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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이루었다 (요 19:30) : 가상칠언(제6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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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요 19:30) : 가상칠언(제6언)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여섯 번째로 하신 말씀은 단순 명료한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헬라어 ‘테테레스타이’(tete,lestai)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완성되었다’ 혹은 ‘성취되었다’는 뜻이지요. 문법적으로는 완료시제가 쓰였는데, ‘완성됨으로써 영원히 완성된 상태로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몽땅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루어야 할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를 우리 말 성경이 잘 살려서 번역했습니다. 단 하나의 단어 속에 수천 년의 구속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던 복음의 완성이 담겨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죽으심 이전에 이루어야할 메시아에 관한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음에 대한 선언입니다. 메시아의 탄생과 사역과 죽으심에 관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어 왔던 모든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로써 그분의 죽으심 이후와 관련된 예언들 또한 성취될 것입니다. 부활과 승천에 관한 예언은 이미 성취되었고 역사의 한 날에 임하실 그분의 재림에 관한 예언 또한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계시라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계시는 언제나 아담에게 주셨던 원시복음과 연관해서만 주어졌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을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이 오시리라는 말씀은 구속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브라함의 씨’, ‘유다의 후손’, ‘다윗의 자손’ 등으로 표현이 달라졌지만 동일하게 한 인물을 지칭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누구인지가 모호했던 이전의 계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분명하게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시의 정점이며 계시의 완성자이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밝히 드러내어야 할 계시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들이 알아야 할 구속에 관한 모든 것과 하나님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온전히 다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가르치실 때도,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요 14:26). 성령님이실지라도 새로운 어떤 계시를 추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실제의 사실과 그 의미를 잘 드러낸 것이지 추가된 계시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셨으므로 더 이상의 계시란 없습니다. 새로운 계시란 미혹하려는 속임수일 뿐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셨음을 선언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는 말씀은 성육신의 목적이 대속(代贖)을 위한 죽음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십자가는 죄를 결코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대리속죄’(vicarious atonement)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대리속죄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고, 율법이 요구한 죄의 값은 지불 완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성품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공의이시므로 택하신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그냥 눈감아주실 수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의 성품에 위배되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합당한 형벌을 내리시는 동시에 택하신 백성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셔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처럼 죄에 대한 심판과 죄인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킨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하나도 간과하지 않고 다 심판하셨고 이를 통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롬 3:25). 또한 그 결과로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롬 8:1-2).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에 대해 아무도 몰랐고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그 때에, 예수님은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셨습니다. 어느 누구의 협력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홀로 다 하셨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한 사건으로서 이미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한 번 성취함으로써 그 성취의 결과가 영원히 효력을 나타내는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에도 수많은 죄가 저질러졌지만 그분께서 다시 피 흘리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단 한 번으로 죗값은 지불 완료되었고 그 효력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죗값이 완불되었다는 것은 죄인들이 자기 죄 때문에 지불해야 할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입장료를 다 내었다면 입장하기 위해서 내가 더 지불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기어이 조금이나마 지불하려 하는 것은 ‘자기 자존심’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며 ‘대신 지불하신 분의 은혜’를 짓밟는 짓입니다. 십자가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한 ‘모든 것’을 이루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죗값을 지불할 자격도 능력도 없음을 인정하고, 나의 협력은 ‘전혀 없는’ 가운데 오직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공짜 휴대폰도 알고 보면 이리저리 그만한 대가를 다 치룹니다. 그래서인지 예수께서 죗값을 대신 다 치루셨다고 선포해도 ‘아니야! 내가 해야 할 뭔가가 남아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행을 하든지 선행을 하든지 조금이나마 거들어야 양심이 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속을 위해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거슬리기 때문에 십자가를 영접하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서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머리로는 십자가를 영접했다고 하나 마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매료시켜온 사상들은 인간에게 ‘나는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의식을 일깨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온갖 장애와 방해를 극복하고 마침내 성공한 영웅적인 사람들 중에도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도전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인물을 모델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요 15:5)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매력이 있을까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조차도 전혀 기여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를 인정하기는 어려워합니다. 가능한 자기를 강화하고 가능한 자기를 극대화하라는 세상의 가르침들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걸림돌이 됩니다.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의 지혜를 혼합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것은 인간을 감동시킨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그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고 열심히 자기 노력으로 율법을 지키고 구원을 획득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가 반반씩 협력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라 가르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거의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아주 조금은 인간이 협력하는 부분이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그러한 가르침들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에 거슬리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다 이루었다”하시는 말씀을 막아서면서 ‘아니요! 당신은 온전히 다 이루지는 못했어요.’라고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조차 ‘다 이루었다’는 말은 ‘덜 이루었다’는 말이 아님을 압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반을 이루었다’는 뜻도  ‘거의 다 이루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의 가능성만’ 이루었다는 뜻도 결코 아닙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몽땅’, ‘전부’, ‘싹~다’, ‘남김없이’, ‘모두’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도를 스스로 지혜롭다하는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말씀대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렇게 주장하는 동기자체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엄청난 죄를 지었는데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 주셨다는 것이 황송해서, 조금 전에 회개하고 똑같은 것을 다시 회개하려니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경우도 있겠지요. 은혜라고만 이야기하면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고 짓밟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힘써 가리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인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짓입니다. 비록 사람의 보편적인 심성에는 거리낀다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의 증언과 세상의 지혜를 뒤섞지 않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일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결국 십자가의 전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실천적으로는 자기 의를 주장하는 행동을 하기 쉽습니다. 인간이 고안한 어떤 프로그램을 도입함으로써, 혹은 좀 더 설득력 있는 심리 요법을 도입함으로써, 체계적인 마케팅 경영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구원을 도울 수 있을 것처럼 실천합니다. 그렇게 할수록 성령님만 의존하는 힘은 약해집니다. 한국 교회가 그 많은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적어져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서는 결국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해 인간이 뭔가 협력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하는 자세의 회복이 참으로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그분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인간이 협력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시인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붙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도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라야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구속을 위한 모든 것을 이루신 우리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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