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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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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마 15:21~28)

I. 이방땅 두로와 시돈

"굼벵이가 지붕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은 매미가 되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옛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미련한 행동에도 그 배후에는 꿈이 있고 소원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인간은 꿈이 있고 소원을 가진 동물입니다. 꿈이 클수록 소원이 클수록 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가진 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 친구들과 모래사장에서 놀면서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하는 놀이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두껍이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우리의 헌집을 가지고 가고 새집을 줄 수 있겠습니까? 오래전 제가 썼던 책 가운데 「즐거운 교환」이란 책이 있는데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헌집을 가져가시고 새집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질병을 가져가시고 건강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온갖 상처와 쓰레기를 가져가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복을 나눠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집안에 있는 한 어린 딸아이가 귀신들려서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끈질기게 기도함으로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큰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간단하고 짤막합니다만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복음적인 의미, 선교적인 의미, 마태복음 안에서 신학적인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유대영역을 떠나신 적이 꼭 한 번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이 본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복음전파에 있어서 이스라엘이라는 장벽이 무너지고 복음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여는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5장입니다. 마태복음은 2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 15장은 분량으로도 그 중간이 놓여 있고 특별히 마태신학적인 면에서도 터닝 포인트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태가 유대인 선교, 갈릴리 선교를 다루었다면 이제부터 마태는 예루살렘 선교, 이방인 선교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가나안 영역에 속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본문의 주인공은 가나안 족속의 피가 흐르는 이방여인입니다. 요세프스의 글에 의하면 두로지방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가장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더구나 시돈은 아합왕 때 바알 신을 끌고 와 나라의 신으로 섬기게 한 악녀 이세벨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대 역사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땅을 지나게 될 때 이 지방 여인 하나가 예수님을 좇아 왔습니다. 이 여인의 딸이 귀신에 붙잡혀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꽃같이 자라고 티없이 놀아야 될 어린 딸이 더럽고 추한 병에 시달릴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질듯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때문에 아이의 어머니는 백방으로 딸이 나을 수 있는 길을 힘써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 분 만나면 귀신이 두려워 떨며 도망가고,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고, 보지 못하던 자들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 만날 기회를 몹시도 기다리던 가운데 마을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의 행렬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II. 장벽 ① - 사람의 장벽

그렇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발길이 머무는 그곳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그곳엔 언제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 말씀이 선포된다. 성령이 임재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이 절정에 달하여 우리가운데 오신다." 이것은 여러분 생애에 결정적인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I.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있어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이 맞는 첫 번째 장벽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이 여인이 만나는 장벽은 때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부딪치는 장벽일 수 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에게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 딸아이가 미쳤다는 것이 자랑이 아닐진대 어떻게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단 말입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이 말은 간단한 말 같지만 마태복음에 있어서 메시야를 대신하는 다른 용어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라는 인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성경에서 약속하셨던 메시야이십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알았습니다. 주님앞에 내 형편 있는 그대로 내어놓으면 주님이 나를 만나 주신다. 내 무거운 짐, 아픈 모든 것들을 들고 주님앞에 가면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 이것이 기도의 시작이요, 주님을 만나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 소리질렀습니다. 이토록 훌륭한 결단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마땅히 두 손 들어 그 여인을 영접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대한 제자들의 태도는 너무나 잔인했고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귀는 언제나 불쌍한 간구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져 있던 귀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의 입술은 언제나 부르짖는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위하여 준비된 입술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유독 이 불쌍한 여인에게만은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묻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에 부딪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을까요?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여 돌아섰을 것입니다. 원망하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이 분이 그렇게 소문에 듣던 자비로운 그분이란 말인가?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더란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면 이럴 수가 있는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돌아설 만하지 않습니까? 이 불쌍한 여인의 부르짖음에 예수님은 침묵만 하고 계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침묵하셨을까요? 이에대해 신학자 카르는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이 가진 작은 믿음의 씨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여러분 하나님의 침묵에 부딪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축복을 받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받은 축복을 잘 관리하는 믿음의 그릇이 되기를 주님은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침묵에 부딪쳐 있다면 작은 믿음의 씨앗들이 자라기를 기다리시고 받은 축복을 잘 관리하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이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은 결코 무응답의 시간이 아니고 바로 그것 자체가 내게 커다란 응답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다가 신앙생활하다가 무서운 침묵의 장벽에 부딪칠 때는 없었습니까? 바로 그 침묵 자체가 하나님의 응답이요 사랑이요 나에 대한 기대요 기다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시작된 작은 믿음의 씨가 자라기를, 내가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은혜를 간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믿음의 씨가 자라기를, 내가 받은 복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내 믿음이 자라기를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선 여러분의 태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끝없는 허공만 돌아오는 암담한 상황에 부딪힐 지라도 도무지 물러설 줄 모르는 "불퇴의 신앙" 이 신앙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III. 장벽 ② - 예수님의 냉담

