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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는 행복자입니다! (신 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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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행복자입니다! (신 33:29)
 
1.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새벽기도회와 개인 큐티 본문이었던 신명기가 지난 주간에 끝이 났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이 신명기가 가지고 있는 대단히 크고 깊고 놀라운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❶ 40년 전, 이집트에서 갓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처음으로 선포되었던 율법을 40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첫 선포자인 모세가 설교했다는 면에서 신명기는 특별합니다. 물론 신명기를 통하여 선포된 언약의 말씀을 받은 대상은 처음에 이 말씀을 받았던 ‘그때 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다음 세대’, 즉 광야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명기는 같은 설교자가 같은 내용을 두 세대에 걸쳐서 설교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❷ 두 번째로 이 신명기는 ‘출애굽제2세대’, 즉 ‘광야세대’이자 ‘가나안제1세대’에게 이제 곧 가나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것인가?’를 미리 말한 것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리고 주변 종족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할 지를 말씀한 것이 신명기라는 것이죠. 따라서 신명기는 선포되는 현재보다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미래지향적인 말씀이라는 것, 이것이 신명기의 특별한 점입니다. 

❸ 그리고 신명기가 특별한 세 번째 이유는 신명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이고 사상적인 특징 때문입니다. 그것을 학자들은 “신명기사관” 혹은 “신명기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명기신학”은 모세가 신명기를 기록했다는 것보다 훨씬 후인 약 10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있을 때의 어느 율법학자가 기록했다고 하는 주장이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 하>까지 신명기적 신학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는 과정에서부터 왕국이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까지의 역사를 "왜 이와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라는 답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약 이제라도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새 출발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고 결론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 신명기 신학입니다. 물론 보수신학에서는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보지만, 적어도 이 신명기신학 이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신명기의 가치와 신앙적 깊이가 크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신명기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 이유는 신명기를 묵상하고 설교하는 내내 저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한 마디 때문이었습니다. 그 한 마디는 바로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정말 크고 놀라운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할 경우,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저주가 임하여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생겨날 것이며, 심지어 그의 자녀의 인생에까지 그것이 방해가 될 것이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순종에 대한 위협보다는 순종의 중요성을 그만큼 강조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끝 부분에 와서, 모세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을 묵상하다가,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새겨졌던 “순종”을 대신할 수 있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신명기는 모두 34장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 중에서 모세의 설교는 33장으로 끝이 납니다. 34장은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명기 33장은 모세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설교의 가장 마지막 말, 즉 최후의 그 한 마디 때문에 그만 제 심장이 멎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 29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순간, 여러분에게도 감동이 오든가요? 지금은 감동이 안될지 모르지만, 이 말씀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특히 여기의 “행복자”라는 말은 주로 감탄사나 감탄문으로 사용되는 말인데, 그 의미는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한 그 의미는 '너는 지극히 행복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 너만한 행복을 가진 사람은 없다', ‘네가 가진 행복은 최상의 행복, 그 이상의 행복이 있을 수 없는 최대의 행복이다’라는 뜻입니다. 지상 최대의 행복,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그것과 비교할만한 것이 전혀 없는 최고의 행복을 이스라엘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에 수긍하고 “아멘”하십니까?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왜 모세는 이 말을 자신의 최후의 한 마디로 남겼을까요? 40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인 400년 전부터 이스라엘이 꿈에도 소원하며 그리던 약속의 땅이자 축복의 땅인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게 되었으나 자신은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부러워서 이런 말을 할 수 도 있습니다. 또, 비록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주어진다는 길고 긴 설교를 마치면서, 이런 것 저런 것 떠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는 것’ 자체가 행복의 이유라고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밝히는 이스라엘이 행복자인 이유는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모세가 본문에서 밝히는 행복자인 이유는 세 가지인데요. 그것을 살펴보면서, 오늘 여러분들이 행복한 사람인 이유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2. 성도가 행복자인 이유

1) 여호와의 구원을 얻었기에

하나님의 백성, 즉 성도 여러분들이 행복자인 첫 번째 이유는 “여호와의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원(야샤)”이라는 말은 '제한되다'나 '고통을 야기시키다'를 의미하는 ‘차라르’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즉 구원이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든 국가적인 것이든, ‘원수들이나 전쟁, 전염병, 기근 같은 자연 재해, 그리고 대대적인 심판’ 등 인간의 삶에 고통을 주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이러한 모든 종류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봅시다. 

