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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떨어지는 시험을 막기 (행 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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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시험을 막기 (행 20:7~12)

교회의 모임 속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말씀을 따라 살려는 사람도 있지만 말씀을 외면하고 구경꾼으로 오는 사람도 있다. 교회의 모임에는 신앙의 수준도 똑같지 않다. 글자 그대로 아이 단계의 사람도 있고 청년 단계의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아비 단계의 사람도 있다.

여기서 아이와 청년 단계는 아직도 돌봐야 할 수준의 성도다. 나이가 어리고 젊어서 아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신앙 수준이 미숙하면 아이요, 젊은이라고 할 수 있다. 

요21:18에 “네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신 ‘젊어서는’이란 주님의 말씀은 미성숙한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늙어서는’이란 말씀은 성숙한 상태를 말한다. 즉, 성숙하지 못할 때는 ‘네가 원하는 대로, 네 중심대로 움직이는 신앙 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성숙한 사람이 되면 ‘남이 원하는대로 이끌려가는 상대방 중심의 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늘 드로아의 집회에서 유두고라는 사람이 삼 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이 유두고를 가리켜 행20:9에서 ‘청년’이라고 부르고 있고 행20:12에서는 ‘아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보면 미성숙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회의 근심 걱정거리가 되었다. 바울의 말씀 집회가 한밤 중까지 계속되는데 떨어져 죽는 장본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의 집회의 방해자가 되었다. 바울의 말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졸다가 사고자가 되었으니 사람들이 말씀의 떡을 떼는 귀중한 시간을 잠시 중단하게 하는 원인자가 되었다.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해도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모두 유두고처럼 걱정, 근심거리가 되기 쉽다. 무엇보다 예배 집회 시간에 방해자가 되기 쉽다. 

우리는 유두고라는 아이 신앙의 이야기를 통해 떨어지는 사고의 시험을 막는 몇 가지 필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아이 신앙을 돌보는 사랑이 필요하다. (행20:10)

아이 신앙은 자기의 소견대로 행동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보라. 교회에 오면 아무데나 기어오르고 뛰어다닌다. 아이들은 마음껏 놀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예배 중에는 아이들의 의지대로 내버려두면 안된다. 내 버려두면 넘어지고 떨어지고 다치고 사고를 낸다. 더 나아가 아무데나 방뇨도 하고 예배실을 놀이터로 삼는다. 그래서 부모가 돌봐야 한다. 교회에서는 뛰지 말라고 타이르고, 야단도 쳐야 한다. 
이처럼 어린이를 돌봐야 하듯 아이 신앙의 소유자도 돌보는 사람이 필요하다. 돌본다는 것은 사랑이요, 관심이다. 그 사람의 욕구와 형편을 이해하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이다.

CM 모임의 가치 중의 하나는 돌봄이다. 돌봄이 이루어지면 잘 자라나고 성숙해진다. 교회 생활의 사고 뭉치가 되지 않고 근심거리도 되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먹을 것과 이부자리가 공급되어야 하듯 아이 신앙의 사람에겐 돌봄이 정말 필요하다. 

행20:10을 보라. 유두고는 떨어져 죽었다. 그런데 떨어진 유두고를 위해 바울이 말씀을 중단하고 그 몸을 끌어 안는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떠들지 말라고 외치고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사고 뭉치를 끌어안고 죽은 자라도 끌어안고 돌보려 할 때 회복되고 살아난다. 

영국 런던에서 38년간 목회를 했던 렉스 목사는 질병을 앓고 있는 노인을 방문했다. 그러나 만나기를 거절하는 그 노인을 보면서 렉스 목사는 그 노인이 필요한 것은 먹을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정육점에서 양고기 두 조각을 사서 노인에게 보낸 목사는 며칠 후 다시 그의 집을 찾았다. 완강히 거절했던 그 노인은 우호적이 되었고 목사는 다시 양고기를 사서 보냈다. 그리고 또 방문했을 때 노인은 마음이 열려 있었다. 오히려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세요.”라고 하였다.

렉스가 출타 중에 그 노인은 사망했다. 나중에 노인이 남긴 유서를 읽게 되었다. 그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목사님께 전해 주세요. 나는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러나 나를 변화시킨 것은 목사님이 아니예요. 두 조각의 양고기였다고 전해 주세요.”

이 유서처럼 돌봄은 그의 필요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다. 다양의 방법의 돌봄은 전도도 가능하게 하고 죽은 영혼도 살릴 수 있다. 

R. Raikes(레이크스)는 1780년 길 가에서 방황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부모들은 공장에 나가고 돌보는 이들이 없어 황폐하게 되는 아이들을 끌어 모아 거리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주일학교는 교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거리에서의 돌봄이 수많은ㄴ 어린이들을 주께로 이끌고 이것이 미국에 가서 교회학교가 되었다.

우리 교회는 아파트 세 군데에서 새소식반을 하고 있다. 아이들을 복음으로 돌보는 일이다. 마침내 아파트 모임에서 교회로 데려오게 되었다. 70명쯤 모인 아이들 중에 절반 정도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었다고 하니 우리는 계속해서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학교가 관심을 가지 듯 유두고같은 성도에게 관심을 갖고 돌봐야 한다. 거기서 전도도 가능하고 죽은 영혼도 살려낼 수 있다. 떨어지는 일을 막아낼 수 있다.

