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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삼상 13:15~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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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삼상 13:15~14:23)

  삼국 시대 말엽에 기세당당하게 백제를 공격해 오던 김유신 장군의 신라 군대는 황산벌이란 곳에 이르러 계백 장군이 이끄는 백제 군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신라군은 전력으로는 훨씬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하여 수차례에 걸친 공격이 계속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전장은 소위 '교착상태'에 빠져 버렸고 신라군은 실로 난감한 지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관창이란 화랑이 나서서 백제군을 향해 단기로 돌입해 갑니다.
  용기는 무쌍했지만 결국 포로가 되었고 계백 장군은 그가 어린 소년인 것을 보고 돌려보내어 주었지만 관창은 또다시 백제군을 향해 싸우러 나갑니다.
  관창이 두 번째로 잡혀오자 계백 장군은 할 수 없이 그를 죽이게 되지만, 그것이 신라군의 사기를 충동시켜서 결국 백제군을 무찌르게 되는 것입니다.
  단 한 명 병사의 용감한 행동이 진퇴양난에 빠져 있던 신라군에게 그처럼 돌파구를 열어 주면서 그 큰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대전하게 되었을 때 그와 비슷한 일이 있어났습니다.
  본문은 사울 왕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 왕자가 단 한 명의 병사만을 거느리고 적진에 돌입함으로써, 전력에서나 군사들의 사기에 있어서나 전적으로 열세에 있던 이스라엘군은 뜻밖의 대승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요나단이 과연 어떻게 그런 승리를 이끌어내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요령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현실 계산' 대신에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기도를 통해서 찾을 때에 성도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돌파구를 열게 됩니다. 

  13장 15절로부터 23절까지의 말씀에 보면, 당시 블레셋과 대진하고 있던 이스라엘이 그 전력에 있어서 얼마나 비참할 정도로 열세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이미 "믹마스"라는 전술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노략군"들이 이스라엘 지경 여기저기를 교란시키면서 마음껏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지만, 겨우 "육백 명"밖에 되지 않는 사울의 이스라엘군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군에게는 "칼이나 창"과 같은 철제 무기를 갖춘 사람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 겨우 이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중에 그런 무기를 만들 "철공" 자체를 일찌감치 없애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기를 스스로 제작하기는커녕 농사 기구조차 블레셋 사람에게 찾아가서 만들어 와야 했던 형편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군의 현실은 그저 인간적인 계산만 하자면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답답하고도 암담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 왕자는 바로 그런 현실을 돌파해 나가는 길을 뚫게 됩니다.
  14장 1절부터 10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하고 그 아비에게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2사울이 기브아 변경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명 가량이며 3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의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4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고 저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5한 바위는 북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6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병기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 8요나단이 가로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9그들이 만일 이같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그들이 만일 이같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기병과 전차병을 앞세운 블레셋 군대 앞에 농기구나 막대기 따위를 든 육백 명밖에 안 되는 이스라엘군이 그 얼마나 약세인지는 누구의 눈에도 뻔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사울 왕도 먼저 싸움을 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브아 변경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를 사령부랍시고 자리 잡고서 그 오합지졸들과 함께 벌벌 떨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안한 장기간의 대치 상태에 지친 요나단은 자기 병기 맡은 소년 한 명과 함께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먼저 건너감으로써 무언가 어떤 동기를 유발시켜 보려 했습니다.
  그가 사울에게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은 말해 보았자 허락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이 건너가려 했던 곳은 "보세스(미끄러운 것)," 그리고 "세네(뾰죽한 것)"라는 지명이 암시하고 있듯이 매우 험한 지형으로서, 상대적으로 적군의 병력 배치도 약한 곳이었습니다. 

