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눈물이 있는 인생 (애 3:40~50)

  • 잡초 잡초
  • 525
  • 0

첨부 1


눈물이 있는 인생 (애 3:40~50)

  미국의 유명한 팝 아티스트 중에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923년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나 1997년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가장 뉴욕 적이며 뉴욕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명성을 남겼습니다.  그는 1949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교단에서 미술을 가르쳤습니다.  초기에는 주로 표현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1960년 러커스 대학교의 한 교수를 만나면서 팝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팝 아티스트란 고전 미술과 대중예술의 혼합을 말하는 예술형태입니다. 그들은 대중적인 용품이나 혹은 일상 용품을 소재로 사용하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이 사람은 만화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저급문화로 알려진 만화를 회화에 도입하였고, 또한 건축기법을 통해서 실내를 디자인하는 작품을 많이 그림으로서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것이 그의 업적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가 그린 작품은 경매의 최고가를 경신하고, 현대미술을 하는 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린 작품가운데 ‘행복한 눈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가에 팔린 작품이고, 최근 뉴스에서 많이 오르내리는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의 제목을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이라고 정했습니다.  한 여인이 환하게 웃으면서 또 울고 있는 모습이 담긴 그림입니다.  분명 행복과 눈물은 상반되는 것입니다.  행복하면 기뻐야 하는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불행하면 당연히 눈물이 나고, 또한 행복해도 눈물이 난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은 눈물로 산다는 것입니다.

 계절적으로 우리는 지금 참 좋은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봄처럼, 꽃처럼, 향기처럼 늘 밝고 화사하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숨과 걱정과 염려로 살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사셨습니까? 우리는 겉으로, 혹은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삽니다. 눈물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눈물은 하늘나라에 가서야 그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며 살다가 천국으로 들어갈 때 주님이 먼저 이 땅에서 흘리던 모든 눈물을 씻어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인생은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눈물이냐 입니다.  눈물이 그치지 않은 인생, 과연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어떤 눈물일까요?  본문은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슬픔의 눈물입니다.

 성경에서 ‘눈물’ 하면 가장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유다왕국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위해 부름을 받고 그야말로 눈물로 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애처로웠고, 또 진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눈물의 선지자’ 라고 부릅니다.

사역을 마칠 때까지 그는 눈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실 때까지 우리와 같이 눈물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이스라엘은 그래도 평화로웠습니다.  몇몇 악한 왕들이 있긴 했지만, 신실히 하나님을 섬기던 왕들이 통치하면서 안정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깐뿐이었습니다.  이미 뿌리부터 흔들렸던 나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채 파멸의 길로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밤잠을 설치면서,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나라가 멸망한 광경을 보면서 그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하면서 지은 시가 바로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눈물로 살던 그에게 애가는 더 애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문 48-49절에 그의 심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그는 많이 울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2장 11절에 보면, 눈물로 눈이 상하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며 간이 땅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탄식하는 애가에서 본문은 애가의 절정으로 불리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과연 그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는가를 우선적으로 배웁니다. 
바로 슬픔의 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애가’는 영어로 ‘Lamentation’ 이라는 말인데, 그 이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비탄, 슬픔, 통곡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장례식에서의 조가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1장 1절에 성경의 시작을 ‘슬프다’라고 문을 엽니다.  여기 ‘슬프다’는 말에서 성경의 제목인 ‘애가’가 나왔습니다.  그는 지금 슬픈 것입니다.  이처럼 슬픈 적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큰 슬픔은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그의 슬픔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나라 때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성전을 부수고, 무수한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 갔습니다.  나라를 잃은 설음이 온 백성 마음에 형언 할 수 없는 슬픔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통치하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비참해진 적이 없었습니다.  생각할수록 비통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상황이며, 예레미야의 심정입니다.  정말 슬펐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프다’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둘째는 아픔의 눈물입니다.

