받은 신자라면 가장 기본적인 자세일 뿐인 것입니다.

  서로 '거룩하게 입 맞추는 교제' 즉 한 교회 내에서 '성도의 교통'을 제대로 하고 있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의 문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성도의 교통' 안에 거하는 자가 됩니다.
  참된 교회들 사이의 공적 유대 관계, 전도와 선교 사명을 위한 동역, 그리고 참된 신자들 사이의 신앙과 생활의 교제를 통하여 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공회' 안에서 영원한 '성도의 교통'을 나누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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