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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의 힘 (마 18: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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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힘 (마 18:23~35)

  한 여름, 수박이 한창인 계절, 청년들은 동네에서 고약하기로 소문난 할아버지의 수박밭을 밤마다 습격하듯 수박 서리를 했습니다. 화가 난 할아버지가 아무리 소리치고 경고해도 청년들은 아랑곳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지혜를 써서 경고문 하나를 붙였습니다.

  "이 수박 중 한 통에는 농약이 주사되어 있음-주인백." 물론 농약을 주사한 것은 아닙니다. 서리하던 청년들의 발길이 뚝 끊겼습니다. 일주일 뒤 또 다른 경고문 하나가 붙었습니다."이 수박밭 또다른 한 통에 농약을 주사했음-동네 청년 씀." 그 후 청년들은 한 통의 수박서리도 할 수 없었고, 할아버지도 한 통의 수박을 먹지도, 팔지도 못했습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심에 사로잡혀 살며 보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으로 악을 갚으려 하면 서로 손해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단의 도구가 되어 불행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어느날 예수님께 제자 베드로가 나아와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만 용서할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서를 일깨워 주고자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가 유명한 일 만 달란트 빚진자와 일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굳이 1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쟁이와 또 그에게 일 백 데나리온 빚진자의 비유로 용서를 설명하셨을까요.

  1. 우리는 큰 용서를 받은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한 임금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임금님이 빚 진 신하를 불러 빚을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는 어쩌다가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만 달라트라는 거액의 채무를 안고 있었습니다. 

  1만 달란트는 당시 화폐개념으로 한 사람이 약 5000번 정도 계속 태어나 돈을 벌어 겨우 본전만 갚을 수 있는 천문학적 액수입니다. 자기 재산은 물론 자신의 몸과 아내 그리고 자식까지 노예로 팔아야 할 상황입니다. 그는 임금님께 엎드려 간청합니다. "제발 노예로 팔지말고 기다려 주세요." 

  임금님은 채무자에게 지은 빚이 너무도 커서 기한 연장으로도 도저히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임금님은 그와 그 가족을 불쌍히 여겨 아예 탕감하겠다는 파격적인 은혜를 보여줍니다.빚쟁이는 이제 자신을 근심케 하던 모든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와 죄책감에서 해방됐습니다.하늘을 날 듯이 황홀하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1만 달란트란 어떤 사람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돈입니다.1 달란트는 일만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 한 사람이 하루 일하고 받는 일당입니다. 하루 일당 오만원만 친다해도 1 달란트는 오억원에 해당됩니다. 1만 달란트는 얼마입니까?  오억 곱하기 일만하면 얼마입니까? 엄청난 돈이라 저는 계산이 잘 안됩니다. 

  성경의 비유에서 채권자는 하나님이며 사람들은 1만 달란트 빚쟁입니다.하나님의 공의 앞에 의인은 결코 없습니다.이런 엄청난 빚의 해결방법은 오직 채권자가 탕감해주는 길뿐이라는 것입니다.구원의 역사는 내 공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주홍같이 붉은 죄가 눈과같이 희어졌습니다.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죄가 깨끗이 용서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바로 내게 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죄사함받고 구원을 선물로 받았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식으로는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지만 삶속에서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마치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은 것처럼 자신의 의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또는 자신의 믿음을 은근히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일 만 달란트의 빚을 한 푼도 받지 않고 탕감해준 임금님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다 탕감해주시고 우리의 더럽고 부끄러운 행위를 지워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탕감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무리 자기 몸을 학대하며 평생을 고행을 하며 죄값을 치룬다해도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떨어져 억만년을 고통을 겪는다해도 죄값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죄가 전혀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신 죄값을 치루시고 형벌을 받고 죽으심으로 여러분과 저의 죄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갑자기 우리의 큰 죄를 다 탕감해주셨을까요?  불쌍히 여기셔서 탕감하셨습니다.(2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다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많은 세월 죄짐에 눌려 신음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죄때문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죄로 인해 자유를 잃고 사단의 종노릇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무 조건없이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의 값을 치루지 않아도 되게 깨끗이 지워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늘 감격하며 그분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단번에 공짜로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늘 감사하며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기억하고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에 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은 너무나 기뻐 집으로 돌아가다가 동료를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입니다. 그래서 붙잡고 빨리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료는 "조금만 참아주게나. 내 곧 갚겠네." 하고 사정햇으나 듣지 않고 빨리 빚을 갚도록 고소하여 감옥에 가두웠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이 임금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탕감받은 종은 탕감이 취소되고 그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얼핏 채무의 문제같지만 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용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엄청나게 큰 용서를 받은 존재임을 잊고 삽니다. 하나님앞에 큰 잘못을 수없이 범하여 영원히 지옥에서 죄값을 치루어야 마땅한 운명이었지만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모든 죄가 다 탕감받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너무 큰 용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저주받아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서 벗어나 은혜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처럼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마음이 아주 너그러워져서 다른 사람의 웬만한 잘못은 용서하고 이해해 줄만 한데 용서에 인색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 만 달란트 빚진자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작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보며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작은 손해를 입힌 사람이 있으면 끝까지 따라붙어 남김없이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아픈 상처를 받았던 것을 잊지 못하겠다고 하며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몇 배나 더 큰 상처를 입히려고 합니다. 

