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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폐하려 함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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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려 함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마 5:17~20)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참 기독교는 편한 종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교처럼 삼천 배니 뭐니 하여 극단적인 자기 고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슬람교도 보십시오. 그들은 하루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하여 절을 해야 하며 12월 라마단 기간에는 한 달 동안 금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율법은 모두 613개나 되었고, 여기에 미쉬나라고 하여 구전 전통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 모든 율법을 지켜야 저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가톨릭도 선행을 강조합니다. 선행의 양이 부족한 사람은 죽어서도 연옥이라는 곳에서 고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예수를 믿는가만 묻습니다. 교회학교 찬송으로 우리가 잘 불렀던 것이 바로 “돈으로 못가요 하나님나라, 맘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벼슬로도 못가요,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나라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찬양입니다. 그래서 교회학교 어린이들도 이제는 습관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폐하여졌고 이제는 은혜의 시대를 산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 일침을 가합니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완전케 하려 왔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계명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린다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이 말은 단순히 지극히 작은 자 취급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 613개를 다 지켜야 한다는 뜻인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 신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율법에 대한 우리의 바른 태도를 정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

주님은 분명히 오늘 말씀에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철저히 구약말씀을 성취하신 분으로 오셨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기독교 초기 이단 중에 마르시온이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약은 폐기되었다. 구약은 이제 유대교의 종교라 하여 신약만 참 성경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구약과 신약을 동등한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합니다. 오히려 구약의 말씀을 더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점에서 현명하신 분입니다. 과거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과거를 계승하여 새롭게 해석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나 정치나 작은 단위의 교회나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를 완전히 부정하고는 설 수 없습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과거가 만들어 놓은 열매들입니다. 이것을 안고 간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자기의 허물로 인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사람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하며, 그것을 기초로 새로운 일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한 교회에 새로운 담임목사로 부임한 사람이나, 한 기업의 새로운 오너로 임명된 분이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 정권을 인수한 분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아기를 목욕시킨 물이 더럽다고 하여 물만 버려야 할 텐데 아기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기독교가 바로 이런 전통에서 태동되었습니다. 이스라엘 2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계승하였습니다. 덕분에 기독교는 더 풍성해졌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심으로 신앙인들이 빠지기 쉬운 무율법주의적인 태도나 선행이 없는 반윤리적인 삶을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18절에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점 일획이라는 것은 히브리어 알파벳 중에 ‘요드’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쉼표처럼 생긴 글자인데 바로 이런 작은 글자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다 성취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말씀하셨던 의로운 삶 또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 613개를 오늘날에도 다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 말이 613개지 여기에 유대인들이 구전 전통이라고 하는 ‘미쉬나’까지 합하면 율법은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안식일 계명만 해도 구약성경에는 몇 가지 안 됩니다. 그러나 미쉬나에는 이를 다시 49가지에 걸쳐 자세히 안식일을 지켜야하는 법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구전 전통도 기록된 율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이것을 다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이 기록된 마태복음 말씀을 살펴봄으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처럼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어김없이 지키셨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신 적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밀이삭을 잘라 먹었는데 이것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습니다. 많은 날 중에 왜 안식일에 구지 이런 일을 예수님은 하셔야만 했을까요? 평일에 할 수는 없었을까요? 마태복음 5장 31절에서는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고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신명기 24장 1절에 기록된 율법입니다. 예수님은 음행죄 외에 이혼하는 것을 불허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고 먹는 정결법은 굉장히 중요한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나오는 것, 곧 악한 생각, 음란, 도적질, 거짓 등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시며 정결법을 폐지하셨습니다. 율법의 총본산지인 성전도 허물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율법의 낱낱의 조항보다 율법의 원래 정신을 더 중요시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안식일 계명을 보면 그렇습니다. 