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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과 하나님의 나라 (말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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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과 하나님의 나라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오늘 어머니 날이다. 설교를 듣기 전에 어머니들을 위한 축복기도를 하고 싶다. 미국에는 아버지 날이 따로 있기 때문에 아버지 날은 다시 recognize할 것이다. 오늘 이자리에서는 어머니들을 recognize하며 축복기도를 드리기 원한다.

5 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래서 이 5 월 중에는 가정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많은 가정 중심의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다락방의 특별 교재이다. 이 교재를 가지고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였으면 좋겠다. 이것은 가정의 달에 드릴 간절한 기도제목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가정들이 단순히 치유되고 회복되며 행복해지는 것뿐 만 아니라,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왕국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 전쟁의 issue를 바라 보는 것이다.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성경이다. 다음에 도래할 신약의 세대를 열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다. 이후 400년 동안은 선지자가 세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 동안에 계시를 거두셨다. 그 당신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다. 겉으로는 제사를 드리지만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었던 세대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지 않겠다는 것은 일종의 심판과도 같은 것이었다.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지 않을 세대를 앞두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본문의 5, 6절이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마지막 구약의 말씀이 바로 가정에게 주시는 말씀이었다. 이 세대는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세대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이 임할 것이라고 하셨자. 그러나 그 직전에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보낼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하나님은 심판을 말씀하면서 동시에 심판 직전에 보내실 또 다른 선지자를 말씀하시고 있다. 그리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겠다고 하신다. 그 심판 앞에서 하나님은 한번의 기회를 더 주실 것인데, 그것은 부모와 자녀들 관계를 회복에 관한 issue였다. 아비와 자녀들의 마음이 떨어져 있어서 하나가 되지 못한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마음과 떨어져 있던 백성들의 마음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가정의 issue를 참으로 심각하게 여기신 것이고, 또한 가정은 하나님의 영적 issue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issue를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보고 계신 것이다. 순장들이 다락방을 인도할 때에 가정의 행복만을 issue로 삼지 말기를 바란다. 가정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성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본분에서 엘리야 같은 선지자는 바로 세례 요한을 지칭한다. 눅 1:17을 보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고 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영성과 능력과 말씀을 세례 요한에게 주셨다. 그는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가 회복되고, 진리가 회복되며, 그래서 주님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고 외치고 있다. 이 말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무너진 가정과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정의 issue는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것은 바로 영적 전쟁의 issue이다. 

작년에 창세기 강해시, 우리는 이 주제를 명확히 하였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흐르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야곱의 가정에 이르러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동생을 애굽에 팔고 이를 아비에게 속이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것은 불신, 속임, 아픔, 시기, 질투 속에 하나님의 가정이 망가지는 역사였다. 13년 동안 야곱의 가정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었다. 다만 큰 위기들만이 나타나고 이것이 과연 언제 끝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후에, 가족을 불러서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여는 순간에 비로소 해결된다. 저들은 그 때에 다시 하나가 되고 야곱이 열 두 아들을 축복하여 12지파를 세울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 중에 번성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땅에서 번성하라고 명령하셨다. 창 1:27-28을 보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땅을 정복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이 이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desire이다. 그러나 죄가 이것을 깨뜨렸다. 가정을 통해서 흐르던 하나님의 영광이 깨지게 되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 이후에, 가인의 족보가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 대신에 셋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족보가 흐르게 하셨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다시 보여주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세대를 통해서 흐르게 하거나, 아니면 죄악이 세대를 타고 흐르게 할 것인가의 issue가 되었다. 

그러므로 가정의 issue는 단순한 사회적 issue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issue인 것이다. 오늘 날 마귀가 하나님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영광이 끊어지기를 노리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훈련을 받고 지도자가 되며 목회자가 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보장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마귀가 우리의 가정만 끊으면 하나님의 영광의 흐름과 축복의 흐름은 쉽게 끊어진다. 그들은 이것 때문에 우리 가정을 난리를 치며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이 중요하다. 오늘은 가정의 주일이며 동시에 성령강림주일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의 주일은 항상 같이 가야 한다. 우리는 성령이 개입하셔서 우리 가정을 살려 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정을 성령님께 올려 놓기를 바란다. 이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성령님의 도우심의 역사는 과연 무엇인가?

