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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 가치 (요 1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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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 가치 (요 12:20~26)

마하마트 간디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파괴하는 7가지 큰 죄가 있다고 합니다.
1)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2) 양심이 결여된 쾌락,  3) 성품이 결여된 지식,
4) 도덕이 결여된 사업,    5)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6) 원칙이 없는 정치
7) (희생)이 없는 종교라고 합니다.

재산 쾌락 지식 사업 과학 정치 종교 이 모든 것은 
     인간사에 꼭 필요한 것이고 유익된 것이지만 
그러나 기초가 부실한 건물의 무너짐 같이
  원칙에 입각한 것이 못되면 되려 우리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 가운데 희생이 없는 종교도 죄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의 비유를 통해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 섬김의 종교인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희생과 섬김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깨달음으로 
              신앙생활의 핵심 가치를 붙드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1.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해 보세요(20-22절)

오늘 본문말씀은 유월절 절기를 당하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 왔습니다.
당시 이방인들도 
유대교로 개종하면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 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헬라 사람 몇이 예수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보니 예수에 대한 소문이 자자합니다.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린 기적으로 
     온 예루살렘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며 
     지금 말로 하면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 신드롬에 빠져 있습니다.
한편으로서는 이러한 소동을 알고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나사로 까지 죽일 음모를 하며 예수 돌풍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럴수록 청중들의 거센 예수 신드롬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로 나와서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환호를 했습니다..

아마 헬라인들도 소문을 듣고 이 광경을 직접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청하여 예수님을 뵈옵기를 청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 중에 헬라인이라고 소개한 것을 볼 때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이방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헬라인들이 찾아왔을 때 
[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는 말씀을 보아서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구원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구속의 범위의 보편성 즉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미쳤다는 것을 말합니다.   

2) 당시 헬라인이라는 말은 지식인 또는                          
  상당히 탐구심이 강한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핵심 가치를 깨닫는 데는 
       이 세상의 어떤 지적인 탐구나 열정에 있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헬라인 몇이 제자 빌립을 통해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께 뵈옵기를 청할 때
예수님은 23절에 [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라고 말합니다.


2. 23절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앞에 하신 말씀
[ 인자의 영광의 때가 왔도다 ] 이 구절이 말하는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영광의 때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가까워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아마 헬라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그것이 영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신드롬을 일으킨 선생에게 찾아와 무엇을 얻고자 해서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그대로 중요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나의 삶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마음에 평안과 생활의 교양과 상식을 얻기를 원하며
       나아가 인생의 심오한 삶의 철학을 듣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에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헬라인 즉 이방인들이 찾아왔을 때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신 이유는
       십자가의 사건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미치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엇을 얻기를 원하며 무엇을 찾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십자가에 눈이 뜨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이해가 되지 않고 또한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찾아온 헬라인에게 무어라고 말슴하십니까?


3. 예수님은 찾아온 헬라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24절)

예수님은 찾아온 헬라인들에게 
[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시고 ] 는 ‘한 알의 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24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휘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인 것 같습니다.
헬라인들이 만나러 왔다고 했으면                                 
      안 만난다 하시든지 들어오라고 하시든지 해야 할 건데 
      한 알의 밀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 아니라
       한 알의 밀 비유는 바로 주님의 영광의 때가 말하는 
          십자가의 죽음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한 알의 밀의 비유는 당시 상황에서는 아주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가 지배하던 사회는 힘의 논리가 통하던 패권주의 시대로서
     출세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며 나아가 사람들은 권력에 아부하며 
            치부에 눈이 어두워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대조적이고 상반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한 알의 밀의 비유에서 말하듯이
       희생인 것입니다. 
희생의 종교라 하니 세상 사람들에겐 굉장히 역설적인 말인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원리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식에게 꼭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땅이 있어도 개간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는 두 아들을 둔 부자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으면서
 [ 황금을 우리 땅에 묻어 놓았으니 잘살고 싶으면 땅을 파 그것을 캐내라 ]
  유언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후 두 아들은 
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성실하고 진지하게 땅을 파며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황금은 없었습니다.
파놓은 땅이니 아까워 두 아들은 거기에 곡식을 심었습니다.
추수기가 되었을 때 곡식이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었습니다.
두 아들은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말한 황금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세계든 세상일이든 
       농부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꼭 필요합니다.
       농부의 눈으로 바라보면 결코 일확천금을 노리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해지만 
일하지 않고 얻은 부와 같이 자연의 원리를 무시한 일들은 꼭 사고가 납니다.
인간이 개발을 하고 문명화 시킨다고 하지만 
       결과는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혹 일확천금을 유혹하는 투자설명회                               
   먹기만 하면 살 빠지는 약,  
   저절로 암기되는 입시비법 공개
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만드신 자연의 원리를 무시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의 교훈 한 알의 밀은 
바로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라는 말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 가치란 말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듯이 
우리가 희생되지 아니하고는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찾아온 헬라인들에게 
         로고스니 이데아니 이런 철학적 이야기 하지 아니했습니다.
한 알의 밀 이야기 했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는 철학이나 사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희생적인 삶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한 알의 밀이 될 수 있습니까?      