둘째, 가르쳐 주는 일이 필요하다. (행20:9)

행20:9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보면 유두고가 바로 아래로 떨어지는 위험이 있는 창에 앉아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말씀을 들을 때 어디에 있는 것이 좋을까? 이런 문제는 경험을 가진 이들이 가르쳐야 할 일이다. 창이란 위험한 장소요 마음을 집중하여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가르치는 자가 없었다. 

시1:1 “복 있는 자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하였는데, 유두고는 창에 앉는 오만을 보였다. 결코 성숙한 자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는 태도이다. 그는 아주 나쁜 자세로 앉아 있던 것이다. 걸터 앉아있는 태도는 어정쩡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말씀을 듣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에게 자유로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알려주어야 한다. “장애우 존에는 주차를 하지 마세요. 약한 자를 배려하세요. 교회 예배 시간에는 늦지 마세요.” 등 가이드를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예배의 말씀을 듣는 자세는 누구든지 앞자리가 좋은 곳이라고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을까?”하는 문제는 청중의 위치가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들으려는 올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은 유두고같은 아이 신자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면 배울 수도 없고 자기의 하는 일이 걱정과 근심의 원인이 되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전5:1)

그러므로 교회의 생활을 가르쳐 주자. 본이 되어 주자. 교회 예배당의 앞자리가 말씀을 잘 듣는 자리요, VIP 로얄석임을 소개하자. 강단을 똑바로 보고 설교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 올바른 태도임을 가르치자. 말보다 행동으로 가르치자. 본이 되는 신앙 실천으로 가르치자. 예배를 사모하고 드리는 것을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므로 가르치자. 보면 바꾼다. 보여주면 배운다. 성숙하게 된다. 떨어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셋째, 은혜의 역사가 더욱 필요하다. (행20:10)

성숙한 신앙의 어른들이 아무리 돌보고 가르쳐 인내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은 떨어져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다. 아무리 잘 돌보고 가르쳤다 하더라도 떨어지는 사고 뭉치를 100% 막아서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간섭하는 섭리의 은혜가 필요하다. 떨어져 죽은 자를 끌어 안고 바울이 행20:10에서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역사이다. 생명이 돌아옴으로 인해 밀고 들어오던 어둠의 권세가 떠나갔다. 수근거림과 비방거리가 사라졌다. 바울의 설교가 길어서 벌어진 일이라고 사도를 걸고 넘어갈 핑계거리가 사라졌다. 생명이 돌아온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다. 이렇게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은혜의 역사이다. 허물을 덮고 안되는 것을 바꾸어 놓는 은혜, 그 돕는 은혜, 살리는 은혜가 임하면 교회 깨뜨리기, 씨를 뿌리는 사단은 교묘한 전략을 구체화 시키지 못한다.

유두고의 생명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의 집회는 이어졌다. 교제는 계속되었다. 올라가 떡을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는 진행되었다. 교회의 모임은 은혜가 제일 중요하다. 하나님이 부으시는 은혜가 아니면 신앙이 자라나기 어렵다. 교회의 집회가 집회되기 어렵다.

금번에 성남 사랑의교회에 부흥회를 갔었는데, 김임수 집사, 박효숙 권사 부부가 있다. 그는 건축하는 직업인으로서 5층짜리 난간에서 일하다가 떨어졌다.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즉사한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몸이 수직에서 옆으로 가도록 발로 벽을 찼다. 그리고 철 구조물을 왼손으로 붙잡았는데 떨어지는 힘 때문에 팔이 부러져 나갔다. 그는 건축 장비 물건 등과 함께 떨어졌는데 딱딱한 시멘트 바닥 사이에 있는 진흙 구덩이에 떨어졌다. 그는 기적적으로 장애를 겪지 않고 살아났다. 

이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김임수 집사는 살아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떨어지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한 것이 하나님이 주신 순간의 지혜라는 것이다. 그 날 김임수 집사의 부인은 남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 교회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이 일이 주일 예배를 빼먹은 날 사건이 터졌음을 깨닫고 다시는 주일 예배 빼먹지 않고 잘 드리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현재 사랑의교회가 모이는 지하 예배당은 그 가정에서 개척을 위해 무료로 빌려 준 장소다. 자신의 빌딩 건물 중 한 부분을 교회로 내어놓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은혜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돌보고 가르치는 역할을 성실히 하되 항상 주의 손으로 건지시는 은혜의 역사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떨어지는 슬픔과 비극을 방치해야 한다. 은혜는 타락을 막는다. 은혜는 사람이 타락해도 건져낸다. 결국 유두고는 살아났다. 행20:12 “사람들이 유두고 때문에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고 하였다. 시험을 극복하면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 본인에게도 축복이 된다. 유두고란 이름이 본래 ‘행복한’이란 뜻인데 바로 떨어졌으나 살아났기에 시험을 극복한 자이기 때문이다.

은혜가 넘치는 교회는 떨어지는 일을 막아주신다. 또한 어떤 걱정거리가 다가오더라도 위로와 행복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교회학교 교사로, CM장으로, 부모로 나를 점검하자. 나는 어떤 수준의 신자인가? 우리 모두 성숙한 성도가 되자. 돌보며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되 하나님이 돌보며 가르치는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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