2. 예수님의 냉담은 침묵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두번째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또 다시 한 번 타오르는 불길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24절입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 나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아마 이 정도에서 대개의 사람은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오히려 첫 번째 장벽에서 부르짖기만 하던 이 여인이 두 번째 장벽이 가로막자 오히려 한걸음 더 다가섰습니다. 25절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더 다가와 주님 앞에 애원했습니다. 

제자들의 냉대도 예수님의 침묵도 이 여인의 열심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의 거절과 냉대도 이 여인을 물러서게 하지 못했습니다. 기도에는 이러한 열심이 필요합니다. 물러서지 않는 태도가 예수를 만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의 태도는 얻을 때까지 매달리는 것입니다. 찾는 이의 태도는 찾을 때까지 열심히 찾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진정으로 응답받기 원하면 문이 열릴 때까지 몸부림을 해서라도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주님앞에 나와 엎드려 절하며 "나를 도우소서" 애원했습니다. 

아프리카 부족이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를 드리는데, 이 아프리카 부족이 기우제를 드리면 반드시 비가 왔다지요. 어떻게 그러냐고 그러니까 비가 올때까지 계속해서 기우제를 드린다는 겁니다. 


IV. 장벽 ③ - 모욕 

3.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여인에게만은 응답의 문이 점점 더 굳게만 닫혀져 가는 듯 보였습니다. 세번째 장벽을 보시겠습니까? 

26절 예수님의 거절의 강도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갔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몇 가지 배경들이 있었습니다. 
① 이방인들은 제사를 지낼 때에 그들의 신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고 나면 신전에 있는 여사제들과 음란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음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라는 얘기는 이방인들은 음란한 족속이라는 뜻입니다. 
② "개"는 더러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먹은 것을 토하고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죄를 짓고 잘못했다고 얘기하고 또 다른 죄를 짓는, 동일한 죄를 짓는 - 율법없는 백성들, 부끄러움을 모르는 백성들, 끊임없이 죄를 반복하는 백성들이란 의미에서 "개"라고 생각했습니다. 
③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보면 걸핏하면 시비를 겁니다. 싸움을 걸어옵니다. 화평을 모르는 족속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개"라고 생각했지요.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향하여 유대인들이 너희를 향하여 "개"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너희들은 개다." 무서운 시험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시험은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유모어가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개"는 퀴온(Kuion)인데 축소형 어미가 붙어 여기서는 퀴나리온(Kuinarion) 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작은개 - 강아지를 의미합니다. 식용 개나 거리를 배회하는 개가 아니라 애완용 개를 일컫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퀴온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퀴온이라 말하지 않고 축소형 어미를 붙여 퀴나리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 애완용 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이 말을 거절이나 냉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응답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큰 절망과 낙심 가운데 어느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애완용 개가 루터가 밥을 먹는데 포크가 올라가면 따라왔다가 내려오면 내려오고 계속해서 손만 보고 왔다갔다 하는 것입니다. 뒷발을 들고 앞발 모두어 서서 루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기 한 점을 썰어서 던져 주었더니 폴짝 뛰어 받아 먹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루터의 눈에서 눈물이 핑돌며 주인의 밥상 앞에 앉아 주인의 손길을 바라보는 저 애완용 개처럼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주인이 던져주는 고기 한 점을 받아 먹기 위해서 주인만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여! 주님 앞에 한 마리 개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응답을 기다립니다. 도움을 기다립니다. 주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장면이 루터의 책에 나옵니다. 

