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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다 (마 7: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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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다 (마 7:24~29)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 호명 행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께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모두 감사와 설렘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못 생긴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지요? 하물며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인 우리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저는 어제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첫 걸음>(First Step, Saint-Remy, January 1890)을 꺼내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나무로 에워싸인 남루한 농가 바로 앞은 텃밭입니다. 왼편으론 건초 더미를 싣고 있는 외발 수레가 보입니다. 그 옆으로 한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을 벌리고 있습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빠꼼히 열린 문이 보이고, 문 밖으로 허리를 굽힌 채 아기를 붙들고 있는 여인이 보입니다. 아기를 데리고 나온 엄마일 것입니다. 아기는 손을 뻗으며 아빠를 향해 나아가려 합니다. 그 마음은 이미 아빠의 품에 안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호는 이 모습에서 경이감을 느낀 게 분명합니다.

누군가가 떼기 시작한 첫 걸음이 마침내 100년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100년 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러일전쟁으로 조국이 황폐하게 변하고, 군대조차 해산되어 누구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없던 그 때, 이 민족의 가슴에 하늘의 불을 지피기 위해 헌신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국권상실과 가난으로 까맣게 타버린 가슴에 희망의 불씨를 붙이기 위해 스스로 불쏘시개가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붙인 작은 불씨가 오늘까지 타오르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입니다. 

고진하 목사는 우리 교회를 100년의 나이테를 간직한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100년의 나이테는 그 간격이 고르지 않습니다. 햇빛 양양하던 때는 많이 자랐고, 혹독한 시련의 시기에는 잘 자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뿌리는 더 깊은 곳을 향했습니다. 일제 말기와 전쟁 시기를 지나면서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을 던졌던 이들 덕분에 우리 교회는 이렇게 든든히 서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 교회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성도들을 마음으로나마 이 자리에 모시는 까닭은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부르고, 그분들은 우리를 부릅니다. 이렇게 우리는 사랑의 끈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까닭은 지나온 날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소명에 응답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는 매우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분쟁의 소식이 들려오고, 생명 파괴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소비주의의 망령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다시금 우리에게 인간의 등불을 밝혀 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물질주의에 떠내려가는 사람들과 교회들을 향해 ‘어이!’ 하고 외쳐야 합니다.

• 신앙 실천(ortho-praxis)

우리 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여야 하는가를 묵상하다가 저는 오늘의 본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구현해가야 할 삶의 목표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작음을 인정하고, 형제자매를 존중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용서와 화해를 추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고 살아가는 것…이것이 삶의 강령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일그러진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이 참 적실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3:12)

신앙생활이란 그래서 일생의 경주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신앙생활은 ‘~ing’, 즉 진행형이지, ‘be’ 곧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래서 끝없는 자기 부정의 과정이고,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오름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인생의 길을 보았고, 예수 안에서 참다운 생명을 보았고, 예수 안에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인력에 끌리는 우리는 예수를 길이라 고백하면서도 그분이 걸었던 길은 한사코 걷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면서도 예수 정신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를 진리라고 하면서도 예수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통렬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마7:26-27)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의 운명은 마치 광야의 와디(乾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비행기에서 메마른 광야 지역을 내려다보면 물은 흐르지 않지만 뱀처럼 구불거리는 선이 보입니다. 그게 바로 와디입니다. 건기에는 바짝 말라 있지만, 비가 내리면 격류가 되어 흐르는 강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와디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하고 계십니다. 저는 신앙생활은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의 깨달음은 가슴의 뜨거움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가슴의 뜨거움은 손과 발의 부지런함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번역되지 않고 남은 부분은 그릇된 권위주의로 변하거나 영적인 교만으로 바뀌게 마련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교회의 형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규모가 크고 화려한 교회는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 정신에 투철한 교회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땅의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찬탄하며 말합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하지만 주님의 응답은 냉랭합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13:1-2). 제자의 눈은 성전의 위용을 더듬고 있지만, 주님의 눈은 그 가혹한 운명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쉬 스러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굳게 붙들지 않는 교회는 ‘강도의 굴혈’이 되거나 ‘회칠한 무덤’이 되기 십상입니다. 