  요나단이 사울의 허락도 없이 그 곳을 건너가려 했던 이유는 오직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하고 그 뜻을 찾아보려 하는 호기심이 발동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실 뜻만 확실하면 "사람의 많고 적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요나단은 아주 '비상식적인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스스로 블레셋 진영 쪽으로 다가가서 그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고" 블레셋군의 반응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만일 블레셋 군이 요나단을 보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즉 '우리가 쳐 내려가서 다 죽여 줄 터이니 너희들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라.'하고 자신만만하게 나오면, 그는 자기 하는 일에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군이 요나단을 보고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즉 '덤빌 테면 이리로 올라와서 덤벼 봐라.'하고 나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블레셋 군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표징"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또한 실제로 적군이 '이리로 올라와서 우리를 공격해 보아라.'라고 약 올리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당장 너희들 쪽으로 내려가서 다 쓸어버리겠다.'라고 큰소리 탕탕치는 것에 비해서는, 그 무언가 그쪽에서도 겁을 내고 있다는 표가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러한 요나단의 행동은 그저 무모한 계획이요 어리석은 도발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병력이나 무기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않는 적군에게 자기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고 나선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제 발로 죽을 길을 찾아가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요나단의 행동은 조금도 무슨 경거망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찾아보자는 적극적인 자세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전력의 열세만을 생각하고 그 때문에 기가 죽어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요나단은 그런 현실 계산을 뒤로 제쳐 두고 그저 '하나님께서 이 일을 두고 과연 어떻게 역사하실까?'라는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한 걸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며, 결국 그것이 그 교착 상태를 돌파하는 첫 걸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두고서도 하구한날 현실 계산만 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한 주일에 얼마의 매상을 올리고 한 달에 얼마의 월급을 받고 있는지, 내 집의 생활비 지출이 얼마나 되는지,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동산과 부동산이 얼마나 되는지 부지런히 계산기만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계산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합산 수자는 몇 번을 검산한다 해도 그것이 절로 더 올라갈 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또 그런 교인들은 교회생활에서도 꼭 같은 습성을 나타나게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교인 수자가 아직 이것밖에 안 되는데.'라고만 생각하는 목사, '우리 교회의 현재 재정 상태를 고려하면 저런 일은 너무나 무리인데.'라고만 계산하는 장로들이 있습니다.
  '우리 전도회는 다른 전도회와 비교할 때 이래서 약하고 저래서 무엇을 못할 수밖에 없다.'라고 '전력의 열세'만 버릇처럼 변명거리로 삼는 전도회장들도 있습니다.
  그처럼 교회 일까지도 그저 수판알만 굴리는 사람은 무슨 일을 앞에 두고도 반드시 겁부터 집어먹게 되어 있으며 평생을 가도 그저 처음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석류나무 밑'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영적 교착 상태,' 그런 '영적 만년 공포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적극적으로 찾는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찾게 되면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게 되고 지금까지 처박혀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동기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해 주지 않으실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이 일 시작했다가 잘못되면 어쩌나?'하는 상습적인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각자의 가정과 생업 그리고 또한 교회생활 중에서 자신이 여전히 '현실 계산'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옹졸한 모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 과연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함으로써 그 돌파구를 찾을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현상 유지' 대신에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다.'라는 확신을 좇아 행동할 때에 성도는 그 신앙생활에 승리를 얻게 됩니다. 

  11절 이하 15절까지에서 "11둘이 다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2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를 대하여 가로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한 일을 보이리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고 13요나단이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그 병기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14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가 반일경 지단 안에서 처음으로 도륙한 자가 이십인 가량이라 15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부대와 노략군 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요나단 일행이 블레셋군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라고 저희들끼리 말했습니다.
  '저놈들, 만날 고개 처박고 숨어 있더니 웬일이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요나단에게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한 일을 보이리라"고 즉 '이리로 올라올 테면 한번 와봐라. 우리가 본때를 보여 주겠다.'라고 을러대었습니다. 