  놀랍게도 그 대상은 철천지 원수가 아닙니다. 자기와 함께 사는 가족입니다. 자기와 동행하는 친구입니다. 함께 비전과 사명을 나누는 교인들입니다. 동역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허물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미워하며 원한을 풀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속좁고 은혜를 쉽게 잊어버린 백성들을 보실 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나는 너의 일만 달란트에 해당되는 죄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너는 그 백만분의 일에 해당되는 형제의 작은 허물도 용서할 수 없느냐?" 라고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자답게 주변의 이웃에게 빚을 탕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은혜를 잊지 않고 탕감해주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본문 33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니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빚은 보이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갚는 것이 바로 주님께 빚 갚는 삶이라는 뜻입니다.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에게 잘못을 하였을 때 미운 마음, 섭섭한 마음이 솟아날 것입니다. 악착같이 빚을 받겠다고, 되갚아 주겠다고 하기 쉽습니다. 악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힘들면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셨음을 바라보며 여러분도 그를 불쌍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서윤범 할머니는 1991년 서울 여의도 광장 자동차 질주 사건으로 여섯살된 손자를 잃었습니다. 손자를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 한 할머니는 처음엔 도저히 범인 김씨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남편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며느리마저 암으로 고생하다 숨지는 불행이 겹쳤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용서와 분노 사이를 오갔습니다.

  훗날 할머니는 '일 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 백 데나리온 빚진 자'(마 18:23∼34)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할머니는 김씨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 역시 불쌍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김씨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아침마다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평생 갇혀 지내온 분노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용서하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의 쓴 뿌리는 결국 인체를 산성화시켜서 효소의 활성도를 떨어뜨리며 각종 병원균에 대한 저항력도 감소시켜 병적인 체질로 만든다고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쓴 뿌리는 정서의 독으로 주변을 오염시켜 스스로를 고립화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일생동안 과거의 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자신의 육체와 인격을 파괴뿐 아니라, 신체적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불면증, 변비, 소화불량, 두통, 면역력 저하, 세포재생산 능력의 감소, 암 등 질병을 유발합니다.  평생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심을 품고 살아간다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자신입니다.  복수를 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몸과 정신과 영혼까지 파멸로 몰고하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용서는 힘이 있습니다.  치유효과가 있습니다. 정서적 고통을 완화해 주고, 우울과 불안을 감소시켜주며, 개인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며, 분노의 폭발을 막아주며, 분노와 죄의식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 주며, 해를 준 사람으로 말미암은 증오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용서는 신체적 치유 효과가 있습니다. 건강을 촉진시켜주고, 혈압을 낮추어 줍니다. 용서는 건강을 가져올 뿐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용서는 창조성과 활력을 강화하며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용서는 영적 힘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하고 진정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용서란 망각이 아닙니다.  용서는 능동적인 행동이며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는 과정입니다. 용서는 행동이며 선택입니다.  과거는 한 조각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상처라는 것이 어차피 인생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그 해결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용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용서를 경험하면 자유의 문이 열립니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평안과 관용, 자비가 샘솟듯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사랑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 스펄전이 젊었을 때 스데반에 대해서 설교를 하던 중, 한 사람이 질문을 하는 바람에 설교가 중단되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뭘 하셨는지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당혹스러운 질문인데 스펄전은 그에게 담대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이 기도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원수들에게 돌로 맞아죽을 때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더욱 큰 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해코지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용서의 힘을 통하여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큰 용서를 체험한 후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어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자기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불행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여 저들을 해방시켜 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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