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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매를 맺는 가지 (겔 31:5~6, 요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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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는 가지 (겔 31:5~6, 요 15:1~2)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구소련의 서기장으로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개혁 개방정책을 펼쳤을 때에 사회는 극도로 혼란했습니다. 경제도 정치도 과도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식품점 앞에 장사진을 치고 서로 밀고 새치기하며 빵을 구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루가 지났지만 좀처럼 줄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한 모스크바 시민이 울화가 치밀어 올라 “이 모든 것이 고르바초프 탓이다”라고 하면서 “고르바초프를 죽이러 간다”고 하면서 줄을 이탈해서 어디론가 가 버렸습니다. 하루가 지난 뒤에 그가 풀이 죽어 다시 식품점 앞에 나타났습니다. 줄을 서 있던 다른 주민이 “그 때 고르바초프를 죽였는가?”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그 줄은 여기보다 2배나 길었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이념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린 배를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정책은 허사입니다. 성취되지 못할 이론은 모두가 허구에 불과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강하게 실용주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너무 실용주의에 빠져 있다가 순수 이론이 훼손될까 우려도 됩니다. 실용주의는 그 자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실용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는 최근에 다시 철학이 뜨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실용주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용성이 없는 이론은 그 자체가 허구이며 심지어 사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조선조의 실학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사색적 이론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아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해답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이론만 무성한 유학에 대한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 대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학은 당시의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학문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열매를 못 맺는 가지는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무성한 이론에 불과합니다. 실천이 없는 이론에 불과합니다. 많은 학문들이 열매가 없이 가지만 자라고 잎만 무성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예수님도 배격하십니다. 마태복음 3:10에는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합니다. 살리지 못하는 것은 없애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져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세상의 이론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는 다락방 강화 가운데 제자들에게 주신 사적 교훈입니다. 14장은 위로의 말씀입니다. 15장은 교훈입니다. 그리고 16장은 확증입니다. 1절에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합니다. 그리고 5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이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가지가 될 수도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가지가 되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지입니다. 가지는 가지인데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가지를 통하여 나무가 보여야 합니다. 가지를 통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가지를 통하여 나무의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포도는 성지에서 보리, 올리브와 더불어 가장 친숙한 농작물입니다. 농작물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의미할 때 포도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5장에는 포도밭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도밭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시편 80:8에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라고 합니다. 포도나무는 애굽에서부터 와서 심겼습니다. 그 가지가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바다까지 뻗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가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첫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절에는 “무릇 내게 붙어 있어”라고 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다는 자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조건입니다. 아무리 가지가 튼튼해도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나무와 가지의 밀접한 관계를 보세요. 나무와 가지는 끊임없는 생명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거룩한 영적 교제의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뿌리에서 흡수한 수분이 줄기를 통해 가지에 전달됩니다. 잎에서 엽록소가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영양분을 만듭니다. 이 둘이 함께 가지에 전달되어 열매를 맺게 합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나무와 잎의 유기적인 관계가 필요합니다.

  어머니 뱃속의 아기를 보세요. 탯줄을 통하여 영양분과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습니다. 그리고 체내에 필요 없는 것들을 다시 모체로 방출합니다. 이런 받고 내 보내는 과정을 통하여 건강하게 성장하여 아기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탯줄은 누구의 것입니까? 어머니의 것입니까? 아기의 것입니까? 탯줄은 아기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머니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기가 어머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씨가 어제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였습니다. 11일 동안의 우주 임무를 잘 마치고 카자흐스탄의 초원에 착륙하였습니다. 우주인들이 우주정거장에서 활동할 때는 아주 자연스런 복장을 하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일단 캡슐이나 정거장 밖에 나와 우주유영을 할 때면 산소 파이프를 길게 탯줄처럼 의지하고 다닙니다. 이 줄이 없으면 잠시도 살아 있지 못합니다. 산소를 공급받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서울이란 대도시에 1,000만 이상의 인구가 삽니다. 이 많은 인구가 살기 위해서는 음식, 물, 옷, 필수품 등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물자가 서울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동시에 엄청난 양의 필요 없는 것들이 끝없이 나갑니다. 새벽이면 산더미처럼 쌓이는 쓰레기 그리고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오수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거대한 도시는 살아서 움직입니다. 필요한 것을 섭취하고 필요 없는 것을 방출하는 일, 이 둘의 순환이 잘 돼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도 나무도 모든 생명체가 다 그러합니다.