여기 이방 여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① 22절 "소리질러"라고 할때 이 말은 '까마귀가 쉰 목소리로 끈질기게 울부짖는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반복적으로 소리지르며 따라왔다는 뜻입니다. 

② 25절 "절하며"라는 단어 역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엎드려 절했다'는 뜻으로 헬라어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인내의 기도를 말합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 기초자이며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의 대통령 당선 축하장에서 그의 한 친구는 이런 축사를 했습니다.

"오늘 각하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 힘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청년시절 각하와 나는 우리가 다니고 있던 교회의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세우기 위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첨탑 위에서 각하는 엎드렸고 나는 각하의 등위로 올라가 작업을 하던 중 그만 내가 들고있던 납통이 기울어져 뜨거운 납물이 각하의 손등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각하는 등위에 서 있는 나를 생각하고 꼼짝도 하지 않고 참아 주었습니다. 당신의 이 인내와 성실이 오늘 각하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을 줄 아는 사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 펼쳐 놓은 기도제목이 응답되어질때까지 매달릴 줄 아는 사람, 이게 내게 주신 사명이라고 판단되어지면 이게 옳은일이요, 진리라고 판단되어지면 끝장을 보는 끈기, 이것이 하나님앞에 쓰임받는 영적인 자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비전을 이루는 자질 또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인내와 끈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시련의 납통이 쏟아져 여러분의 머리가 뜨겁습니까? 손등이 저미어 옵니까? 예리하게 가슴의 상처를 파고 드는 아픈 사연이 있습니까? 막다른 골목에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사면초가에 부딪힌 분이 계십니까? 앞으로 전진해 보지만 안개낀 길처럼 앞길이 보이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매달려도 매달려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한 번, 두 번, 열 번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들이 있습니까? 그럴수록 포기하지 말고 주님앞에 매달리시기를 바랍니다. 

정상일보직전에 당신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한걸음만 더 전진하면 만날 수 있을 것을 한 번만 더 밀면 열릴 수 있는 문이 정상일보전에서 닫혀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한 번만 더 참으시고 하루만 더 인내하시고 하나님앞에 찾아나와 기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전도하는 일들도 그렇습니다. 한 두 번의 권유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세상에 신앙생활 안 할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땠습니까? 한 번 교회 나오기까지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얼마나 애를 썼으며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피를 흘렸습니까?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 이겠습니까?

미국 세일즈맨 협회의 조사에 의하면 "세일즈맨들의 48%는 한 번 만나서 권면하고 설득하고 전화해서 통하지 않으면 포기하는 사람들이고, 25%는 두 번쯤 만나서 권면하고 설득하고 전화해서 통하지 않으면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15%는 세 번까지는 권면하고 설득하고 전화해서 안되면 기꺼이 그만두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머지 12%만이 자신의 물건이 팔릴때까지 매달리고 찾아가고 설득하고 애원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 상품의 88%를 바로 그 끈기의 사람들이 판매한다"고 했습니다.


V.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다시 주님앞에 엎드린 이 여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오고 오는 인생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참으로 귀감이 될만한 고백이었습니다. 27절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바로 여기에 이 여인의 신앙의 절정이 있습니다. 

1. 첫째,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하나님께 항변하지 않는 자기 인정입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에 올라 가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가 되어서라도 주님의 긍휼을 덧입을 수만 있다면, 주님의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칭함을 입기에는 너무나도 부끄럽사오니 종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 돌아온 탕자의 고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님앞에서 "주여! 옳소이다"를 연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논란을 펴거나 사족을 달지 않습니다. "나는 개가 아닙니다." 반박하지 않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나이다. 주님이 개라고 말씀하시면 개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다윗아 너는 죄악중에 잉태되어 죄를 먹고 마신 죄인이 아니더냐. 주여 옳소이다.