(1)율법이 아닌 은혜가 흐르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말라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다. 심판을 하셔야 하지만 그 가운데에 한 선지자로 인해서 가정이 회복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광채를 비추시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용서하시며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뜻이다. 그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바로 내가 죽고 낮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정에 바로 이 은혜가 있어야 한다. 용서와 너그러움과 second chance가 있어야 한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second chance를 주신 주님은 그녀의 가능성을 보고 은혜를 주신 것이었다. 

우리에게 용서할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담을 허물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나 자신도 설교를 할 때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간구한다. 그 기름부음 중에 하나가 바로 용서이다. 때로는 목사인 나 자신도 마음에 요동이 생길 때가 있다. 이 때에 용서를 하지 못하면 마음에 응어리가 생기게 된다. 마음이 완악해지면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막히게 된다. 그 상태로는 말씀을 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의 힘으로 용서를 해야 한다. 그래야 은혜가 흐르고 주님께서 역사하신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가지고 올 때에 형제를 용서할 일이 있다면 돌아가서 그 형제와 화해하고나서 제사드리라고 하신다. 기름부음이 흐르게 해야 하는데 응어리를 가지고는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못한다면 성령께서 하도록 간구하라.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하나님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을 격노케 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scorecard를 가지고 그들을 push하니 그들을 노엽게 하고 마는 것이다. 그들을 훈련하고 훈계하여야 하지만, 하나님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은혜의 가능성을 주고 축복하며 양육할 것을 요구하신다. 가정에 은혜가 흐르기 위해서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 성령님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성령의 은혜가 강같이 흐르게 해야 한다. 

(2)성공이 아닌 성품이 흐르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잠언 22:6을 보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의 성품을 의미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성공주의에 빠져 살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성공의 기준을 가지고 자녀들을 준비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성품을 중요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모세를 보라. 그는 애굽의 문화와 세속 안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섭리로 친어머니의 품에서 양육되었다. 

따라서 그는 바로의 아들로 자랐지만 하나님의 성품으로 양육되어, 바로의 아들이라 칭함으로 원치 않았다. 잠시의 쾌락보다는 하나님이 주는 고난을 선택하는 성품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연단을 통하여 쓰임을 받았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성품을 가르치라고 요구하신다. 

딤후4:7-8을 보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사도 바울은 임종을 앞두고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과 자신이 받을 면류관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일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끝까지 이 경주를 하며 믿음을 지킨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단순하였지만 끝까지 변함없는 믿음의 자세를 지켰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품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의미한다. 일편단심의 믿음과 마음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의 생애과 자녀들의 일생이 하나님 앞에서 모세와 바울같은 영적 성품으로 일관되기를 소원한다.

(3)소유가 아닌 청지기로서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시편 127:4을 보자.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우리의 자녀를 장사가 가지고 있는 화살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화살은 모양새를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사의 목적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화살은 장사의 손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주어진 화살과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과감하게 let go해야 한다. 우리가 let go할 것들을 그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stop할 것이다. Let go해야 우리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인생의 길에서 장벽을 만날 때에 죽을 힘을 다해서 노력만 하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넘치게 하라. Let go 하면 하나님이 우리로 그 장벽을 넘어가게 하신다. 자녀들을 놓고도 let go 할 만한 것을 let go 하라. 그들을 그저 하나님께 드리라.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였다. 또한 가정의 문제를 let go 하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세워지고 드려지기 위해서 과감하게 let go 하라. 여러 종류의 배를 가지고 인생을 비유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뗏목 : 이 배는 그저 물결에 따라는 흐른다. 방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인생을 살아서는 안된다.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다.

노짓는 배 : 이 배는 내 힘으로 간다. 내가 열심히 노를 지으면 갈 수 있고 내 목적지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배에는 한계가 있다.

돗단 배 : 이 배에게는 물론 내가 할 일이 많이 있다. 돗을 잘 준비해야 하고 방향을 향하여 잘 펴야 한다. 그외에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이 배는 결국 바람의 힘으로 powerful 하게 항해하게 되고 정확하게 목적지를 향한다.

우리는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크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믿음의 날개를 넓게 펼쳐야 한다. 율법이 아닌 은혜가 흐르게 하고, 성공이 아닌 성품이 흐르게 하며, 소유가 아닌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이 성령의 바람을 주셔서 우리 인생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큰 일을 이루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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