  우리 영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생명의 탯줄이 잘 이어져 은혜를 받고, 영성을 얻고, 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죄와 더러움을 배출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교수님 가운데 도디 도널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공부 시작하기 전에 항상 숨쉬기부터 하였습니다. 눈을 감고 손을 무릎에 올리고 숨을 크게 들이키면서 내 속에 들어와야 할 것들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다시 숨을 내 뿜을 때에 내 속에서 나가야 할 것들을 묵상합니다. 이렇게 하므로 호흡을 통하여 있어야 할 것들을 초청하고 없어야 할 것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 생명을 공급받아야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 아닌 것들이 나가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합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서로가 필요한 관계입니다. 거룩한 관계는 거룩한 교제를 통해 가능합니다.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이런 좋은 관계가 열매를 맺기 위한 필요충족 조건입니다. “예수가 없다면 크리스천은 무력하다. 크리스천이 없다면 예수는 무력하다”는 말처럼 예수님과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고 충족한 관계입니다.

  로마서 11:17-24에는 감람나무를 접목하는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비유하기도 합니다. 원 감람나무는 유대인입니다. 접붙인 돌 감람나무는 나중에 믿게 된 이방인입니다. 꺾인 가지는 타락한 유대인입니다. 나무에 접붙임을 받는다는 것은 원래 나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래 나무가 좋지 못하면 접붙힘을 받은 나무도 좋을 수가 없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묵상’이란 책에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의 모든 자선행위는 돌 감람나무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가지는 열매 맺는 기능보다 우선 나무 붙어 있다는 본질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 보다 어디에 붙어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옛 소련공산당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산당 인민위원이 집단농장을 시찰하였습니다. 일이 잘 돌아가는지, 불평은 없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농부는 “전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수확은 어떤가?”고 물어보았더니 “작황이 점점 개선되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감자 수확은 잘 되는가?”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농부는 “감자를 수확해 쌓으면 하나님의 발끝까지 이를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인민위원이 “여기 소련에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자 농부는 “그렇습니다. 감자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하나님 없이는 감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감자도 있습니다.

둘째,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제거되고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합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열매 바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유실수입니다. 목재용도 아니고 관상용도 아닙니다. 유실수는 열매가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열매가 생명입니다. 포도나무는 잎이나 줄기를 보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는 열매 맺되 많은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열매를 맺되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사야 5장에는 포도원의 노래가 있습니다. 주인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많은 수확을 기대해서 망대를 만들고 포도주 틀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수확하려고 보니 들 포도를 맺혔습니다. 그래서 “들 포도를 맺음은 어찜인고?”라고 주인은 한탄합니다.

  오래 전 프랑스에 갔을 때 마로니에 가로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밤나무인데 밤이 탐스럽게 열리기는 하지만 써서 못 먹는 밤나무입니다. 그 나무의 이름이 ‘너도밤나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이 밤나무를 보고 ‘너도 밤나무냐?’라고 한답니다.

