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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탐대실 (딤후 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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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탐대실 (딤후 4:9~11)  

어린 시절 제가 살던 이웃 동네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저도 어른들 틈에 끼어 갔습니다. 아이들은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해서 멀리서 지켜보는데, 불길이 치솟으며 집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그 집 주인이 밖으로 빠져나왔다가 TV 수상기를 가지러 다시 들어갔다는 겁니다. 모두 혀를 차고 있는데, 결국은 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TV는 흑백이었지만 고가품이라 동네에 TV 있는 집이 몇 안 됐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TV 한 대 때문에 목숨을 잃어버리다니 정말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걸 가리켜 흔히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 부릅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의외로 이런 일이 많이 생깁니다. 작은 이익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큰 손해를 보고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굽니까? ‘데마’입니다. 이 시간 그의 신앙과 인생에 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데마의 이야기를 반면교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쪼록 소탐대실함으로 후회하는 인생이 아니라, 진정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 바울을 떠난 데마 : 소탐대실한 사람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그 기록 연대는 AD 67년경으로 추정되는데,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입니다. 기록 장소는 로마 감옥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잠시 설명 드리면 이렇습니다. AD 64년에 로마 대화재 사건이 일어납니다. 네로 황제는 그 사건을 수습하고자 방화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뒤집어씌워 대대적인 박해를 감행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순교했는데, 그런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바울마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십자가형을 당한 반면,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참수형을 당합니다. 그때 목이 땅바닥에 세 번 튀었는데 부딪친 곳마다 샘물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지금 로마에 가면 순교 장소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는데, 그 이름이 ‘세 개의 샘물’이란 뜻의 ‘트레 폰타나’(Tre Fontana)입니다. 

바울은 순교 직전 디모데후서를 쓰면서 자신의 순교를 예감합니다. 그래서 ‘유언적 서신’이라 부릅니다. 바울은 죽음을 직면하고 있었지만 아주 담담한 모습으로 서신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니까 주변의 인물들에게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끝까지 바울 곁에서 협력한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바울 곁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데마입니다. 

그는 단순히 바울 곁을 떠난 게 아니라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해버린 겁니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축복과 영광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소탐대실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 ”

바울이 그토록 가슴아파했던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배신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데마가 과거에 나름대로 열심 있는 신앙인이었고, 심지어 바울의 복음 사역에 협력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데마에 관한 기록은 많이 없지만, 바울의 다른 서신 중 두 군데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몬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바울은 동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그 중에 데마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동역자라는 말은 복음을 위해 협력하는 자라는 겁니다. 골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누가는 바울의 곁에서 주치의 역할을 하면서 복음 사역에 협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데마를 누가와 동격으로 거명합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데마가 바울 곁에서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을 배반하고 훌쩍 떠나버린 겁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도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서 ‘세상’은 다양한 용례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만물을 가리키기도 하고, 지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죄가 가득한 ‘세속’을 가리킵니다. 

데마는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 자기 인생에 뭔가 좋은 일들이 생길 줄 알았습니다. 적극적인 성격이었는지 금세 바울을 따라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고난만 가중될 뿐 특별한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더욱이 바울이 죽임을 당할 지경인데,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칠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래서 아예 바울을 버리고 죄악 세상으로 가버린 겁니다. 
 

[2] 데마의 실패 원인 : 인생의 계산 착오   

데마는 자기 계산으로 바울을 떠나는 편이, 신앙과 사명을 포기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인생이 자기 계산대로 됐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세속에 들어가 잠시 잠깐 부를 누리고, 쾌락을 맛보면서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게 더 많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영혼의 만족과 기쁨, 영생, 그리고 천국의 복락과 상급 등 ... 너무나 많은 것들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계산 착오’였습니다. 