1) 떨어져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올 때 떨어져야 합니다. 
세속의 현 위치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도 없고 구원도 받을 수도 없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떨어져야 합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깨워져야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을 비우시기 바랍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2) 땅에 묻혀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다고 다 열매 맺는 것은 아닙니다.
땅에 떨어져 묻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은혜 받아야 우리의 신앙생활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 받는다고 하니 우리는 내가 살아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은혜 받으면 내가 죽습니다. 내가 푹 썩어지는 것입니다.

3) 썩어야 합니다. 
 이런 싯귀가 있습니다.
     알긴 알았는데 왜 여태 몰랐을까요?
     거름이 되어도 썩어야 두엄이 된다는 것을  
내 자신이 죽지 아니하고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한 알의 밀  - 그렇게 어려운 비유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삶의 핵심적 가치로 자리잡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세속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은혜 받아 푹푹 내가 썩어지고 
            새생명으로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가치가 희생이라면 
             어떻게 희생의 삶의 살아갈 수 있습니까?


4.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가치가 희생이라면 어떻게 희생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25절)

그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져야 하는 것 같이 
       내가 죽어져야 합니다.
그럼 내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25절 [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여기에 생명이라는 말이 두 가지가 나옵니다.
자기 생명 - 이것은 <푸시케>라고해서 육신의 생명을 말한다면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은 <조에>라고 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푸시케>를 사랑하면 <조에>를 잃는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마16:25절에 나옵니다.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합니다.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고할 때
베드로가                                                         
[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만류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고는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의 삶을 먼저 챙기고 편한 것만 생각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기독교의 핵심 가치
            희생할 수고 없고 섬길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어네스트  고든(Ernest  Gorden) 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콰이계곡을  통해」라는 책을 영화한 것입니다.   
저자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수백 명의 포로들과 함께 미얀마의 콰이라는  계곡에서 
         일본군을 위해  기차선로 작업에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굶주림,  가혹한 노동에 포로들은 파리 목숨처럼  죽어져 갔습니다.   
포로들에게는 극단적인 생존 본능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남을 돕는다는 생각  따위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저자가 거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난생 처음으로 생명의  애착을 느끼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그토록 생명에의 애착을 강렬하게  느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포기가 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강제노동에 시달림도  있었지만 
          배고픈 창자를   진정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또 부상당한 상처에서 오는 고통은 도저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가 정성을 다하여 간호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같은 처지의 동료였습니다.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 그리고 돌봄, 용기를 얻었습니다.  
놀라운 변화와 사랑의  파도와 물결이 
       <어네스트 고든>의 가슴에 밀려와 전달되었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하였고, 
      수용소는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도와주고 도움 받는 그리고 섬기고 돌보는  
         새로운 하나님의 사회로  만들어 갔습니다.  
그의 「콰이계곡을  통해」라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섬김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인생의 본분을 게을리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한 알의 밀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따를는 제자의 삶에 핵심가치이기 때문입니다.