 여기서의 아픔은 물론 육체적인 아픔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나라가 망할 때 육체적인 고통도 있었을 것이지만 육체보다 더 참기 힘든 마음의 고통 때문에 그는 울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면서 경각심을 주었고, 그들을 깨우쳐서 징계보다 사랑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을 다룰 때 경고 없이 매를 들지 않습니다.  징계도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바른 삶을 위해 선포하고 외칠 때 이스라엘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직감한 그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았습니다.  마치 미친 자의 울부짖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아픈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고, 깨닫지 못하다가 징계를 받은 것이 더욱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레미야는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비참해진 상황을 보면서 비통해 하는 것입니다.  여기 45절에서의 고백처럼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이 열방 가운데서 진개와 폐물이 된 것입니다.  진개와 폐물은 곧 오물과 쓰레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지금 그의 삶에 정말 가슴과 마음이 몹시 아픈 일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슬퍼서 울었고, 아파서도 울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울고, 괴롭고 답답해서 울었습니다.  육체의 고통 때문에 울고, 마음이 아파서 더욱 통곡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슬프고 아플 때 우는 것은 믿음의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삶에 목표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의 때에 우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할 것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삶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7)

 여러분, 슬플 때는 울어야 합니다.  울음을 참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성경도, 예수님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울고 싶을 때 울지 않고, 우는 것은 약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모든 병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눈물샘을 만드셨습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그것이 슬프고 아플 때 쏟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예레미야처럼 슬프고 아플 때는 마음껏 울면서 치유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여기 애가는 모두가 슬프고 아파서 흘리는 눈물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눈물은 슬픔만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본문은 회개의 고백이며, 기도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본문의 결론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  무엇을 말합니까?  모두 회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 슬프고 아프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신세타령만 하지 말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하고 우리 스스로를 세밀하고 조사하여 이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 더 이상 슬픔에 젖지 말고, 서러움에 메이지 말고, 진정으로 눈물이 필요하다면 이제는 너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른 사람이 되기를 위해, 너희의 자녀와 후손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바로 살기를 위해 간절히 통회하고 기도하면서 울라는 것입니다. 

  눈물이 있는 우리의 인생에 진정으로 이 시대와 우리에게 필요한 눈물이 있다면 바로 회개의 눈물입니다.  사람이 슬퍼서 우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동물도 슬프면 눈물이 나는 법입니다.  아파서 우는 것은 모두가 다 하는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현상입니다.  오히려 슬프지 않아도 울고, 모양으로만 울 수도 있습니다.  배우들은 눈물연기의 달인들입니다.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슬프지 않아도 얼마든지 눈물을 내고, 슬픈 흉내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눈물 말고, 우리에게는 뭔가가 다른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회개의 눈물입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끄러움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한 안타까움에, 폭포수와 같은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현장에,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터지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에게서 가장 감동을 주는 모습은 눈물입니다.  특히 회개의 눈물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아마 바늘을 찔러도 피가 나지 않을 것처럼 딱딱한 사람입니다.  살면서 눈물이라곤 전혀 보일 것 같지 않은 대표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눈물을 흘립니다.  슬퍼서가 아니고, 아파서도 더욱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보고, 자기를 볼 때였습니다.  갈릴리 바다보다 더 깊은 자기 속을 아는 주님을 알았을 때 그는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하면서 주님께 엎드렸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다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뒤 새벽닭이 울 때 그는 통곡했습니다.  베드로의 생애에 회개를 위한 눈물과 통곡이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초대교회의 역사를 이루고 예수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만큼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라고 고백하면서 살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슬프고 아플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환란이 계속될 때,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하는 고통의 순간에, 아들의 반역으로 가슴이 메어질 때, 앞이 캄캄하고 힘들고 어려워서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그는 누구보다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이 정말 가장 고귀한 이유는 회개의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살인죄와 간음죄라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자신이 죄인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그 죄를 고백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그는 날마다 울었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흠뻑 적셨습니다.  그것은 서러움이나 아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보고 하나님을 보면서 흘린 통회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소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자기를 보고, 죄를 알고, 참되게 살기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사람들은 진정 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 중심을 아시고,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힘주시고, 손을 내밀어서 잡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로 이끄심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과연 내 인생의 구세주인 주님을 만난 감격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날마다 순간마다 자기를 보면서 슬퍼한 적이 있습니까?   
 바르고 참된 신앙인의 삶을 위해 회개하며 흘린 눈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동되어 흘린 영혼의 눈물이 있습니까?  
 그때가 언제입니까?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까?  무엇을 위해 애통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슬프고 아플 때, 우십시오.  그러나 기왕 눈물로 사는 인생이라면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애통할 때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예레미야처럼, 다윗처럼, 베드로처럼, 눈물로 치료받고 힘을 얻으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