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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님 (행 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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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님 (행 4:5~12)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고 주장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헛소리를 한다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한 대로,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지도자들은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애써 부인하고 외면했다. 

  예루살렘 항상 성전 문 앞에는,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걸인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걷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게 했다. 너무도 잘 알고 그 걸인이,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런 일은 결코 본적이 없었던,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시켰기에, 충격이 더 컸다. 많은 사람들이 고침 받은 걸인과 제자들 앞에 모였다. 제자들은 이 일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너희가 잡아 죽인 예수님이 하셨다. 그분은 성경대로 고난을 받아 죽으셨으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남자들만 5천명이나 되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유대 지도자들은 너무 놀라서, 부랴부랴 제자들을 붙잡아 들이고, 사도들을 가운데 세워 놓고서 물었다. (7)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걸인이, 일어나 걷게 되었다면,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그들은 기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의 제자들이기에 ‘누가 이런 일을 하도록 했느냐?’하며, 오히려 심문했다. 이 물음에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여, 당당하게 말한다. 

  (9-10)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걷지 못하던 병자를 고친 일은 나쁜 일이 아니요, 착한 일인데, 왜 죄인처럼 여기느냐?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질문한다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를 건강하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11-12)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너희가 예수님을 쓸데없는 돌처럼 버렸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 

  그러면 모퉁이 돌은 무엇인가? 모퉁이 돌은, 건물의 토대 위에 제일 먼저 놓는 돌이다. 이 돌을 초석으로 하여, 다른 돌들이 놓이고 측량되어진다. 모퉁이 돌은, 건물 전체를 연결시키는 요석이다. 예수님은 모퉁이의 돌이 되신다. 

1. 기준이 되시는 예수님 
기준은 기본이 되는 표준을 말한다. 신호등의 기준은, 파란 불은 건너게 하고, 빨간 불은 기다려야 한다. 기준을 무시하고 가면,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기준을 지키면 안전하다. 

  신앙생활의 절대기준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마지막에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말씀하셨다. 예수님 위에 세워지지 않는 행동과 사상, 신학은 모두 허물어지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되고 만다. 모퉁이 돌은, 건물 토대 위에 제일 먼저 놓는 돌이다. 

  예수님 위에 우리의 신앙이,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되고, 예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올바르지 않은 신학이 되고 만다. 잘못된 신학은, 십자가 위에 세워지지 않고, 십자가와 연결되지도 않는다. 고난이 예수님과 연결되면, 사명이 되지만, 능력이 예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교만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예수님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흥함과 패하는 기준이다. 예수님께 연결되면 흥이요. 연결되지 않으면 패한다. (눅2:34)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예수님은 흥하고 패함의 기준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오늘 교회에 와서 생활의 기준을 바로 알고, 바로 세우고, 바로 연결됨으로, 일생이 흥하고 복 받기를 바란다. 또 예수님은 구원과 정죄의 기준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안 믿으면 정죄를 받는다. 

  (막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했다. 천국에 가는 기준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을 소유하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이요, 안 믿으면 멸망이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나를 품에 안고, 천국으로 가신다. 그러므로 죄인인 나를 보지 말고, 예수님만 보고 믿으면 된다. 

  예수님은 구원, 흥함, 복, 성공의 기준이다. 요셉의 애굽 생활은 하나님을 기준 삼아,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 하리요 하면서, 하나님께 맞추는 삶을 살아서 형통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맞추어 살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말씀되신 하나님이시다. 

  사사기의 시대는 암흑 시대였다. 왜 암흑의 시대였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멋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말씀이 기준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준 되지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방인에게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설명한다. 말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로고스인데, 그 뜻은 “절대기준, 절대법칙”이라는 뜻이다. 이방인에게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알고 있는, 절대 기준, 절대법칙이라는 단어로 예수님을 설명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기준은 성경진리다. 성경진리에 맞으면 성공이요, 이 진리를 버리면 실패다.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하면, 우리는 침묵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삶 속에서 순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자는 성경으로 말하고,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세상의 과학과 철학은 시대가 흐르면서 바뀐다. 그렇기에 절대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여기면서 살고 있나요? 내 자신인가? 경험인가? 과학인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 기준으로 삼기 바란다. 

2. 사람들은 멋대로 살기를 원하기에, 기준을 말하면 싫어한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는 자기 밖에 모른다. 왜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받느냐, 다른 성인들도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하느냐? 다른 종교를 믿으면 구원받지 못하느냐? 

  너무 ‘타종교에 너무 배타적이다.’고 말한다. 종교라면 다른 종교도 존중할 줄 알아야, 내 종교도 존중받는데,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런 기독교가 싫어서, 교회 가기가 싫다고 한다. 2007, 7, 31 한겨레신문에, 종교다원주의 대부 격이라 할 수 있는, 변선환 교수에 대한 글이 실렸다. 