그러면 데마는 왜 계산 착오를 일으켰을까요? 세속적인 욕심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약1:14~15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dragged away)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에 끌려’라는 표현은, 영어 성경을 보니까 ‘질질 끌려갔다’(dragged away)는 의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데마는 이 말씀대로 욕심에 끌려 세상으로 갔고, 욕심 가운데 죄를 지으며 살다가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데마가 했던 계산 착오는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① 순간 vs. 영원 : 

데마는 순간의 가치를 영원의 가치보다 더 좋은 것으로 잘못 계산했습니다. 그는 현실적으로 바울을 따라다니는 게, 예수를 따르는 게 별 이익이 될 게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비슷할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다고 당장 뭐가 됩니까? 금세 부자가 되고, 금세 출세를 하고 그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심지어 핍박을 당할 때도 많습니다. 신앙은 지금 당장 순간이 좋은 게 아닙니다. 두고두고 좋은 겁니다. 갈수록 좋은 겁니다. 나중이 좋은 겁니다. 영원히 좋은 겁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지금 당장 잘 되게 해 줄게! 그럽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나중에 잘 되게 해 줄게! 그러니까 세상은 순간의 가치를 말하고, 신앙은 영원의 가치를 말합니다. 

요일2:15~17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에 속한 것들은 당장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줍니다. 즉 육신의 욕망을 채워주고, 육신을 즐겁게 해줍니다. 세상은 또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켜줍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을 제공하고,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세상은 또 이생의 자랑을 제공해 줍니다. 사람들 앞에 과시하고 자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데마는 이런 것들을 추구한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영원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뜻을 행하는 신앙입니다. 신앙을 지킬 때 영원히 후회가 없고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비록 고난을 당하고 순교까지 했지만, 두고두고 만족하고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역사는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평가해 줍니다. 

성경에 보면 순간의 가치 때문에 영원을 놓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 에서를 생각해 봅니다.(창25:29~33 참조)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입니다. 이삭의 장자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장자의 축복은 다른 형제에 비해 갑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재산 가치 이상입니다. 영적으로 영원한 축복을 갑절로 누리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에서는 이런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순간적인 육신의 욕망 때문에 영원한 가치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에서는 사냥을 좋아한 사람입니다. 하루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야곱이 팥죽을 쑤어 놓고 있었습니다. 시장한 차에 한 그릇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장자권 하고 바꾸자고 말합니다. 그때 에서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창25: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당장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권이고 뭐고 상관없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나중에 후회하고 눈물 흘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계산을 잘 합니다. 에서는 데마처럼 계산 착오를 일으킨 겁니다. 반면 바울은 계산을 잘 한 사람입니다. 바울이라고 계산 없이 살았던 게 아닙니다.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은 영어 성경(KJV)에 보니까 ‘계산하다’(reckon) 라는 단어로 번역합니다. 바울은 신앙을 지키며 사는 게 당장은 고난이지만, 그에 비해서 장차 하나님이 주실 축복과 영광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올바로 계산한 것이죠. 

미국 플로리다 주(州)에 코랄 릿지 교회가 있습니다. 저도 10여년 전 개인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는데, PCA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로 유명합니다. 그 교회 담임이 케네디 목사인데 우리나라에는 전도폭발훈련 창설자로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청년 시절 그는 댄스 선생이었습니다. 하루는 일을 마친 후 잠깐 쉬는데, 다이얼을 돌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당신은 영원한 운명의 시간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그 한 문장이 그의 심령에 꽂혔습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내 인생이 끝나는 날 나는 과연 어디 있을 것인가? 춤이나 가르치다 인생을 끝낼 것인가?” 그는 당장 사표를 내고 믿음의 길로 들어섰고 목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계산을 한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순간보다 나중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영원을 생각하십시오! 당장은 힘들고 고난이 있어도 나중과 영원을 생각하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어떤 형편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킴으로 갈수록 복을 누리고, 영원히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② 육신 vs. 영혼 :   

