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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눅 7: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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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눅 7:19~26)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이라는 말을 했던 독일 노벨상 수상 소설가 토마스 만은 그의 소설에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패하고 만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이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볼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아내에게 이기고 있는 남편들, 아직 자식에게 지지 않고 있는 아버지들입니다. 모든 아버지들은 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모든 남편들은 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내에게 이기고 있고 자식에게 지고 있지 않으면서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 자식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말이 사실일까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패하고야 맙니다. 이것은 변함 없습니다. 사랑을 해보면 압니다.

우리 하나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너무나도 순종하지 않는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방도를 다 쓰셨습니다. 어르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회초리로 때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잠시는 순종하는 것 같았지만 돌아서고 나면 순종하지 아니하고 바뀌는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한없이 넓은 하나님의 가슴도 너무 아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이 보기 싫으셨습니다. 그래서 4백 년 동안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말하기도 싫으셨던 것이었습니다.

 4백 년이나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잔소리를 듣지 않았으므로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오랜 동안 말씀을 듣지 못하면 힘들기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많이 힘들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이 힘듦보다 우리 하나님은 훨씬 더 힘들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더 힘든 것이 부모입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사랑하는 사람이 힘듭니다. 

다시는 쳐다보실 것 같지 않으시던 하나님께서 결국 이기지 못하시고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잘못된 관계를 전부 다 끝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용서하시고 화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마음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그렇게 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들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의 아들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친히 내려오신 것입니다. 당신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

이 말씀을 묵상하고 준비하면서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라서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생각나는 동화가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아버지 말씀을 듣지 않고 서로 싸우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아들들을 다 불러 모아 활과 화살을 주고 “내일 몇 시에 어디로 가면 짐승이 한 마리 나타날 것인데 너희들은 모든 있는 힘을 다해 짐승을 잡아라 누가 솜씨가 좋은지 내가 보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신이 나서 열심히 연습하였습니다. 다음날 그 시간이 되어 그 장소에 가니 정말로 짐승이 한 마리 나타났습니다. 아들들은 있는 힘을 다해 그 짐승에게 화살을 쏘았습니다, 짐승이 쓰러져 죽었습니다. 쫓아가서 보니 그것은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쓴 아버지였습니다. 그제야 이 아들들이 아버지가 대신 변을 당하심을 통해서 자신들을 가르치시려고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들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대신 죽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참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지만 아들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죽으시는 아버지가 오히려 더 좋았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내 자식들이 제대로 되기만 한다면, 돌아오기만 한다면 아버지는 괜찮았을 것입니다. 