안식일 율법의 근본정신은 일하지 않고 쉬면서 거룩하고 복된 날로 보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도 이런 정신으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지낼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떤 것이 일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며 만든 안식일 계명이 무려 49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은 안식일의 정신은 다 사라지고 계명만 남아 이것을 지키려다 안식일이 그만 복된 날이 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에 약 1km 이상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을 가야할 일이 생기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편법이 생겼습니다. 먼저 1km 쯤 가서는 앉아서 쉽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새로 1km를 걸을 수 있는 자격이 생깁니다. 계명 자체에 매이다 보니 하나님은 사라지고 형식적인 법조문만 남은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도 금지됩니다. 그것은 의사가 행하는 노동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 위급할 경우도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예외 조항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생명이 위험할 때는 병고침이 허락이 됩니다.  코와 목이 아플 때도 허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정도만 해야 하지 더 낫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상처에 붕대는 감을 수는 있지만 치료제로 쓰이는 기름을 발라서는 안 됩니다. 순수한 솜은 아픈 귀에 꽂을 수 있지만 약을 바른 솜은 안 됩니다. 이러니 안식일이 복된 날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더 짓기 쉬운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율법의 원래 정신을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복된 날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병든 자를 고치셨던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 계명에 대한 해석도 그렇습니다. 사람을 저주하고 미워하고 괴롭히면서 직접 손으로 죽이지 않으면 살인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완악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조항을 왜곡하곤 합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아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욕하는 것도 살인이다고 하심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 밝히셨습니다.

정결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으로 먹는 음식과 못 먹는 음식조항이 있습니다. 레위기에는 새김질하지 않거나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돼지고기는 부정한 음식이라고 하여 유대인들은 먹지 않습니다. 이들의 음식에 대한 경계심은 정말 철저합니다. 외경 마카비서라는 곳에 보면 BC 167년경에 안티오쿠스 왕이라는 사람이 유대교를 말살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재판하는데 그 앞에서 돼지고기를 먹게 합니다. 먹으면 풀어주고 먹지 않으면 죽입니다. 마카비서에 보면 일곱 아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여 혀가 뽑히고 산채로 끊는 물에 들어가는 형벌을 받으며 다 죽어갑니다. 지금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돼지 기름조차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율법에 먹지 말라고 하였는데 왜 먹습니까? 주님은 이런 율법을 제정해주신 이유를 명확히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먹는 것에서조차 구별된 삶을 살라는 뜻에서 주신 하나의 상징과 같은 것입니다. 돼지고기가 더럽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 더 더럽습니다. 주님은 모든 만물은 다 깨끗하다, 다만 속되게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만 속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려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구약에 수많은 율법이 있지만 그것을 정리하면 의식법과 시민법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의식법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성전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제사와 절기에 대한 것, 정결예식에 대한 것들입니다. 이 조항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의 성전과 제사는 곧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제사라는 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을 잡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돌아가심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어디서든 만날 수 있습니다. 정결법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것보다 더 정결한 것이 어디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가장 중요했던 제사나 성전 등 의식법은 더 이상 필요치 않고 완성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민법 또는 도덕법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시민법의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크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4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관련되었습니다. 나머지 5-10계명이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입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율법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주길 원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밝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전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어두울 때는 몰랐는데 불이 환하게 밝혀 있어 감추어져 있던 치부들이 다 들어납니다. 율법은 마치 X-레이와 같습니다. 율법의 빛이 쪼이니까 우리 몸 속 안에 있는 모든 병들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드러낼 뿐이지 죄를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X-레이가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인간이 죄인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어디 있습니까?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인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X-레이 정도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정확히 조준해서 태워버리고 새롭게 하는 치료제입니다. 이러니 율법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율법의 또 다른 기능 중 하나는 우리로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서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4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613개의 율법과 또 수많은 다른 율법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건 이 두 가지만 물어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인가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이 두 관문을 통과하거든 마음 놓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죄가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의로운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쉽습니까? 차라리 613가지 딱 정해진 것만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을까요?  그래서 일찍이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6)고 고백했었습니다. 그는 실제 율법을 잘 지켰던 흠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고 난 연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딤전1:15) 고백합니다. 내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라고(롬1:14)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 왜 이처럼 사도 바울이 죄인이 되고 빚진 자가 되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빚입니다. 613가지가 아니라 1만 가지를 해주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것은 법조문이 아닙니다. 작은 말 한 마디에도 상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말도 함부로, 아니 표정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사랑의 율법일 경우라야 그것은 가능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