모세야 너는 가시덤불처럼 거칠고 쓸모없는 존재구나. 레바논의 백향목이 아니면 민족을 이끌수 없다고 생각했지. 너는 가시덤불이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하면 꺼지지 않는 불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주여 옳소이다. 나는 가시덤불입니다. 성령님이 내게 오시면 레바논의 백향목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를 통하여 꺼지지 않는 큰 불길이 타오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아 너는 죄인 중에 괴수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못하고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는 너무나 합당치 않구나. 주여 옳소이다.

베드로야 너는 갈대와 같은 존재요 조약돌과 같구나. 그러나 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될 때에 너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게 될 것이다. 너는 반석이 되리라. 

주여 옳소이다. 나는 가시덤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오나 성령님이 임하시면 꺼지지 않는 불길되어 타오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나는 조약돌 같은 존재입니다. 하오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나는 교회에 반석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은 선포된 말씀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결단코 논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경험과 이성과 자존심에 맞지 않아도 "주여 옳소이다"를 연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는 사람, 오시는 예수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 바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용기를 주든지 실망을 주든지 책망하시든지 위로하시든지 응답을 주시든지 침묵하시든지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거두시든지 다시 돌려주시든지 높혀주시든지 낮추시든지 "주여 옳소이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진정한 긍정과 순종은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고 내 뜻과 내 지도자의 뜻이 다를 때 순복하고 Yes하는 거기에 진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똑똑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일들 앞에 옳소이다를 고백하지 못하고 얼마나 많이 항변을 합니까?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2. 둘째,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돌아설 수 없는 열심입니다.

어떤 난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계3:19)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열심이란 것은 인생의 엔진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자동차라 할지라도 엔진에 불이 붙지 않으면 꼼짝하지 않습니다. 열심의 불이 붙지 않는 사람을 통하여 역사를 이끌어 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에 주님이 주신 비전이 있습니까?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열심의 불이 붙어 있지 않습니까? 밤을 새워도 재미있는 것, 밥을 먹지 않아도 재미있는 것,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누가 박수를 쳐주지 않아도, 갈채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 것 그런 비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내 가슴에 주님 한분 모시고 주님 한분 때문에 만족할 수 있고, 주님 때문에 죽어도 행복하고 살아도 행복한 그 행복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언젠가 우리나라에 맹수 훈련가 레아니라는 유명한 사람이 왔습니다. 아나운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여 맹수들이 당신의 얘기에 그렇게 잘 따라 줍니까?" 레아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내가 열과 성을 다해서 온몸과 얼굴표정에 진심을 다해서 짐승들에게 얘기했더니 짐승들도 내 말귀를 알아주었습니다." 

바로 본문의 가나안 여인에게는 이런 열심히 있었습니다. 열심은 사람만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고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처럼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첫 번째 장벽, 두 번째 장벽, 세 번째 장벽에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주님앞에 그 열정을 보여드릴 때에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여인아" - 이 말은 원문에서 "오, 여인이여" 예수님의 감탄이 가득서려 있는 표현입니다. 여인의 믿음, 어떤 장벽에도 어떤 거절에도 어떤 냉대에도 어떤 무시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릴 줄 아는 이 여인의 신앙, 이 놀라운 신앙을 보고 예수님께서 "놀랍도다 여인이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크도다" 

지난 주일 말씀을 공부할 때에 물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물속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오셔서 베드로의 손을 붙들고 올리고피스토스 - 믿음이 작은 자여,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여 네 믿음이 왜 이렇게 작으냐? 베드로를 나무라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이방 여인의 믿음을 보고 예수님께서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여기 "크도다"는 메가톤급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여인아 네 믿음은 참으로 메가톤급이로다. 네 믿음은 놀랍도다 소원대로 될지어다. 할렐루야!