  그 기사에서 변선환 교수를 한국 기독교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의 벽을 허문 개혁적 인물로 치켜세웠다. 종교다원주의는, 쉽게 설명하자면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정상에 오르는 길은 동서남북 여러 갈래가 있다는 말이다. 어떤 길로 가든, 정상에서 다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등산에 비유하면, 그럴 듯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등산이 아니라, 영혼 구원에 관한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천주교회 교황청에서, 1965년 비그리스도교 선언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한문으로 쓴 것이다. 비그리스도교라는 말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선언의 핵심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게 핵심이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존경하는 이들에게는, 이처럼 멋있는 말도 없을 것이다. 

  기독교에만 아니라,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힌두교에도, 불교에도, 사머니즘에도, 뉴에이지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모두 포용하자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또 신부가 없는 곳에는 죄사함이 없다고 한다. 

  또 천주교회는 개혁교회를 말로는 인정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적 공동체’로 보고 있다. 애매모호하게 말을 한다. 이 말은 전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가 했던 말이다. 너무나 겉 다르고, 속 다른 내용이다. 차라리 천주교 외에, 구원이 없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슬람교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 태어나면 무슬림이다. 이슬람의 전파는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다. 기독교인이 무슬림으로 개종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무슬림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면,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개종하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기독교는 개종을 한다고 죽이는 경우는 없다. 

  그러면 왜 기독교를 전하는 사람을 싫어할까? 그 이유는, 물론 악령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하라고 하며, 죄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좋으신 예수님만 전하면 사람들은 좋아한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삼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만 전해주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복음이 전할 때는, 죄를 지적하기에 싫어한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일으키실 때, 유대인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죄를 책망했기에,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마26:1). 또 베드로가 유대인에게,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했기에 싫어했다(10). 

  그냥 예수님 이야기만 하면 좋지만, 예수님을 나와 연결시키면, 바로 내 죄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 죄 문제를 지적하지 말고, 사람의 필요를 채우면, 부흥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민족의 필요를 채워 주지 않으셨다.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기는커녕,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보신 후, 도리어 그들을 피하셨다. 

  오병이어로 먹이신 유명한 이적을 행하신 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배고픔을 해결할 희망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요6:15).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분임을 깨닫기 바란다. 

  우리는 죄를 지적하지만, 그들의 죄만 지적하지 않고, 우리도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영혼을 사랑하기에, 지옥 가는 영혼들이 불쌍해서 그렇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죽이거나 거짓말로 속이지 않는다. 

3.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구원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보내주신 분이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 

  이 말씀을 붙들면 용기가 생기고, 힘이 생긴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이 말씀 때문에 우리가 선교한다. 이 말씀이 없다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고, 선행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 외에 구원이 있다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 필요가 있다. 왜 자기의 재물도, 시간도, 인생도 허비하면서, 예수님을 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님 밖에는 없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일생을 헌신하고 있다. 

  이 말씀은 많은 사람이 반대하기에, 선포하기가 참 부담스럽다. 그러나 사실이기에 전해야 한다. 상대적인 진리나 구원에는 어려 가지 해답이 가능하다. 그래서 현대 철학의 경향은, 상대적 진리를 내세우고 있다. 어떤 사실이 너에게는 그럴 수 있고 옳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 

  전부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백인은 백인대로, 흑인은 흑인대로, 동양인은 동양인대로 사는 게 옳다고 한다. 미국은 미국식으로, 유럽은 유럽식으로, 한국은 한국식으로, 북한은 북한식인 주체사상으로 사는 게 옳다고 한다. 상대적 진리를 적용하면, 상대적인 구원에도 여러 방법이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진리는 하나다.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한다. 절대적인 구원에는 정답도 하나다. 하나님은 한 분이다. 하나님이 여럿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구원도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 

  석가모니나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수많은 성자들이, 인류역사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들이 비도덕적이고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그들도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종교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권력을 잡으면,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느낀다. 자기 명령대로 모든 일이 움직이고, 법까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인간들은 자신이 신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결코 신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이다. 

  반대로 하나님은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는데 있다. 많은 자유주의자, 인본주의자, 무신론자, 회의론자들의 본질적인 실수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인본주의적, 자유주의적, 혹은 진화론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하나님을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한다. 2004년도 대광 고등학교 교목실장을 지내다, 강의석군 사건으로 목사직을 반납한 유상태 씨란 분이 “당신들의 예수”란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에서 행4:12 말씀은,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기에 그 말씀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부분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앞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맞지만 뒷부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후대의 교회들이 덧붙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처음부터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잘못된 신학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구원인 이유가 무엇인가? 
(1) 그는 하나님이다.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인간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이라면, 부활해야 하는데, 인류역사에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죄가 없기에, 우리 죄를 용서하실 있다. 그러나 육체가 없이는 우리 죄를 짊어지실 수 없기에, 육체로 오셨다. 

(2)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인간이셨다. 인간으로 오셨기에, 죄 없는 분이 우리를 위해 죽을 수 있다. 만약 인간 만이라면, 우리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자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그러나 만일 죽기만 했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기에,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따라서 예수님만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여러 길 중에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길이다. 

  예수님은 여러 진리 중에 한 진리가 아니라, 유일한 진리다. 또 여러 생명 중에 한 생명이 아니라, 유일한 생명이시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예수님만 믿으시기 바란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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