❶ 그들은 430년 동안 이집트의 노예가 되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특별이 지정된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그들이 불결한 백성이고, 그들이 하는 목축업이 부정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집트 정부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게 되었을 때는 공사장 인부로 막 부려먹었습니다. 그들이 당한 수모와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과 펴신 팔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노예살이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이집트 전역을 휩쓸 때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다치거나 상하지 않고 바로 그 날 밤에 해방을 맞이한 것입니다. 

❷ 그리고 이집트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향하던 중,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 바다요 뒤에는 서슬이 시퍼런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왔을 때, 하나님은 홍해를 둘로 가르셔서 그 가운데 난 길을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홍해 한 가운데를 지났지만, 바로의 군대는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모조리 수장되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스라엘은 원수인 애굽 사람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바다를 무사히 안전하게 건넌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들어갔을 때,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을 뻔 할 때도 있었고, 음식이 없어 굶어죽게 될 때도 있었으며, 사막을 활개치며 다니던 부족민들에게 공격을 당하여 죽게 될 위기상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화강암처럼 굳고 딱딱한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의 목을 축이셨고,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어 먹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원수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도 그들을 물리치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 백성 이스라엘이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그 고통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서 이스라엘이 행복자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이 되어 자유도 주권도 아무 것도 없이, 죽이면 죽이는 대로 살리면 살리는 대로 그들에게 매여 살았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알기 전에 사탄에 매였으며, 전통과 관습에 매였으며, 죄 가운데 먹고 죄 가운데 살던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지난 삶 우리의 지배자였던 사탄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릴 적, 고향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하면 전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바다를 향해 절을 하면서 풍어를 빌었습니다. 비록 어릴 때지만, 마을 입구에서 바다로 펼쳐진 하얀 광목천을 둘로 가르며 굿을 하는 무당의 모습이 좋아보였습니다. 무엇을 해도 잘 안되던 아버지께서 굿을 여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잡았던 그 큰 대나무가 가녀린 가지처럼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억지로 고향에서 부산으로 이사하게 하시고, 아버지를 강권적으로 붙드셔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당신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세월 동안, 앞으로 가자니 홍해바다요, 뒤로 돌아서자니 우리를 공격하려는 적들이 버티고 있는 상황도 우리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절대로 뒤돌아 가지는 말아라’ 하시면서 인생의 바다로 발을 내디디게 하시고, 그 바다를 무사히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있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 하고 장교로 군대 생활을 4년 가까이 하니까 영적인 감각도 많이 떨어졌고, 세상 재미도 좀 맛보았고, 동서가 자기 사업을 같이 하자고도 하고, 무엇보다 목회라는 것이 무서워졌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직업을 갖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제대를 앞두고 정말 망설여졌습니다. 그렇게 회의와 의심의 바다 앞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은 제게 ‘그대로 계속 가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심의 바다 끝에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난 삶이 얼마나 광야와 같았습니까? 가도 가도 모래언덕 뿐, 부느니 광야의 모래바람이요, 제대로 쉴 곳도 편하게 먹고 마실 여유도 없이 살아왔지 않습니까? 또 우리를 공격하며 괴롭히는 사람과 일들은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괴롭히고, ‘예수 믿는다면서 남편 꼴이 그게 뭐냐?’, ‘예수 믿는다면서 자식들이 왜 그 모양이냐고?’ 별 별 공격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이 약속의 땅, 축복의 자리에 여러분이 있도록 구원의 하나님이 여기까지 여러분을 인도하셨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 아들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사셨으며, 이 세상에서 우리를 당신의 특별한 사랑받는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2) 여호와의 도우심과 보호하심 때문에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우리가 행복한 이유를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저와 여러분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우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앞에서 살펴본 “구원”이라는 말에도 이 “보호”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예로, "구원의 방패"(시18:35), "구원의 투구"(사59:17, 엡6:17), "구원의 옷"(사61:10) 등이 그것입니다. 즉 구원은 고통이나 전쟁터에서 건져내는 것만이 아니라, 수많은 위험과 고통을 막아준다는 의미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미는 29절의 중간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여기서 “돕는다-에제르”는 말은 말 그대로 ‘도움,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방패-마겐”이라는 것은 ‘작은 원형의 방패’로서 고대 전투에서 보병과 장교들이 들고 다니던 작고 둥근 방패를 말합니다. 이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겉에 가죽을 붙이고 때로는 기름을 발라서 강하게 하는 동시에 화살 등이 잘 미끄러지게 했습니다(삼하1:21, 사21:5). 

