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의 눈 (막 10:46~52, 눅 23:13~15)

  • 잡초 잡초
  • 430
  • 0

첨부 1


신앙의 눈 (막 10:46~52, 눅 23:13~15)

성서는 신앙에 대하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라 한다. 바라는 것의 보증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말이다. 바라는 실상과 보지 못한 것에 증거가 합성하여 신앙을 이루게 함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눈’은 이곳과 저곳의 사이를 관찰(觀察)하게 한다. 고로 믿음의 본질은 믿음의 대상이 감각을 넘는 초월세계에 대한 확신이고 그 세계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함을 일컫는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바디매오와 같이 눈이 멀어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눈이 먼 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구원을 보지 못하고 진선미의 가치를 체험하지 못하며 참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한 채 마치 캄캄한 밤중에 헤매 인 것처럼 방황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시대적 조류가 안개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암흑천지인 오늘의 현실에서 방황한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시야를 안개처럼 가리는 이 시대적인 풍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그것은 문명의 이기인 텔레비전의 전파이다. 오늘의 우리사회는 전파매체인 텔레비전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현대인의 사고와 행동에 바라는 보증이 되고 있음에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이로 인해서 인간의 자율성이 저하되는 상황과 사람의 권위가 삶의 자리에서 많은 믿음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대량매체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이 사회의 대량전달이 그 구조의 중심이 되고 그 기능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에 대량매체나 대량통신을 생각하지 않고는 이 사회를 이해할 수가 없게 되어간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대중(mass)이라는 사람은 무기력해지고 파편화(破片化)되고 원자화(原子化)된다. 이로 인해 사람은 자율성, 창조능력은 감퇴되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의 영향은 현대인의 사고, 가치관, 행동에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쁜 친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텔레비전은 다른 매체와는 달리 글을 몰라도 말만 이해할 수 있다면 어린이에서부터 극 노인 어른까지 교육수준은 상관없이 시청자 전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텔레비전이 인기와 마력의 힘으로 사람의 사고와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사람은 텔레비전 앞에서는 스스로 바보와 같이 타율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텔레비전은 오늘의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에도 크나큰 영향을 지배한다. 특히 소비 메카니즘이 발달되어 소비활동이 생산 활동 못지않게 소비욕구를 결정적으로 자극하고 있다. 

이것은 텔레비전의 광고 효과가 다른 매체의 효과보다 강력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광고물에 소비가 미덕이 되어 유행성 허영으로 경제는 파탄에 이른다. 이렇게 사회경제나 사회정치구조도 부정적인 부패로 얼룩져 신뢰대신 갈등이 유발되고 그리고 사회 교육적 철학과 그 기능은 무시 된 채 인성적 교육관은 망가져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서 텔레비전은 상대적 불행 감((relative deprivation)을 자극함으로 사회불안과 불신을 조성하고 각종 비행과 범죄를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대적 불행감과 연관되는 현상은 욕구상승의 현상만 남기게 되는 것이다. 

또한 텔레비전의 바보상자 앞에 각자 방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취향에 따라 시청하는 가족관계는 가족관계를 둔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보면서 현대사회가 다문화, 다원화, 다양성 속에 급변하고 그 구조가 분화되는 상황에서는 사람의 가치관을 혼란시키는 기능을 텔레비전의 유혹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즉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오락물로 가득차 흥미위주의 시청자를 유혹하는 시청은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성서의 본문은 장님이 단지 눈을 뜨게 되었다는 뜻만이 아니라 죽을 경지를 헤매든 사람이 암흑 속에 살다가 ‘신앙의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눈이 먼 사람이 정신적, 영적 삶의 가치에 대하여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바디매오와 같이 눈이 멀어서 어두운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실은 가치관이 붕괴되고 사회의 질서는 문란해지고 혼돈에서 방황유리 한다고 할 때 우리 사회의 세분화와 전문화의 결과는 인간 존재의 온전성(穩全性)과 건전성(健全性)을 박탈해 버리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텔레비전에 홀려 참된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는 삶 을 이름 한다. 이것을 아는 우리는 세파를 좇아 눈이 먼 이곳에서 그저 살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눈을 떠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저 곳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보는 눈은 신앙으로 광명의 빛을 보는 것이다. 이 빛은 삶을 지탱 해 가는 동력이 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여리고 라는 도성에 들렸다가 떠나려는 때에 눈이 먼 걸인 즉 구걸하며 살아가는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아 지나가는 예수께 말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역이소서’ 구원을 호소한다. 예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불러서 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뛰어 예수께 달려간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예수가 물을 때 그는 ‘선생님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이다. 예수는 이 눈이 먼 바디매오가 예수를 알고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신앙과 열성에서 믿음을 보신 예수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라고 하셨다. 그 즉시 눈을 뜨게 되었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을 뜨게 해달라는 구원의 호소’는 오늘 우리에게 간직 될 믿음의 삶에 중요한 동기부여가 되어야 한다. 현대인의 사고와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쳐 사람구실을 하게 한 눈이 텔레비전의 시야에 걸려 안개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장애를 우리의 삶에서 치우어야 한다. 시야를 가리는 문명의 유혹은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하게 한다. 볼 수 있는 눈이 되려면 자기 앞에 놓인 장애를 치우어야 한다. 사람이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묻는 ‘네가 어디 있느냐?’의 질문에서 사람에 대한 대답에 눈이 뜨이게 되어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철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사람은 모든 것의 척도’라고 말했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진리의 사실은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말이요 또한 자연계의 모든 사실도 인간을 표준삼아 알 수 있다는 뜻이요 사회의 모든 진리도 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람의 척도는 무엇인가? 사람의 척도는 먼지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인가? 우리는 먼지로 변해버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존재가 될 것인가? 우리는 온 인류가 전멸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인가? 

우리는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서 한 가지를 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삶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 그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을 가? 왜 그의 삶이 오늘의 상황에서도 뜻있게 살게 하고 뜻있게 죽는 일에 모범이 되었는지 그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신앙이다. 예수가 유대 사람들에게 잡혀 로마의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을 때 빌라도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가 예수를 가리켜서 ‘이 사람을 보라’고 한 말이다. 빌라도가 한 말의 뜻은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보라’고 한 말의 참 뜻은 사람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사람’ 곧 예수를 바라봄으로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 칼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엿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기독교의 신조는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신앙의 자리가 있다. 파스칼도 ‘우리의 처참한 상황을 모르고 하나님을 아는 일은 우리에게 자만을 가져온다고 한다. 하나님을 모르고 우리의 처참한 상황만을 알 때에는 절망이 뒤 따른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에는 균형이 바로잡힌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처참한 상황과 함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함에 유의해 보는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하나님의 부름은 모든 사람을 향한 보편적 부름이다. 인종의 구별을 넘어서서 누구나 다 사람이면 이 질문에 응답할 의무가 있다. 이 같은 질문은 우리 각 개인을 위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에 여러 가지 대답을 내려 본다. 그 대답중의 하나는 기독교적인 신앙이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곧 자신의 주체의식을 정립하기 위하여 우리의 신앙의 결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단이 왜 필요한가? 이 결단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만족스럽고 합리적인 사람 형성과 더불어 자기 지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 결단이 믿음이다. 믿음은 신앙이다. 신앙은 믿고 본 것이다. 신앙 아닌 것은 보고 믿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이곳 세상은 보고 믿으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저곳을 믿고 보는 신앙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내어 보이려 함에 있다. 이 신앙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다. ‘신앙의 눈’을 가진 자는 자기를 내어 보여주며 ‘이 사람을 보라’고 고백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