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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그리스도인 (롬 8: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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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리스도인 (롬 8:28~30)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또 한 번 세상 뉴스의 주목이 되고 있습니다.

북경 올림픽을 개최하는 중국이 티베트의 독립을 무력으로 진압하자 전 세계의 언론이 중국을 비난하면서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달라이라마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의 불교를 이끄는 정신적인 지도자입니다.

그가 쓴 행복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인 하워드 커틀러와 대담 형식을 대화한 내용들을 묶은 형식의 책인데 이 책에서 달라이라마가 말하는 행복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이렇습니다.

“행복이란 인간적인 따뜻함과 애정을 갖는 일,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태도, 삶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태도, 순간적인 쾌락이 아니라 영원하고 지속되는 것이 행복이다.”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이 무엇입니까?
현대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만 골몰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때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이런 행복의 내용을 전 세계에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서구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을 강타하면서 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2000년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설법을 할 때는 40000명이라는 숫자가 모여서 그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2007년에 위스콘신 대학에서 설법을 할 때는 대학 강의장이 12000석인데 일찍이 매진되는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은 그의 강연에, 혹은 설법에 매혹되고 있습니다.

왜 이토록 사람들이 달라이라마에게 빠져들고 있습니까?
그가 말하는 행복론 때문입니다.
전술했지만 그가 말하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단언하지만 그의 행복론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한 이론과 너무나도 똑같습니다.

인간적인 따뜻함을 갖는 것이 행복입니다.
인간적인 애정을 갖는 일이 행복입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것 행복입니다. 
등등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달라이라마는 현대인들을 그렇게 열광시키고 흥분하게 만드는 행복주창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평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기독교적인 사상과 문화가 철저한 유럽과 미국민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행복론을 설법하는 현장에서 언제나 이렇게 역설합니다.
“그대의 외부에는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조주가 있다면 그대의 내적인 마음이 창조주입니다.”

그렇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전 세계에서 인간의 행복을 전하고 있는 위대한 종교인이지만 달라이라마와 이강덕목사가 같이 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진정한 행복은 당신 스스로가 하나님이기에 당신이 마음을 먹는 욕심 없는 마음이 곧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정말로 그러면 행복해지는 것입니까?  
진정한 행복은 내가 만들 수 있습니까?
내가 행복주식회사의 주주이며 대표이사입니까?

오늘 저는 이 점을 로마서의 30번째 강해를 통해 상고하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다시 음미하십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결론으로 도출해 낼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의 본질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행복입니다.
② 맏아들이 되는 행복입니다.
③ 의롭게 하며 영화롭게 되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행복 요소의 수여자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달라이라마가 말한 ‘나’입니까?
달라이라마가 말한 ‘내적인 마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을 진정한 영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도록 하시는 주체는 나의 내부는 물론 외부까지도 빈틈이 함께 하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바로 진정한 행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전 인격의 주관자가 되셔서 나에게 공급하시는 영적인 은혜가 없이는 우리 피조물은 행복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주체이심을 확신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까?
저는 오늘 우리 교우들과 두 가지의 은혜를 나누고 다음 주는 나머지 한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8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바울은 28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두 가지의 표현으로 표현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정의합니다.  

사실 이 두 가지의 표현은 표현이 다를 뿐이지 동의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의 필요 충족조건이 이루어지는 사람은 행복의 조건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롬 8:28절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쪽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물론입니다. 로마서 8:28절의 말씀의 내용의 핵심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전제됩니다.
그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대상이 ‘모든 것’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것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접하는 모든 것에는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이 표현은 긍정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까지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빌립보서에서 이미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빌립보서 4:13절을 잘 아시지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고 목사가 이 말씀을 선포할 때 열광하며 아멘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은 승리는 사실은 빌 4:13절에 있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4:11-12절에 빌립보서 4:13절의 승리의 비결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빌 4:11-12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사역을 감당하면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데 있어서 경험한 전이해가 무엇이었습니까?
비천에 처해보았다는 것입니다.
풍부에 처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배부름도 경험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배고픔도 경험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궁핍에 처해 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고 난 뒤에 바울은 결정적으로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임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비천일 수도 있고, 풍요로움일 수도 있고, 풍부함일 수 도 있고, 궁핍함일 수 도 있습니다.

성공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고, 호봉수가 올라가고, 아파트 평수가 넓어지고, 자동차의 배기량이 커지고, 내 은행 통장의 잔고가 많아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모든 것에는 예수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핍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한 가지로 왕따도 당해보고 등등의 여러 가지의 고난을 총체적으로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총체적인 모든 것을 경험하면서고 진정한 행복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을 믿는 것임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가 행복한 것은 과정이 힘이 들고 어려워도 그것에는 그렇게 좌지우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행복한 것은 결과가 더 아름다움을 믿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척박한 시골에서 한 장로교회 목사님의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성탄절의 어간에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하고 있는데 갑자가 아들이 거하고 있는 이층에서 쿵하는 소리와 더불어서 아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이 목사님은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들이 마룻바닥을 뒹글며 신음하는 목소리로 숨을 쉴 수가 없다고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금세라도 아들이 숨이 끊어질 것 같아서 부랴부랴 병원으로 전화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병원이 전화를 받지를 않았습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병원에 의사가 전화를 받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도 전화는 불통이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또 저 병원까지 전화를 했지만 모두가 불통이었습니다.
아들의 숨이 거의 멎을 정도로 긴박해 졌습니다.
할 수 없어서 집에서 더 멀리 떨어진 도시에 친구의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친구 의사가 아들을 전화기 옆으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친구의사가 물었습니다.
“아들의 손가락이 손바닥 안으로 감겨들어가고 있지 않나? 손가락이 창백하게 푸른 색깔을 보이지 않나”를 친구의사가 물었습니다.
“자네 말이 다 맞아”

