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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큰 믿음을 갈망하라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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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믿음을 갈망하라 (마 15:21~28)

컬럼니스트 A봄베크는 하나님이 어머니를 창조하던 때를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만들 때와는 달리 어머니를 만들 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손질하자 한 천사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머니는 티끌하나 없이 깨끗해야하고 식구들이 남긴 음식을 먹고서도 일할 수 있어야 하고 무릎 위에서 아기를 잠재우다가도 바로 일어나서 집안일을 해야 하며 자녀가 넘어져 생긴 상처에서 연애하다가 입은 상처에 이르기까지 입맞춤 한 번으로 무엇이든지 고칠 수 있어야한다. 그러므로 손은 열두 개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고 눈은 6개는 가져야 한다. 

두개의 눈은 닫힌 문을 꿰뚫어 보아서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에게 뭘 하고 있느냐고 물을 때 필요하고, 두개는 머리 뒤쪽에 붙어서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을 보는데 쓰도록 하고, 또 두개의 눈은 얼굴에 붙은 눈으로 자녀가 어려울 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널 사랑한다’ 라고 알리는데 쓰도록 해야 한다. 또한 어머니는 병이 들었을 때 스스로 고치고 한 근도 안 되는 고기로도 여러 식구를 먹여야 한다.”

이 말을 듣고 난후에 천사는 어머니상을 슬쩍 만지고는 그 부드러움에 놀랬습니다. 하나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말씀하시기를 “부드럽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인하단다. 아마도 너는 이 어머니가 어떤 일을 하고 인내해 낼 수 있을지 상상도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어머니 상에서 물이 새어 나왔습니다. 놀란 천사가 그 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가 보고 말하기를 “하나님 눈에서 물이 나옵니다.” “그건 물이 아니야 눈물이다. 그것은 기쁨과 슬픔 실망과 아픔 외로움과 자랑스러움에 쓰이는 거란다.” 하나님은 따뜻한 손길로 어머니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라고 썼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잘 말해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 또한 “돈은 강하다. 그러나 왕은 더욱 강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강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을 잘 나타내 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가슴을 졸이며 병원에 달려갔지만 청년은 이미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마음의 문을 철저하게 닫고 지냈습니다. 바로 곁에서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이 한 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청년은 그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쪽 눈 이식 수술을 받은 청년은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청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로 살아 가냐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드디어 청년은 붕대를 풀었습니다. 풍대를 모두 풀고 앞을 본 순간, 청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습니다. 그의 앞에는 한 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한 쪽 눈만을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울고 있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두 눈을 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의 장님 몸뚱이가 짐이 될 것 같아서.....”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식에게 힘이 된다면 자신의 몸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 15장에서도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본문에 기록된 어머니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불행히도 귀신들린 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고칠수 없는 질병들을 말할 때에 귀신들렸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 딸은 큰 중병을 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병이 육체적인 질병인지, 아니면 정신병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대단히 위험한 질병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딸이 있었기 때문에 그 어머니의 마음은 너무나도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눈먼 자가 눈을 뜨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게 되며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느 누구도 외면하지 않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준다고 합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분이 유대지역을 벗어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이라고 한다면 유대인들 조차도 오기를 꺼려하는 이방의 땅이었지만 그 여인의 집과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귀신들린 딸의 어머니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절박한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이 있는 곳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가슴 가득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께 뛰어 나와 자신의 사정을 털어 놓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귀신들린 딸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께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고백합니다. 이 여인이 딸의 문제로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예수님을 향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동안 자신이 받아 왔던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딸로 인하여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아픔의 기억들을 뒤로 할 수 있도록 자신의 힘든 상황을 해결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니까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안고 찾아온 이 여인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찾아 왔습니다.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한줄기 빛을 바라보고 달려가듯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 같은 주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달려왔고, 또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으십니다. 

오늘 이러한 상황에 처한 분계시지 않습니까? 자신의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 왔지만 정작 주님께서는 아무런 응답도, 대꾸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겪게 되는 가장 어려운 점이 바로 이런 것들 아니겠습니까? 
절실히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 꿇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밤을 세워가며, 눈물을 쏟아 내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부르짖어도 도무지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지만 하나님은 그저 침묵하고만 계십니다. 