• 김 목수의 집 그리기

교회 설립 100년은 우리 교회를 다시금 반석 위에 세우는 기점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공회대 석좌교수이신 신영복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힌트가 될 수 있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그는 옥중에서 만난 목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그가 참다운 노동자를 만난 것은 어쩌면 그게 처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옥에서 친해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집 그림을 그리면 지붕부터 그리고 벽과 창문을 그린 후 바닥을 그립니다. 그런데 그 목수는 자기가 집을 짓던 순서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먼저 바닥을 그리고, 그 다음에 담과 창문, 맨 나중에 지붕을 그렸던 것이지요. 신영복 선생은 몸으로 산 사람과 머리로 산 사람의 차이를 거기서 절감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교회가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교회는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그 기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입니다. 제아무리 세상이 들끓어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힘이 제 아무리 높은 탑을 쌓아도 그 탑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고, 또 백성들 가운데서 일하시면서 하늘나라를 위한 순례 여행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도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에게 하늘의 숨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절망에 휩싸여 있다가도 우리가 희망을 향하여 눈을 들고, 미움과 원망의 파도에 휩쓸리다가도 사랑의 해안에 당도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딪치고 멍들고 넘어지고 울음을 삼키면서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싸움은 주님의 싸움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기초를 다진 후에는 창틀을 넣고 벽돌을 쌓아 담을 세우게 됩니다. 교회에도 창문이 있어야 합니다. 창문은 햇빛을 받아들이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교회는 ‘구원의 방주’라는 이미지에 집착해왔습니다. 사람들은 죄악의 물결이 찰랑이는 세상과 단절된 자폐적인 공간의 이미지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하지만 창문이 없는 교회는 스스로를 자만심 속에 가두는 감옥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 교인이 시민 사회 단체의 후원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시작한 일인 일 구좌 갖기 운동은 우리 교회가 창문을 열고 세상과 나누는 악수였습니다. 창조 질서의 창문으로서의 햇빛 발전소 설치도 역시 교회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능동적으로 풀어갈 책임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캄보디아에 우물을 파주고, 케냐 어린이들에게 학비를 보내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란 누군가를 껴안을 때 팔이 한없이 늘어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힘을 다하여 사랑할수록, 섬길수록 사랑의 능력은 커집니다. 

• 어깨를 겯고 하나가 되자

창문을 넣은 다음에는 벽돌로 담을 쌓습니다. 담을 쌓기 위해서는 수직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요즘은 기구들이 발달해서 레이저로 수직과 수평을 잡지만 과거에는 실에 맨 추를 나무 기둥에 매달아 아래로 늘어뜨려 중심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중심이 하나님의 뜻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유력한 사람의 생각이나, 프로그램이 교회의 중심이 될 때 교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솜씨 좋은 조적공은 수직을 잘 잡고는 벽돌 한 장씩 쌓아올립니다. 벽은 수평으로 어깨를 겯고 선 벽돌들에 의해 높이 올라갑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의 구성 원리입니다.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지 않고 형제자매에게 어깨에 빌려주는 사랑, 그리고 ‘그대 덕분에 내가 있다’며 형제자매에게 기대는 겸허함이 교회를 교회되게 합니다. 

저는 지금 건물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바울은 몸의 이미지를 가지고 교회를 설명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몸의 지체들 가운데는 유난히 약한 지체도 있지만 그 지체야말로 몸 전체를 위해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효율성과 속도를 숭상하는 세상은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설 자리가 없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각자에게 품부된 은사에 따라 공동체를 섬깁니다. 모두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공동체를 하나로 매는 끈은 ‘서로에 대한 고마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은 친히 지붕이 되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요한계시록은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계7:15)이 되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우리는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우리들은 정의파다’라고 노래하며 어둔 세상에 부딪쳐 나갔습니다. 홀로라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홀로가 아닙니다. 주님이 지붕이 되어 함께 계시고, 언제나 우리 어깨를 받아주는 형제자매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미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추수할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불의한 세상에 나아가 비폭력적인 사랑의 불을 지를 사람들, 생명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죽어가는 나무에 물을 주듯 정성을 다해 생명을 돌보려는 사람들…우리 교회의 소명은 그 부름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선교 2세기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입니다. 

• 새 날을 향한 발돋움

조금 힘들고,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해야 하기에 그 일을 감당할 때 교회의 품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나아가 사랑으로 사람들을 호명하면,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이 찾아와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100년 전 누군가가 뿌린 겨자씨 한 알이 움트고 자라나 새들의 품이 되어준 것처럼,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은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당장에는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는 분명히 그 열매를 따먹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100년이 된 교회가 왜 큰 예배당을 건축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하고 편안한 예배당이 아니라, 예수 정신입니다.

광야에 사는 베두인족들의 천막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소박한 그들의 삶을 보며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한 제 삶이 부끄러웠습니다. 시인 김수우는 <천막>이라는 시에서 베두인족의 신성한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둥그렇게 바닥을 펴면 세상의 중심이 생긴다
네 개의 나무기둥을 세우면 지상의 축이 팽팽해진다
지붕을 펼쳐 얹으면 천막은 아침 신전이 된다”

생명과 평화 세상을 이루기 위한 순례에 나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단출한 마음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부르고, 우리는 세상을 부릅니다. 이런 상호 호명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입니다. 예수 정신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세상이 보기에는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우리교회는 품 넓은 교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새로운 날을 향해 발돋움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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