이윽고 친구 의사가 말했습니다.
“후두종기의 팽창증상이야!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즉시 팽창종기를 잘단해야 하네. 가능하면 가장 빠른 병원에 의사를 불러야 하네. 내가 멀리 있어서 그곳까지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져서 아들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지만 최선을 다해 그곳으로 가겠네. 다시 말하지만 가까운 병원에 의사를 불러야 하네.”

그리고 친구의사와의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 장로교회 목사님은 멀리 있는 친구목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전화기를 잡고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다시 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전화를 받으면 이번에는 의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전화기의 수화기를 놓았습니다.
전화기 수화기를 놓았는데 갑자기 이 목사님에게 얼마 전에 자기가 말씀을 증거한 출 14:14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는 전화 걸기를 이제는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내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 뜻대도 되지 말게 하시고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내 아들이 죽는다하더라도 당신이 사랑하는 내 아들을 10년 동안이나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로 믿습니다.”

이 기도를 마치자 갑자기 전화 밸이 울렸습니다.
아까 전화를 했던 친구의사의 전화였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에다가 이렇게 전화를 오래해. 수십 번은 전화를 자네한테 더 했을 것이네. 전화를 끊고 내가 자네에게 가려고 했는데 마침 자네 마을에 유능한 내 후배가 봉사차 내려가 있는 것을 알았네. 외과의사 후배인데 그 친구와 통화를 했어. 자네 이야기를 했네. 지금 자네에게로 가고 있는데 위치를 잘 모르니 그 친구에게 위치를 잘 알려주게”

전화를 끊고 후배의사를 수소문해보니 집에서 10분 거리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집에 와서 아들의 종기를 절단하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수술 뒤에 친구 후배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5분만 늦었어도 아들은 생명을 잃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버지 목사의 기도, 그리고 전화를 끊음, 의시친구의 후배가 마침 그 마을에 봉사활동을 하고 있음, 그리고 수술.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28절의 살아있는 말씀이 빙거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행복합니까?
사람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만드는 행복은 영원할 수 없으며 불완전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은혜의 행복은 완전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 두 번째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9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셨습니까?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맏아들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맏아들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아십니까?

성경에서 맏아들은 항상 둘째 아들에게 치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렇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그렇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렇습니다.  

야곱의 12아들 중에서 장자였던 르우벤도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 인물입니다.
이새의 아들 중에서 장형 엘리압도 비난의 대상이지만 막내인 다윗은 주목의 대상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맏아들은 별로 탐탁치가 않습니다.
그러면 맏아들은 별 볼일이 없는 치우침을 당하는 존재입니까?
그렇습니까?

신 21:15-17입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권은 항상 상속권이 있었고 축복의 우선권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는 장자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축복의 통로가 맏아들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야곱과 리브가는 목숨을 건 도박을 한 것이고, 훗날 요셉도 아들들을 할아버지에게 축복기도를 요구할 때도 에브라임이 오른손으로 축복받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 당연한 이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맏아들에게는 축복의 통로임을 구약에서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오늘 본문의 고백은 그 연장선상에서 살펴보아야 하겠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 되게 하셨다는 오늘 본문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신 사건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바울의 이 고백을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축복해 주신다는 이 약속을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벧전 2:9절에서 베드로는 로마의 콜롯세움에서 사자의 밥으로 죽어가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게 살벌했던 로마의 한 복판에 세워진 로마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이렇게 갈파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이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 이유는 만들어진 행복 때문이 아니라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 3일 홈페이지에 자꾸만 보아도 은혜가 되는 그림과 더불어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홈페이지를 자주 이용하는 교우들은 이미 보아 아시겠지만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이용하지 못하시는 교우들을 위해서 그 그림을 보여드리며 설교를 맺겠습니다.

닭울음 소리 삽화 394번째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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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막으심과 열으심

그림과 더불어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렇게 상반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고 계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그것을 막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문득 신앙생활을 뒤돌아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사명이라고 여기며 내 뜻을 이루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으로 가는 길이든 하나님은 그 길 또한 깊숙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지금 내 가는 길 하나님의 막으심은 또 다른 새로운 길의 열으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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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과 말씀을 보면서 저도 개인적으로 몇 주간 힘이 들었는데 힘을 얻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마감하며 말씀과 함께 은혜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롬 8:28절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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