이럴 때면 자칫 신앙의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의 실제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나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절박한 부르짖음에 침묵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왜 나의 어려운 형편 속에서 부르짖는 외침의 소리를 듣지 않으시는가? 왜 나의 고통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시는가? 왜 나에게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는 것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자기 백성이 부르짖을 때에 속히 응답하셔야 하는데 침묵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24절에 가면 더욱 이해하기 힘든 말이 나옵니다. 이 여인이 너무나도 귀찮고 시끄럽게 하니까 제자들이 주님께 청원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마지못해 입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자신을 도와 달라고 하는 절박한 이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너는 이방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왔지 이방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결국 이 이야기가 끝나게 되는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는 결국 이 여인을 칭찬하면서 끝나게 됩니다.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네 소원이 이루어 졌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딸이 낫게 되고 이 이야기는 끝이 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처음 이 여인의 청원을 들었을 때에 한마디의 대답도 없이 침묵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청원을 하자 그제서야 주님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그 여인의 믿음을 극찬하면서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만일 이방인이기 때문에 들어줄 수 없었다면 끝까지 들어주시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그 여인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응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끝까지 외면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네 믿음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 라고 하는 것을 볼 때에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이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나왔는지 그 믿음을 보고 싶어서 이러한 시험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나아갈 때에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문제를 봐주시기를 원합니다. 나의 이러 저러한 상황들, 어려운 상황들을 보시고 해결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볼 때에 주님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상황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원에 관심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정말 보고 싶어 하시고 관심 있어 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침묵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침묵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과연 주님께 나아갈 때에 믿음이 있는가? 그 믿음이 주님을 향해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그 믿음은 정말 그 소원을 이룰 만한 믿음인가?” 라는 것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 그렇기 때문에 너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일종의 법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항상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과연 그 상황을 이길 만한 믿음이 있는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할만한 믿음이 있는가? 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소원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주님게 아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소원을 이룰 만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도무지 믿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도무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이처럼 주님께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네 믿음이 크다”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어떠한 믿음을 가졌길래 주님께서 이처럼 칭찬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녀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길래 그녀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간략하게 네 가지 정도로 그녀의 믿음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향한 절대적 확신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이 여인이 예수님을 불렀을 때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지금 우리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이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 표현을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어떤 사람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을 때는 그 사람을 구세주요,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는 구약의 가르침을 받은 여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녀는 메시야에 관한 정통한 지식이나, 역사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들었을 만한 몇가지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녀는 예수님이 분명 메시야일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진정한 메시야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구약에서 어떻게 예언되어졌고,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떻게 죽으셨고,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이 모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이방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네가 성경에 대해서 얼마나 해박한 지식이 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당신의 신앙의 연륜이 긴가 짧은가” “교회의 전통과 법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지금 네가 나를 믿느냐, 네가 나를 아는 만큼 믿고 있느냐, 네가 나를 너를 구원한 구세주로, 메시야로 믿고 있느냐” 바로 그것을 묻고 계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도 귀신들이 주님을 알고 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주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만 가지고서는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들을 사변적으로 알고는 있는데 정작 우리의 삶 속에서는 구세주로 아는 그분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은 성경에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분은 우리의 삶 속에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지만, 그렇게 믿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질병이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알고는 있지만 아는 만큼 믿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조상들의 믿음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일들을 하셨는지는 잘 몰라도 그분이 구세주 라는 사실 만큼은 확고하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굴러다니는 것이 성경이요, 텔레비전만 켜면 일년 내내 설교가 나오고, 라디오를 켜도 좋은 말씀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노회에서나 교회에서 성경고사 치르는 것을 볼 때면 제가 모르는 것도 수두룩 합니다. 그만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우리 조상들의 믿음의 삶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세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은 많지만 그대로 믿지는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지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함께하며, 여러분과 동행하시는 그분에 대해 여러분은 누구라고 고백하실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그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신뢰 없이는 그분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험되어지지 않는 그분을 향하여 우리는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삶으로 체험되어진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큰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그분만이 나의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앎의 수준이 아니라 주님을 실제적으로 신뢰하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 이방 여인은 어떠한 믿음을 가졌습니까? 예수님만을 주목하며 간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이방 여인은 주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러한 믿음 가운데 그녀가 고백하고 있는 22절의 말은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입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렇습니다. 

앞에 예수님이 있고, 그 뒤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 뒤에 이 여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 무리들 앞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칠 때는 적당히 소리쳐서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절박함을 모아서 힘껏 소리쳤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절규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절규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달라는 매우 절박한 호소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 앞에서 주님의 자비하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소망이 없는 자요, 고통받는 자요, 지극히 어려운 자라는 것을 드러내놓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이 귀신들렸다는 것 또한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 앞에 나아가면서 자신이 처한 모든 현실에 대해서 하나의 눈속임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두로와 시돈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생면부지의 한 남자에게 자신의 딸이 귀신들렸노라고 그래서 당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정직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사실 정직하게 기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까지 우리를 포장하고 외식할 때가 많습니다. 짐짓 거룩한 것처럼. 짐짓 의로운 삶을 살아 온 것처럼 기도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놓지 않기도 합니다. 

간구하는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나의 모든 것을 아뢰는 것뿐만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겸손하게 낮추고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까지 가리고, 감추고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 것은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 앞에 자신의 모든 상황과, 모든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신뢰하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믿음을 보시면서 “네 믿음이 크다.” 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오직 예수님만을 주목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 그 중간에서 제자들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그녀를 막았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녀는 제자들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자신을 막는 제자들과 다투거나 실랑이를 벌이지 않습니다. 