5.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삶이며 그 보상은 무엇입니까?(26절)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남기신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열 한 제자를 만드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부를 남기신 것도 아니고 사업체를 남기신 것도 아니고
        더구나 큰 교회를 남기신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한 알의 밀이 되셔서 고상한 생애를 남기시고
     그 고상한 생애를 따르는 열 한 제자를 남기신 일인 것입니다.
제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6절에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 고 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을 섬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밀림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는 
       철학, 신학, 음악, 의학의 네 개 부문에서 박사입니다. 
참 훌륭한 분이 아프리카 밀림에 가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는데, 
   그를 방문했던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이렇게 고생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얼마든지 명예스럽게 화려하게 살 수 있는데 하필이면 
         왜 그런 데 가서 그 고생을 하고 사느냐?
보통 사람들이 바라볼 대는 이상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슈바이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를 그렇게 안쓰럽게 보지 마십시오. 
 주님의 손이 되어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손이 되어 주님을 따른다는 것 
                   아무나 할 수 없는 귀한 일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섬기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은 목적은 
   저들이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문하의 제자가 되어볼까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저들에게 
먼저 한 알의 밀 비유를 드시고,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 
     내 제자가 되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따른다는 말은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고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유대 탈무드에 보면 
학생이 랍비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면접시험을 보러 왔습니다.
랍비가 [ 왜 이 학교에 입학을 하려느냐? ] 하니 
       [ 이 학교가 좋아서 왔습니다. ] 
       [ 이 학교 보다 좋은 학교가 많이 있으니 좋은 학교로 가보라 ]고
        하더랍니다.
다른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 왜 이 학교에 들어올려고 하느냐? ]  [ 공부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
     [ 공부할려면 도서관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이네 ] 하고 
     도서관에 가라고 했읍니다. 
도 다른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니 학생이 하는 말이            
    [ 존경하는 랍비가 이곳에 계시기 때문에 배우러 왔습니다. ]
    하니 입학을 허락하더랍니다. 

오늘 예수님의 교훈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헬라인들의 중심을 보시고 
나의 제자가 되어 나를 섬기려면 먼저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교회 왜 나옵니까?                             
무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을 본받기 위하여 성경공부 하고 제자훈련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갈 때 예수님을 섬길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섬기면 섬기는 자의 보상이 있습니다. 
26절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시리라 ] 합니다.

막10:43절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고 합니다.
한 평생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라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결토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김은 일시적이거나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섬김은 반드시 희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결단의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희생하고 섬긴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니 인간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라는 예수님의 고백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희생해야 할 때  
     희생을 지불할 줄 아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희생되어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면 
바로 오늘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흔히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로 알려진 
니콜라스 헤르만(Nicholas Herman)은 1611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십대 때 ‘30년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일을 전전하다 55세 때,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려고 
파리에 있는 카르멜 수도원에 평신도 수도사로 들어가 
부엌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의 식사를 해주면서 부엌을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식사를 수도사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면서 
     항상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이 귀한 천사들을 섬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아무리 하찮은 일도 
사명감을 가지면 소중한 일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작은 일도 큰 일로 생각했고, 
접시 하나 닦는 것을 수많은 군중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렇게 20년을 변함없이 살자 수도사들은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중에 수도원에서 원장을 뽑을 때 
원장 후보조차 될 수 없었던 평신도 수도사인 그가 원장에 뽑혔습니다.

그에게 인간적인 행복의 조건은 없었습니다. 
그는 교육도 못 받고 절름발이로 가정도 이루지 못했지만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힘든 부엌일을 하면서도 
항상 기쁜 얼굴로 “나는 참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국왕 루이 12세가 
수도원을 방문해 그에게 행복의 비결을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섬기는 일입니다.”
행복은 별난 곳에 없습니다. 행복은 사랑과 섬김에 있습니다. 

행복은 ‘좋은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에서 생깁니다. 
진짜 좋은 자리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섬김의 자리’입니다.
‘자극적이고 신비한 것’보다 ‘꾸준하고 평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삶이 더 귀한 삶입니다. 
갑자기 등장하는 신비한 혜성은 없어도 살지만 
매일 떠오르는 평범한 태양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그처럼 평범한 것에 행복의 조건이 다 숨어 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남을 행복하게 할 때 찾아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으로 
그의 신분에 관계없이 존경을 받았습니다. 
“ 영성의 깊이는 지금 하는 일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던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 함으로써 깊어집니다.`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일상적인 일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듯이 
                      사람들을 섬겻습니다. 
그의 수도원 원장은 그가 죽은 후 
그의 추모 송덕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발견했다. 
       수도원을 위해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신발을 수선할 때도 그는 하나님을 찾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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