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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를 보내시는 하나님 (출 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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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보내시는 하나님 (출 4:1~17)  

우리가 모세의 생을 보게 되면, 정확히 세 단계로 그 인생이 구분되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나이 120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 당시의 사람들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의 인생을 살아가던 때 아닙니까?  그렇다면 모세는, 일반 사람들의 갑절의 인생을 살다 갔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지냈던 인물이, 모세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생이 길든 짧던, 이 땅의 모든 인생은, 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모세가 120세가 되어서도 강건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명을 거역할 수 없기에, 인생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부하던지 가난하던지, 존귀하던지, 비천하던지, 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약에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시간들을 예비해 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날 밤, 그 영혼을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시 36 : 9절에 보면,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후회함이 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르게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날들을 계수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그 지혜의 마음,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영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는 이러한 영의 지혜를 얻게 되어지는 줄 믿습니다.   

모세가 왜 120세가 되어도 강건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질 못하고 죽었습니까?   모세의 말년에 영의 눈이 어두워져,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는 지혜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래서 므리바 물가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고, 백성들을 향해 분을 내었던 것이고, 결국 그 죄로 인하여, 모세 또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과연 느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하시고, 내 인생에 역사하심을 깨달으며, 나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뜻에 지금도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인생은 일반 세상 사람들의 인생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다를 게 있습니까?   어차피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매 한 가진데...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린바 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에 역사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깨달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깨달음이, 오늘 여러분 가운데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모세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성경을 통해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인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 어떤 인생을 살아갔습니까?  그는 나일의 하수가에서 구원을 받은 후, 애굽의 왕궁에서 40년간을 지내게 됩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보낸 이 40년의 세월은,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세상을 알게 하시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의 애굽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모세는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인, 애굽의 바로의 궁에서, 모든 세상적인 학문과 지식과, 그들의 문화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모세를 이러한 세상 문화 가운데 속하여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만들지 아니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이제는 영적인 세계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를 광야로    내 몰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본의 아니게 광야로 나가서,    또 다시 40년간을 양을 치면서, 세상과 분리된 가운데, 영적인 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에게 있어서 이 광야의 40년의 세월, 광야에서 양을 치며 지낸 이 40년의 세월, 이 세월이 그냥 단순히 목자로서의 생활이었겠습니까?  아니지요?  어떤 의미였습니까?   이후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애굽에 속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영적인 목자로서의, 훈련의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물론 모세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의 모습으로 있을 그 때,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때 영적 지도자로서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다시금 모세가 애굽으로 나아  가게 된 그 때의 나이가, 80세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이 80세에, 하나님이 주신 영적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향해 나아가고, 나중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 때 그의 나이가 120세였다는 것입니다.

40세, 80세, 120세, 이렇게 정확하게 모세의 인생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단계별로 역사하시고 인도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우리는 이런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모세라는 한 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세밀하시고, 치밀하신 계획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치밀하시고, 세밀하신 계획  하심이, 그저 모세에게만 국한되어진 것이겠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하심은,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 개개인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믿으시면 크게 아멘 합시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을 한 번 돌아보세요.  어떤 인생을 살아가시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의 인생여정 또한, 모세와 비교해 보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과, 모세의 인생을 비교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심과, 애굽에서의 부르심, 또한 그에게 허락하신 사명, 오늘 우리에게 나타난 영생으로의 구원과, 세상에서의 부르심,  또한 우리에게 주신 사명, 또 다시금 세상 속으로 들어가, 주의 능력으로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천국으로  이끌어 가라는 사명을 주신 것, 이 모든 것이 모세와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은,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상에 속해 살아갔던 우리들입니다. 세상 문화에 속해, 그들과 함께 세상을  즐기며 살아가던 우리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문화에 제법 익숙해 져 살아가던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세상 문화 속에 그대로 거하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신앙이라고 하는, 전에 접해 보지 못했던 신앙이라고 하는 광야로 내 모셨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세상 문화에 익숙해 있던  모세를, 전혀 생소한 미디안 광야로 내 모셨던 듯이, 오늘 우리들 또한 익숙한 이 세상에서, 전혀 생소한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이 광야에서, 세상과 분리된 채로 영적인 생활을 하게 되고, 또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여러 가지 직분들을 감당하며, 오늘 이 시간까지의 세월을, 우리가 보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까지의, 우리 성도들의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이제 인생의 세 번째 단계인, 보내심의 단계인데, 모세는 이 단계에서, 자신이 양을 치던 미디안 광야에서 성령의 힘에 이끌려 하나님의 성산 호렙에 이르게 됩니다. 이 호렙 산에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떨기나무 속에 불꽃같이 임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각 자의 인생에 있어   어떤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번째 단계인, 신앙이라는 광야에서의 인생입니까?  아직도 신앙생활이 생소하게 느껴지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왜 나를 굳이 세상과 분리시켜, 이렇게 재미도 없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시는가?   이러한 불만과 불평 속에 지내고 계십니까?   