이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종을 한 사람 보내셨습니다. 예비하도록 당신의 종을 보냈는데 그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이 세례요한은 충성을 다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라도 충성스럽게 그 일을 감당했는데 이 세례요한이 이스라엘 왕에게 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갇혀 있어도 풀려나지 아니하고 이제 며칠 있으면 처형을 한다는 소문만 들릴 뿐입니다. 이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제가 지금 기다리고 준비하고 그 길을 챙기고 있던 그 메시아가 당신이 맞습니까?” 라는 질문하였습니다. 이 질문의 까닭은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메시아 같았는데 아닌 것 같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보기에 예수님은 정말로 메시아 같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고 귀신들린 사람도 고치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 즉 정신병자들은 성경을 보면 쉽게 나을 것 같지만 고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도한 번만 하시면 금방 나았습니다. 각종 병자들도 다 나았습니다. 요즘도 불치병이라고 하는 나환자들 같은 환자들도 다 치료해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아실 것입니다. 2만 명 되는 사람들이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도시락 하나로 다 먹였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보고 세례요한은 틀림없이 저분이야말로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마음속에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능력도 있고 권세도 있는 것 같은데 일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런 것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외모도 멋있게 보여야할텐데 다른 사람과 똑같았습니다. 위대한 모습을 보이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이 잘못되면 천지를 뒤집듯이 큰소리를 치실 것 같은데 예수님은 조용조용하게 하셨습니다. 옛날에 별 볼일 없는 선지자 같은 사람들도 큰소리치면서 온갖 고함을 지르면서 말했는데 예수님은 자신도 없는 것 같고 조용조용하게 일하셨습니다. 성전에 부정부패가 가득 차 있었을 때에도 성전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것을 바꾸시면 좋을 텐데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셨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메시아 같고 어떤 때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두드려져 빈곤의 악순환이 점점 더 해졌습니다. 없는 사람들은 배우지 못해 또 더 가난해지는 빈곤의 악순환이 점점 확대재생산이 되는 이런 모습을 보고도 메시아라는 분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었습니다. 과연 저분이 메시야일까? 그래서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하나 더 있었습니다. 자기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위하여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감옥에 와 있고 시간이 제법 되었는데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저분이 메시아라면 어떻게 하든 풀어주실 텐데 풀어주시지 않으므로 회의가 생긴 것입니다. 이제 곧 처형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저 분이 메시야라면 왜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가? 이것이 세례요한의 갈등이었습니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죽는 자 살리려면 과부의 아들처럼 별 힘도 없고 살려봐야 별 소문이 나지 않는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높은 사람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든지 그렇게까지 아닐지라도 그 사람의 병을 낫게 해주기만 해도 훨씬 더 효과적일 텐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들한테 그렇게 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겠습니까? 기적을 베푸시려면 힘없는 서민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실 것이 아니라 모세가 바로 앞에서 한 것처럼 고관대작 앞에서 기적을 베푸셨다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주님을 보고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고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을 텐데 라는 회의가 든 것입니다. 거친 풍랑을 잠잠케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땅에 묻어둘 것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탐관오리 같은 사람들을 물리치고 로마 세력을 물리쳤다면 국민적인 영웅이 될 것이고 더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이 퍼져나갔을 텐데 그렇게 하시는 것이 이상하게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능력도 있고 권세도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에 갈등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주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2천 년 전 세례요한뿐 아니라 오늘의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기독교 신자들까지도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이 있습니다. 복을 받으려고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바로 믿으면 반드시 복이 있는데 적지 않은 사람이 이 복을 받지 못하는 까닭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즉 실족했기 때문에 주시는 복을 못 받을 수 있다는 이 말씀을 한 번 깊이 생각해보아야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까지도 하나님을, 예수님을 하나님 그대로, 성경에 있는 예수님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 상을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성경과는 관계없이 내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 놓고 그 하나님이 되기를 기대하고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하나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환상의 예수를 믿고 환상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주신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23절의 말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 목회자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오늘 그 부문을 지적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첫 번째가 24절의 말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입니다. 이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십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은 시대의 흐름이 이렇다고 이렇게 하는 종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시대의 흐름이 저렇다고 저렇게 따라가고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원하고 저렇게 원한다고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참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기독교 신자들이 목회자에 대해서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종에게 바라는 것들 중 크게 잘못 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에 대해서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전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말씀을 들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을 목회자가 말하면 기분이 좋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지만 적지 않는 기독교 신자들도 하나님 말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인간의 이야기, 세상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감동적이고 감격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 것을 기대하고 기다린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목회장 중 만약 세상 사람들이나 일부 기독교 신자들의 요구에 부응할 때 그 목회자는 이미 더 이상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입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세례요한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함께 하던 어른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로부터 부흥강사로 초빙 받아 갔는데 마중 나온 세 분의 장로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중 장로님들이 이런 이런 말씀을 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한참 들은 목사님은 조용히 차를 돌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지 사람들이 부탁하고 요청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니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장로님들의 사과로 부흥회는 무사히 끝냈기는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이든지 그른 말씀이든지 이해가 되는 말씀이든지 때로는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종이지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첫 번째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시대에 흔들리는 사람,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25절)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해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꾸미고 나타내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단히 중요한 모습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2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은 세상에서 잘난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잘나고 유명해서 왕궁에 불려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와궁의 사람이고 왕궁의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목사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정말로 잘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하신 그 말씀을 잘 들어야합니다.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종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흰 가운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입고 나오는 것은 자모실에서 예배드리는 분들이 모니터를 통해서 볼 때 검은 가운은 빛이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꾸 드러나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결혼식이 있었는데 결혼식에는 검은 가운을 입고 나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결혼식에 검은 가운을 입고 나오는 목사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신랑 신부가 일평생 한 번 찍는 사진이고 증명사진인데 거기에서 제가 번쩍번쩍 거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돈을 들여서 꾸며온 신부들을 살리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키가 작은데 좋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결혼식 주례할 때 키 작은 신랑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2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목사가 유명해져서 메스컴에 많이 나오기 원하십니까? 

세 번째 26절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가 옳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제대로 접근하십니다.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이 진짜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물론 골라서 일부러 밉상 받으려고 해서는 아니 되겠지만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실의의 말씀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지 아니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말했습니다. 늘 이런 말을 해서는 아니 되겠지만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너 잘 보이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내 말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태신앙이라고 구원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돌이키라 즉 바로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 정말로 예수가 있어야지 구원받은 사람이지 내가 몇 년간, 몇 십년간 예수를 믿는다고, 내 직분이 무엇이라고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싫은 소리를 골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또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 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남의 일은 쉽지만 내가 하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옷이 열 벌 있어도 한 벌 나누어주기 쉽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넘쳐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벌만 있어도 한 벌은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말입니다. 

세리들이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부과된 것 외는 거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로서는 당연한데 당시에는 먹고 살만큼 월급을 주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라고 되물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종은 그 일과 관계없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공권력을 가진 군인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며 받은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라고 되묻겠지만 어떻게 할까 어떻게 살라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놓고 하나님 말씀대로 종은 전해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듣기 좋아하는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기 싫어해도 들어야할 말을 전하는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사람, 자기를 드러 내는 사람, 자기를 위대하게 보는 사람, 자기가 유명해지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여러분들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나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땅으로 한없이 내려갑니다. 여러분, 쉬울 것 같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저도 이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게다가 요즘 교회에는 교인들 중에 자꾸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과 이런 목사의 욕심이 맞닥뜨려져서 추한 모습을 얼마나 많이 연출합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참된 하나님의 종은 크고 높고 잘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초대받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힘이 없고 못난 자, 아무에게도 귀하게 여김 받지 아니하는 사람, 심지어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아무 말도 못한 채 처형당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믿습니까? 어떤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사가 어떤 목사이기를 바랍니까? 23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잘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아는 자, 바로 알고 바로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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