  우리의 열매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열매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사람 됨됨이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입니다. 우리의 신앙상태입니다. 성경은 9가지 성령의 열매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열매들은 성령으로 우리가 맺을 열매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열매는 우리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이루어놓은 일들입니다. 우리의 봉사와 헌신입니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이 가장 귀한 열매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전도의 열매라고 합니다. 오랜 신앙경력이나 직분은 있지만 열매가 없는 사람은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어 저주받은 무화과 꼴입니다. 열매가 있어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8절에는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의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은 “잎이 무성하면”, “뿌리가 깊고 오래 견디면”, “줄기가 견고하고 굵으면”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 영광은 아닙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란 소설에는 “그리스도는 부정한 여인은 용서했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저주했어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을 가능성이 있는 여인은 용서하셨지만 열매 맺을 가능성이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은 나무를 심고 3년을 기다려도 열매가 없습니다. 주인은 농부에게 “나무를 찍어버리리라.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농부는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만일에 열매를 맺으면 좋고 아니면 그 때 찍어버리소서”라고 합니다. 주인의 뜻이 무엇입니까? 열매 없는 나무는 찍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인에게 안 찍힐 자신이 있습니까?

  열매 없는 가지는 제거하십니다. 열매 있는 가지는 더 많이 열리게 깨끗하게 하십니다. 없는 가지는 아예 없게 하시고 있는 가지는 더 많게 하십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맺지 못하는 가지를 아예 제하여 버리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서 불에 던지십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가 더 많이 맺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깨끗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지하고 다듬는 것입니다.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가지를 쳐보고도 안 되면 찍어 불에 던지십니다.

  없는 가지는 없애고, 있는 가지는 더 많이 열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은 성경 곳곳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달란트의 비유나, 므나의 비유의 결론은 똑같이 “있는 자는 더욱 많아져서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양극화를 의미합니다. 달란트 비유가 종말적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양극화는 종말적 현상을 의미합니다. 아마 갈수록 양극화 현상이 심화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상은 상위 10%의 부자의 소득은 하위 10%의 18배입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닙니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채택한지 30년도 안됐지만 빈부의 격차가 위험수위에 도달했습니다. 상위 20%의 소득이 하위 20%의 22배에 달하고 있습니다.
  영적 양극화도 이미 발생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풍성한 자와 영적으로 빈곤한 자가 양극으로 벌어지게 됩니다. 영적으로 빈곤한 자는 결국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즉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런 명목상의 교회도 점점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성장을 말할 때 두 가지 성장의 요인을 크게 구별합니다. 하나는 개심에 의한 성장이고 다른 하나는 수평이동에 의한 성장입니다. 수평이동은 진정한 교회성장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수평이동은 양극화 시대의 자연적 현상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도 비영성적인 교회에서 영성적 교회로 교인들이 흘러갑니다. 중심이동이 일어나고 양극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오늘날에는 신비주의자가 되든지 아니면 불신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고 합니다. 개인의 영성도 양극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영적 양극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가 열매 없어 베어버린 가지가 아니라 더 많이 맺게 하시려고 깨끗케 하시는 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제가 잘 아는 열매 맺은 두 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분은 장로님이십니다. 이 분은 북한에서 피난오신 분입니다. 북한에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피난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십일조 주머니만 가지고 왔습니다. 광목천으로 손바느질하여 만든 자그마한 주머니입니다. 한 쪽 면에 잉크로 ‘십일조’라고 써놓은 주머니입니다. 그 장로님은 평생 동안 이 주머니를 간직하시면서 돈이 많든 적든 번 돈의 십일조를 떼어 이 주머니 속에 넣었다가 주일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장로님은 하시는 일마다 잘 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존경받고, 겸손하고,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열매였고, 열매 맺는 삶을 사셨습니다. 또 한 분은 권사님이십니다. 세상에서 인기 연예인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 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서 세상의 일이 덧없음을 알고 그만 두시고 신학공부를 하셨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많은 사람을 전도하려고 공부하였고 하셨습니다. 요즘에도 매 주일 빠짐없이 전도하고 계십니다. 매주일 주보에는 그 분이 전도한 사람이 서너 명씩은 꼭 됩니다. 가장 귀한 열매를 많이 맺은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나무인 그리스도에게 든든히 붙어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좋은 가지가 됩니다. 그리하여 많은 열매를 맺읍시다. 열매 맺는 가지가 좋은 가지입니다. 세상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나 지식을 가졌다고 좋은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의 열매, 영적 열매, 생명의 열매,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맺은 많은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풍성한 상급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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