만약 여러분 가운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그런 분은 좀더 긴 세월을, 광야에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  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때까지는, 광야와 같은 신앙생활을 체험하면서, 영적인 훈련을 더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이러한 영적 훈련을 거친, 이제는 인생의 세 번째 단계인 부르심에 응해야 하는, 사명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예배의 장소가 어디  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던 중, 성령에 이끌려 나온   하나님의 성산 호렙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성산에서, 우리 또한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호렙 산과 같은 이 교회에서, 떨기나무와 같은 이 강단에서, 하나님은 불꽂같은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영적인 귀를 열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또한 모세와 같이 세상에 때 묻은 죄를, 신을 벗는 마음으로 벗고서, 우리의 신앙을 추스르며,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고 계십니까?  세상 속에서, 마귀의 올무에 메여 고통받고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들을 이끌어 내, 천국으로 인도하라는 말씀을 주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르심과 사명 주심을, 우리는 아멘하며 순종함으로 감당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주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와 같이, 우리는 주저함으로, 소극적으로 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과 일대일의 신앙생활은 잘 합니다.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소극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봅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아직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들, 세상 사람들이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모세는 처음에만 거절한 것이 아니지요.  애굽으로 가라하신, 두 번째 하나님 말씀에도 거절했습니다.  10절 말씀에,  모세가 뭐라고 대꾸하고 있습니까?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자신은 말주변이 없어서,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세 번 째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가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오늘 본문 13절에 보니까,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라고 말하며, 또 다시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모습,  여러분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러한 상황을 접하게   되었을 때,  모세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아따 그 녀석 되게 말 안 듣네. 그래 하지마! 이놈의 자식”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불순종의 대가로 징계하시겠습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더라도, 누구 하나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씩이나 가지 않겠다고, 여러 가지 변명과 이유를 들어 거절하는 모세를 향하여, 참으시고 또 참으시면서, 다독거리셨습니다.  모세가 알아듣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가지 않겠다는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화도 잠시, 다시금 모세를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원래부터 교만한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몇 번 말해보고 안 되면, 그냥 꺾어 버리셨을 겁니다.  
그러나 모세는 원래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민 12 :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불신앙적인 사람이 아니고, 그래도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적인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해서는 보내시기 위해서,    참고, 참고, 또 참으시면서, 결국 그를 세워 애굽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소극적이고, 맡겨 주신 일에 대해서도 지극히 수동적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계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이 부족한 신앙이지만,   그 신앙을 인정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위로와 격려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절 이하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해 행하신 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가지가 나타나고 있는데, 첫째는,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의 손이 문둥병에 걸렸다가, 낫게 되는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적을,  오늘 우리에게도 이미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적을 살펴봅시다.  어떤 내용입니까?   모세가 가진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 했습니다.  
여러분 뱀에 대한 상식이 있으십니까?   뱀을 잡을 때, 어디를 잡아야 합니까?  안 잡아봐서 모릅니까?  뱀은 머리를 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꼬리를 잡으면, 물릴 확률이 100%라고 합니다.  그래서 땅꾼들은 뱀을 잡으면 무조건 머리를 잡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뱀에 대한 상식인데, 하나님은 어찌 모세에게 꼬리를 잡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100% 물릴 수밖에 없는 뱀의 꼬리를 잡아도, 결코 물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뱀의 꼬리를 잡았을 때, 그 뱀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마른 막대기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을 만나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뱀은, 모세가 원래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였습니다.  애굽에서 만나게     될 바로가 독사와 같이 덤빌지라도, 결국 모세의 손에 쥐일 지팡이와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적은 무엇입니까?  손에 문둥병이 발하였다가, 다시금 낫게 되는   이적이었습니다.  그 당시 문둥병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게 되면,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둥병이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깨끗이 낫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이적을 이미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언제 나에게 이런 이적을 베풀어 주셨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가운데, 이와 같이 뱀이 지팡이가 되는 이적을 체험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나를 대적하는 환경을, 내가 다스릴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방법은 아닌데 생각되어져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따랐을 때에, 그 위험스러운 환경을 이기고, 우리를 괴롭게 하는 대적을 오히려 다스리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또한 문둥병과 같은 극한 상황 가운데, 도무지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어,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저 믿고 순종하고 따랐더니, 그 문제가 눈 녹듯이 해결되어지는 역사를 체험함이, 여러분에게도 분명 있었을 줄로 압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을까요?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이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남들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은, 단순히 나를 남보다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더욱 더 담대히 감당해 나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배려였다는 것입니다.  
그저 은혜에 감사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뱀이 지팡이가 되는 이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은, 그 이유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누구를 위한 이적입니까?  모세를 위함입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모세가 아니라,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모세 네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가면, 그들이 나 여호와를 하나님인 줄 믿게 될 것이다.” 이런 뜻의 말씀인 것입니다.  