이처럼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렵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쉬워집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율법이나 선행이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기가 그렇게 힘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짐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가 쉽습니다. 저는 그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월급 받고 하라면 도무지 못할 것이 부모노릇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물질과 자기 시간뿐만 아니라 자기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줍니다. 몇 년 전에 『가시고기』란 책이 나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적이 있습니다. 가시고기는 새끼를 숫컷이 돌봅니다. 암컷이 알을 낳고 가버리면 아빠 가시고기가 먹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알들을 지킵니다. 알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기 위해 아빠 가시고기는 가슴 지느러미로 열심히 부채질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알에서 깨어난 새끼가 치어가 될  쯤이면 아빠 가시고기는 조용히 생을 마감합니다. 이 가시고기의 삶을 이 소설은 한 아빠의 사랑으로 재현했습니다. 한 가난한 시인 아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딸이 백혈병에 걸리고 맙니다. 아이의 골수 이식 수술을 위해서는 4천만 원 정도 들어가는 데 아빠는 돈이 없어 자신의 장기를 팔려고 합니다. 자기 간을 팔려고 검사하는 중에 간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것도 못하게 됩니다. 할 수 없어 아빠는 자기 각막을 팔아서 딸을 수술을 시킵니다. 그리고는 아빠는 시력을 잃고 어둠 가운데서 쓸쓸히 죽어갑니다. 무엇이 이토록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딸을 살리려 했을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인간이 되고 온갖 고난과 조롱을 받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랑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십자가의 길이 쉽고 가볍다고까지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어떻게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은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 사랑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를 기르는 일은 힘이 듭니다. 하루 종일 엎고, 그 칭얼대는 소리는 듣는 것은 얼마나 고역입니까? 그러나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 일을 자청해서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시인들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시편 19편 9-10절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여호와의 규례 곧 율법이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119편 97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그 딱딱한 율법이 마치 사랑의 편지처럼 종일 묵상하고 또 묵상하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119편 131절도 보십시오.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목마른 사람처럼 주의 계명을 먹고 싶어서 헐떡였다는 말씀입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 율법이 더 이상 짐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하는 자녀를 안은 듯 그렇게 율법을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사도바울은 이웃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서 10절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누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쁜 마음을 먹겠습니까? 누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의한 일을 행하겠습니까?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그의 잘못은 실수처럼 보이고, 그의 허물은 감추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사랑이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양화진에 가면 외국인 선교사들의 순교 묘지가 있습니다. 이들은 백여 년 전에 경제적으로나 위생적으로도 살기 어려운 이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땅과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다 이질로 장티푸스로 죽어갔습니다. 그곳에 세워진 묘비명들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루비 켄트릭 선교사의 묘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게 줄 수 있는 천 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켄트릭 선교사는 처녀로 이 낯선 땅에 와서 8 개월만에 병으로 순교하셨습니다. 1885년에 왔다가 1890년에 순교한 헤론 선교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고 기록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며 한국을 알리고 한국 독립을 위해서 헌신하셨던 헐버트 선교사의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는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젠슨 선교사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그들이 이렇게 자기 목숨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은둔의 땅 한국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20절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됩니다. 우리의 누더기 같은 더러운 죄의 옷은 예수님이 가져 가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제 생활 속이나, 선행에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우리가 나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우리가 처음 구원 받을 때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입니다. 주님은 거지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왕자로 만드셨습니다. 왕자가 되었으면 이제 거지의 품성을 버려야 합니다. 왕자다운 품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기를 닮은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아버지로서 당연한 기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못하길 원치 않습니다. 자기를 닮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부르심을 따라 더 나은 의를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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