오직 그 눈이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분만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제자들이 떠들고 방해했지만 그녀는 오직 주님의 잎에서 나오는 그 말씀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께만 맞춰지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초점이 맞춰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열심을 내고, 에너지를 쏟고 힘을 낭비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즐거워 할 일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런 초점을 잃은 행사들이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엉뚱한 일에 시간과, 노력과, 재물들이 낭비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오면서도 하나님께 관심을 두기 보다는 다른 것들에 관심을 둘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일들을 치러 내는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교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예배하고, 어떻게 하면 더욱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을까에 집중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끌어 모으며, 어떻게 하면 교세를 확장시킬 수 있는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면 그것은 육의 행위요, 죽은 행실이요,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공동체가 하나님의 기뻐하실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명하신 사명을 이 땅 가운데서 더욱 잘 감당할 수 있을까.” 라는 것에 집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교인 중에 누군가가 눈에 가시 같아서 교회에 못 오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사람이 자꾸 눈에 가시가 되는 것입니까? 그 사람만 자꾸 보니까 가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초점을 놓치고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에 주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라 할지라도 오직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고, 핵심적인 것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다른 교회의 어떤 장로님은 일주일 내내 그 관심이 돈에만 집중되어 있다가 주일에 사회 보러 올라가서 하는 말이. “다 같이 찬송가 360원 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 순간이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 주목하여 바라보고, 오직 그분께로만 우리의 모든 의식이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삶의 모습이 믿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그분에게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이 이방 여인이 모든 환경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집중하고, 주님만 주목하고,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럴때 주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 주목하고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소리치는 여인의 간구에 주님께서는 냉담하게 반응하십니다. 24절에서 본 바와 같이 이방여인인 너에게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발 앞에까지 와서 이 여인은 꿇어 엎드려서 다시 한 번 간청합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겸손과, 모든 노력과, 모든 어려움을 내려놓고 주님께 간청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에서는 더더욱 냉담한 말씀만이 나옵니다. 26절에 보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말하자면 너는 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개인데 왜 사람들이 누려야 할 것을 누리려고 하느냐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에 이 이방 여인의 감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도 구세주라고 믿고 왔는데, 너무 사는 것이 힘들어서, 딸의 사정이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서 그 병 한번 고쳐보겠다고 찾아 왔는데 고쳐주지는 않고 개취급이나 하고 있습니다. 속된말로 이런 개같은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감정이 속에서 치밀어 오르지 않겠습니까?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얼굴에 침을 뱉고 돌아 설만 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개 취급을 받는 이방사람입니다. 당신이 이스라엘을 위해 왔고,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지만 그래도 부스러기 정도는 나눠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 그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그 은혜라도 베풀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 속에는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내게 주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제발 그 부스러기라 할지라도 내게 달라는 것입니다. 그 부스러기 정도면 충분합니다. 자신이 이방 여인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 은혜에서 소외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스러기라 할지라도 은혜 안에 거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포기하는 것입니까?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한다면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의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여인이 포기하지 않고 더더욱 매달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구세주요, 메시야임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임을 믿었기 때문에 그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구하며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딸을 고쳐줄 수 있다는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포기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정말로 딸의 병을 고칠만한 믿음이 있는가 시험하셨고, 실제로 그러한 믿음이 있음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리고 그 시로부터 그녀의 딸이 낫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방인이었지만 큰 믿음을 소유한 한 여인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방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필요로 했고, 그분께만 집중하며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이 그 딸을 낫게하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변적인 지식만을 뽐내는 그러한 믿음입니까? 아니면, 오래된 전통 속에서 신앙의 연륜만을 자랑하는 그런 믿음입니까? 아니면 정말로 주님이 나의 구세주 되심을 믿고, 삶 속에서도 나의 구주 되시는 주님만 철저하게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입니까?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네 인생의 크기는 네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얼마나 크신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크신 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인생은 어떠한 환경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좋은 조건을 가지고 시작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나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 그분을 얼마나 큰 분으로 믿고 신뢰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질이, 삶의 영역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을 볼품없는 하나님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을 무능력하고, 쉽게 포기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을 제한이 있고, 못하시는 일이 많으며, 가끔은 안계신 것 같은 그런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적인 논리나, 사변적인 지식 속에 가둬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는 믿음이 있는 자들을 향하여, 그 모든 믿음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요, 작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작은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큰 믿음 갖기를 소망하십시오. 큰 믿음 소유하시기를 갈망하십시오. 더 큰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이 땅을 힘있게, 능력있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믿음을 소유하셔서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함 받고, 모든 고통들이 사라지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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