문둥병도 마찬가지입니다.  8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누가 믿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애굽에 속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 임한 은혜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은혜가 큰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저 감사의 조건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일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과거에, 또는 현재에 큰 은혜를 체험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 은혜에 대비해,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은혜가 큰 만큼 더 많은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나는 부족한 자입니다.  나는 입이 뻣뻣합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들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한 청년이, 레지스탕스로 오해를 받아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판을 받던 중, 자기가 얼마나 억울한가 자기 변호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 언도를 받게 되자, 감방에 돌아와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가, 한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울며 호소했습니다. 

“나는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억울하게도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감방에는 진짜 레지스탕스가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레지스탕스가,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조국이 이렇게 어려운데 아무 일도 안 했으니, 당신은 죽어 마땅하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하나님이 가라 하신 곳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라 하신 일들을 순종하며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순종하며 그 뜻을 행할 때에,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을 못한다고, 입이 뻣뻣하고 둔하다고 변명하는 모세를 향하여, 대신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 말 잘하는 아론을 붙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권위가 깎이게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보다 말 잘하는 사람, 누구입니까?  아론입니다.  
육신적인 관계에서도 아론은 모세의 누구입니까?   형이었습니다.  

비록 아론이 형이고, 말에는 능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결코 모세를 능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했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어떤 존재가 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권세입니까?   누가 이렇게 모세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재주도 없는, 그저 나이든 목자에 불과합니다. 
옛날에야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 남부럽지 않게 지낸 경험이 있지만, 그야말로 옛날 일입니다.  지금은 자신이 보기에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세를, 그가 주신 사명에 순종하여 감당해 나갈 때에,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과 같은 능력의 존재, 존귀한 존재로 세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자꾸만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의 피곤함이, 여기에 이유가 있다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성도로서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같이 피곤하고 힘들게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를 순종시키지 못하고, 계속해서 거부하며, 사양하며, 내 뜻을 고집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교만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교만한   사람이기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겸손한 사람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길 바랍니다.  지나친 겸손은, 어떤 경우에는 교만보다 더 악할   때가 있습니다.  왜입니까?  모든 일에 소극적인 지나친 겸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예요.  하나님은 된다고 하는데, 자꾸만 자신의 현재 능력을 생각하며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못 믿는다는 결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을 신앙을 향해 일컫는 말이 있지요?   “못해 신앙”이라고. 뭘 하라 그러면, 못한다는 소리부터 먼저 합니다.  “못해요, 못해!!”  
그래서 “못해 신앙” 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이끄셨던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도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모세를 향한 계획을 가지시고, 모세를 연단 하시고, 훈련시키셨던 하나님  께서는, 오늘 우리들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하고 연약한 것, 내가 말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나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세상에 보냈다간 실패할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그냥 보내지 아니하시고, 능력으로 함께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족한 것은 채워 주시고, 연약한 것은 강하게 해 주셔서, 세상에서도 능력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지금도 부르시고 계시고, 또한 보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누가 감당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오늘 이 말씀을 받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 오늘 저와 여러분은 세상으로 보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이끌어 오라고,  오늘 우리들을 세상으로 가라 명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에 모두가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17절 말씀 다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여러분의 손에 쥐어진 은혜라고 하는 지팡이를 잡고, 세상에 나아가 놀라운   이적을 일으키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많은 생명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의 하나님의 종들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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