Bill Johnson이란 사람이 쓴 책 가운데 「하늘이 땅을 침노할 때」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늘의 어마어마한 능력이 하늘의 축복이 땅에 침노하는, 땅에 쏟아지는 비결이 있는데 현대인들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해져서 자기 생각, 자기 상식, 자기 경험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주판알을 두드려 보고 거절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안도와 줘도 되는 일만 한데요. 하나님이 필요없는 신앙인들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모두다 자기 판단으로 모든 것을 다 결정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도와 줘도 되는 계획만 하고 하나님이 안도와 줘도 능히 제 힘으로 감당할 일들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없는 인간들이 되어 버렸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왜 예수 믿었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에 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내 인생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순간, 주님의 전능한 손길이 나타나는 순간, 그 인생의 한계를 돌파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안도와줘도 되는 일만 한다면 그건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제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할 때에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분이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주인공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불가능하지만 그분이 함께 할 때 우리는 불가능을 돌파하는 힘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꿈도 꿀 수 없는 아이디어들이 여러분들의 머리속에서 번쩍 번쩍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셋째,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주님이 베푸시는 부스러기라면 그 부스러기만으로도 넉넉하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기록이 마가복음에도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이 여인의 끈질긴 기도로 그 딸이 나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이 딸이 나았다는 얘기는 마지막에 한 토막 스쳐지나가고 맙니다. 그 내용이 여인과 예수님과의 긴 대화, 이 여인과 예수님의 논쟁, 여인과 예수님이 주고 받는 세 번에 걸친 대화에 핵심이 있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부스러기면 됩니다라는 이 여인의 마지막에 믿음, 절정에 엑센트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스러기 한토막이면 내 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 한번만 가져주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집니다. 주님의 은혜 부스러기 한토막이면 나는 구원받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스러기 한토막이면 지옥의 문이 닫혀지고 천국의 문은 열려집니다. 주여 부스러기 한토막이라도 좋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런 얘기입니다. 

종종 야외로 나가 점심을 나눠먹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과자부스러기도 흘리고 밥풀도 흘리고 생선토막도 땅에 흘립니다. 그리고 한참 놀다와서 보면 개미란 녀석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밥풀과 과자 부스러기 생선토막을 열심히 나르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겐 생선 부스러기에 불과하지만 그 개미들에게는 한철 양식이 되고도 너끈히 남는 것입니다. 

미국과 캐나다 사람들이 개에게 주는 양식이면 동남아 빈국들을 기아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남한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를 치우는 비용이면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을 살리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베푸신 은혜 한 토막이면 이 백성이 새로워 질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이 나라가 새로워 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민족이 다시 거듭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 한 토막이면 침체의 늪에 빠진 한국교회가 새로워 질 줄로 믿습니다. 복음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내 아이를 살려내고 내 가족이 복음화되어지고 내 남편이 내 VIP들이 주님앞에 돌아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주님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이 교회 성령의 불이 떨어지고, 주님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안되는 일이 될 것이며, 주님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부정적인 시각들로 얼룩진 영혼들이 긍정적이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영혼들로 바뀌어 지게 될 것입니다. 포기했던 일들에 새로운 가능성들이 돋아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 주여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좋습니다. 주여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침 식사를 교역자들과 함께 식당에서 하는데 무 시레기가 나왔어요. 어떤 분이 무 시레기 철학을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이것은 시레기 버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잘 다듬어서 처마에 걸어 놓으면 그늘에서 말려지면서 햇빛이 슬쩍 슬쩍 스쳐지나 가는데 그때에 무 시레기가 비타민 덩어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목사님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렇게 얘기하고 웃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버리면 쓰레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걸어놓고 말리면 햇빛이 슬쩍 슬쩍 한번만 비춰주면 비타민 덩어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햇빛이 주의 보혈의 햇빛이 하나님 능력의 햇빛이 여러분에게 비춰지게 될 때에 여러분 역사의 비타민 덩어리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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