데마는 육신의 가치를 영혼의 가치보다 더 좋은 것으로 잘못 계산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세가 대단해도 마음이 불편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행복이 아닙니다. 비록 가난하고 역경 가운데 있어도 마음이 편하면 그게 행복입니다. 신앙의 축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 보면 비교가 나옵니다. 하루와 천 날, 악인의 장막과 하나님의 궁정 ... 이게 바로 주님이 주시는 영생의 기쁨입니다.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게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겁니다. 삶의 길이도 중요하지만 삶의 질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합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사도 바울은 비록 감옥에 있어도, 죽음이 임박해 있어도, 육신은 고통 가운데 있어도, 그 영혼 가운데 샘솟는 영생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옥중 서신인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 믿고 얻은 영생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입니다. 세상 것들은 다 무가치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영혼의 기쁨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영생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역시 잘못 계산한 사람이 있습니다. 롯입니다.(창13:10~13) 그는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조실부모하고 삼촌과 함께 살았는데, 장성하고 재산도 모았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을 배반하고 멀리 소돔으로 떠납니다. 그런데 소돔을 행해 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단 하나 육신의 안일 때문이었습니다. 거기 가면 돈도 많이 벌고, 육신의 향락도 있고, ... 그런데 소돔에는 그가 고려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창13: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소돔은 우상숭배의 소굴입니다.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곳입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동성애가 성행한 곳입니다. 롯은 좋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돈도 모으고 출세도 하고 인생을 즐기고 ... 그런데 웬걸 육신은 편한데,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늘 영혼에 불안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벧후2:8 보면, 롯은 무법천지 음란한 소돔 성에 살면서 그 심령이 상했습니다. 이건 행복이 아닙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밀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본래 누드 화가였습니다. 누드화(畵)를 그려서 돈을 많이 벌었고 인기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전시회를 하는데 청년들이 그림을 보면서 음담패설을 합니다. 그 광경을 보고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청년들의 영혼을 망치면서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그는 어릴 적 신앙인인지라 하나님을 떠나 누드화를 그리면서 늘 불안했는데, 결단의 기회가 온 겁니다. 그날 밤 아내에게 이제는 굶어죽어도 누드화는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다행히 아내도 잘 생각했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가난했지만 농민화가로 정진했고 위대한 화가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만종’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가치는 영혼이 편한 겁니다. 무론 하나님이 인생만사의 주관자이므로 육신의 삶에도 간섭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영혼이라는 겁니다. 영혼의 기쁨과 평안이 있다면 육신의 것들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육신의 안일보다 영혼의 기쁨을 더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③ 현세 vs. 천국 : 

데마는 현세의 가치를 천국의 가치보다 더 좋은 것으로 잘못 계산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까 마치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잘 되면 최고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요 오해입니다. 사실은 보이지 않는 천국이 더 중요합니다. 현세는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잠깐 지나가는 겁니다.

우리교회에 100세가 넘어서 천국에 가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정말 장수하셨죠. 그런데 참 희한합니다. 제가 수많은 장례식을 인도했지만, 심지어 어린 아이의 장례식도 인도해 보았지만, 그때처럼 인생이 정말 짧다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역설적이죠? 그런데 정말 그랬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이 짧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넘어 내세가 있음을 기억합니다. 예수 믿는 게 바로 그겁니다. 현세보다 천국을 생각하는 게 신앙입니다. 

고후4:17~18 말씀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천국을 바라볼 수 있으면 오늘의 고난도 참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너무 집착하면 천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놓치고 맙니다. 불행한 일이죠.

성경에 보면 부자 청년이 그랬습니다.(마19:16~22)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그는 부자였고 관원 산헤드린 공회의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죠. 그는 세상에서 출세했지만, 천국의 영생도 얻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황당한 말씀을 합니다.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고 따르라는 겁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누구든지 예수 믿으려면 재산 다 팔아 바치라는 게 아닙니다. 그 청년의 마음을 간파하신 겁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집착이 너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버리라는 겁니다. 그래야 천국이 보인다는 겁니다. 결국 부자 청년은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밤에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등불을 보면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은 어느 게 더 찬란합니까? 하늘의 별이죠. 그 먼 거리를 뚫고 별빛이 비추어지는 걸 보면 얼마나 찬란한지 알 수 있죠. 그러나 눈앞에 네온사인과 등불에 가려 그 찬란한 별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네온사인과 등불을 꺼야 하늘의 별이 보이는 것처럼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천국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떠나간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19:24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한 겁니다. 부자는 무조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천국을 바라본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의 최후 선언을 보십시오! 딤후4:7~8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고, 하늘의 영광과 상급이 있고 ... 이것을 아는 게 신앙입니다. 그 신앙으로 바울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데마는 계산 착오로 바울과 함께 누릴 수 있었던 이 영광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데마는 인생을 잘못 계산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탐대실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혹시 영원보다 순간의 가치에, 영혼보다 육신의 가치에, 천국보다 현세의 가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소탐대실의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계산해 봐야 합니다. 짐 에리어트(Jim Elliot 1927~1956, 남미의 살인 종족 아우카 족 선교사로 순교한 분)이 남긴 말을 인용해 봅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마음속에 두고두고 새겨 볼 금언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데마처럼 소탐대실의 인생이 아니라, 바울처럼 영원히 후회 없는 승리의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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