오늘 본문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의 방패가 되어서 여러분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나, 찔러 들어오는 창이나, 원수들이 휘두르는 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은 여러분의 “영광의 칼”이 되시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 “칼(br,j,(2719, 헤레브))”이라는 말이 약 400회 이상 나오는데요. 때로는 이것이 살아있는 물체처럼 지칭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칼이 되셔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존 오트버그’라는 목사님은 자신의 책 「물 위를 걸으려면 단순하게 믿으라」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뉴포트 해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남자 셋이 한 남자를 구타하고 있었고, 피해자는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술집 안에서 벌어진 싸움이 바깥으로까지 번진 것이었습니다.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만 같아서 목사님과 친구들이 그리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오트버그 목사님이나 친구들은 싸움 말리는 일에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그들에게 ‘싸움을 그만 두라’고 했고, ‘이제 한 판 붙겠구나’하고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량배들이 목사님과 그 일행을 보더니 갑자기 겁에 질린 얼굴을 하더니 슬금슬금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목사님은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바로 자신의 뒤에는 자신이 그때까지 본 사람 중에 가장 체구가 큰 사나이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키는 2미터 정도에 몸무게는 100킬로그램 이상 되는 마치 헤라클레스와 같은 거구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사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거기에 서 있었을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 불량배들은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그의 엄청난 덩치와 잘 발달된 근육을 보고서는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오트버그 목사님은 그 덩치의 사나이를 보면서,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느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트버그 목사님이 만난 그 거구의 사나이보다 더 크고 강력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여러분을 “돕는 방패시오” 여러분의 “영광의 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심을 잊고서 두려움 속에 살지 마시고, 때로는 방패가 되시고, 때로는 칼이 되셔서 여러분을 지키시기는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승리하게 하심 때문에

세 번째로 오늘 본문은 우리가 행복한 이유를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저와 여러분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서 “복종한다-카하쉬”는 말의 의미는 '실망시키다, 실패하다, 야위게 되다'입니다. 즉 대적이 여러분을 공격하러 왔다가 실패할 것이고, 실망만 할 것이며, 그리고 그 패배로 인하여 살이 다 빠져 뼈만 남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거기다가 이 말에는 '굽실거리다'라는 뜻도 있습니다(삼하22:45). 따라서 여러분,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라는 말은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오고, 그들이 먼저 공격해 올지라도, 그러나 그들은 패배할 것이고, 그 패배로 인하여 뼈에 가죽만 남게 될 것이고, 다시를 달려들지 못하고 굽실거리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두 번째 말씀은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입니다. 여기서 높은 곳이란 ‘요새와 같은 높은 산지’, ‘전쟁터’, ‘산당’, 즉 '높은 곳에 있는 예배 장소'를 뜻합니다. 따라서 “높은 곳을 밟을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전쟁터에서 이겨 원수의 땅을 밟을 것이며, 그들의 난공불락의 산성을 점령할 것이며, 그들의 신전 예배처소를 점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밟으리로다”와 연결해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거기서 개선행진을 벌일 것이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확실한 승리에 대한 보장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롬8:37). 사실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귀가 우리에게 복종할 것이고, 우리의 원수들, 우리 앞에 있는 삶의 장애물들,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우리를 꺾지 못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에게 닥쳐 올 미래는 늘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재물이나 명예에 의존하여 안심하고, 또는 반대로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에는 하나님께서 주실 승리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약해보이고, 때로는 어설퍼 보이고, 때로는 패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성도가 부를 행복의 노래

말씀을 맺겠습니다. 

9세기에 세계를 지배했던 사라센 제국의 압둘 라만 3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왕국을 49년 간 통치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의 수입은 약 3억 달러에 달했고,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3,321명의 아름다운 왕후들을 거느렸고, 616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오랜 세월 동안의 영예로운 통치에도 불구하고 내가 진정으로 행복을 누린 날은 단 14일 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외적으로 볼 때 도저히 행복할 것 같지 않은데 행복의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서도 불행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단칸방, 월세방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화려한 빌라에서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자신의 최후의 말을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바로 여러분들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돈이 많기 때문입니까?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권세나 명예가 있기 때문입니까? 글쎄, 우리 가운데 행복을 느낄 만큼 높은 권세를 가진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남보다 더 높은 지식과 학문을 쌓았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이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행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 가운데 살기 때문이며, 그리고 장차 확실한 승리를 보장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들로 인하여 모세는 오늘 여러분을 향하여 “행복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실 뿐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행복을 이 세상에서 누리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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