  요나단은 아까 9절과 10절에서 블레셋군의 반응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했었는데, 그들이 '우리가 그리고 내려갈 테니 기다려라.'고 자신 있게 나오지 못하고 '이리로 올라오라.'고 미온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자 당장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신 줄"로 확신했습니다.
  그리고는 "손발로 붙잡고" 즉 그 '미끄럽고 뾰죽한' 험한 지형을 손발로 기어올라 블레셋 진영으로 돌격해 갔고 그의 병기 맡은 병사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좌충우돌하며 그 암벽에 주둔하고 있던 블레셋군을 쳐 죽이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반일경 지단" 즉 '소 한 겨리로 반나절에 갈아엎을 수 있을 정도의 땅,' 대충 말해서 2분지 1 에이커 정도 되는 지역에서 "이십인 가량"을 죽였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요나단의 전과 자체는 소규모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이 곧 블레셋 진영에 "큰 떨림"을 유발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 소규모 전투에서 자기편 군사들이 죽어 넘어지는 꼴을 보고 전 블레셋 진영에 공포감이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도 "땅의 진동"을 동반시키심으로써 그런 공포감이 극에 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원래 전투라는 것은 실제로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일단 '우리 편이 졌구나.'라는 생각이 전군에게 전염되면 바로 그 순간 진짜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파급 효과가 전세를 단숨에 결정짓게 됩니다.
  이어지는 16절로부터 22절까지의 말씀에 "16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숫군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17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고하여 보라 하고 점고한즉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가 없어졌더라 18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 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라 19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의 진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20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이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21전에 블레셋 사람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과 함께 와서 진에 들어 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과 합하였고 22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의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사울 왕은 곧 자기 군대 점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요나단과 그 병기 맡은 자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쯤에서 그 경과와 상황을 대충 판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적군 진영에서는 "허다한 블레셋 사람이 무너져 이러 저리 흩어지는"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즉각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무엇보다도 자기 아들이 지금 필마단기로 적진에 돌입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만 사로잡혀서 즉시 돌격 명령 내리기를 주저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전장에 나와 있던 꼭두각시 제사장 "아히야"더러 "하나님의 궤를 이리 가져 오라"고 명했습니다.
  아히야는 본문 3절에서 밝혀진 대로 "엘리의 증손"이었습니다.
  이미 사무엘 선지자와 사이가 벌어져 있던 사울은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은 집안의 제사장을 대신 불러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런 병력으로 정말 전쟁을 시작해도 될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법궤라도 앞장 세워 나가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얼마 전에 엘리 제사장 시절에 저질렀던 잘못을 또 한 번 그대로 답습하는 꼴이 될 뿐이었습니다.
  하여튼 이스라엘 왕으로서 참 불신앙적인 모습이며 또한 전투 지휘관으로서도 정말 우유부단한 자세였습니다.

  그러다가 "블레셋 사람의 진에 소동이 점점 더하게 되는 것"을 본 후에야 사울은 법궤 옮겨 오는 것을 중지시키고 자기 군대를 이끌고 블레셋 진중으로 가게 됩니다.
  일단 가보니 블레셋 군은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크게 혼란한" 상태, 그야말로 자중지란의 극에 달해 있었으며, 그런 군대를 격파한다는 것은 물론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뜻밖의 사건이 따라옵니다.
  "전에 블레셋 사람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 즉 블레셋군에 차출되어 그들의 병사가 되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전장에 나와 블레셋 군 쪽에 서 있었는데, 이들이 "돌이켜... 이스라엘 사람과 합하는"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네들 화살막이로 쓰려고 강제 징용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작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뒤로 돌아'하고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을 역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 즉 조금 전에 도망병이 되었던 대다수의 이스라엘 군인들 역시 그런 소식을 듣고 "싸우러 나오게" 즉 다시 자기 군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자신감이 생기자 조금 전까지 그렇게 겁쟁이였던 탈주병들이 죄다 귀대하여 전투에 즉각 돌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전 이스라엘 군대는 순식간에 사기충천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전투의 결과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완벽한 대승이었습니다.
  요나단이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우리 손에 붙이신 것이 틀림없다.'라는 확신 하나로 적진을 기어 올라가자, 이처럼 이스라엘 중에 배신자들과 겁쟁이였던 자들까지 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다시 뭉치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기게 해 주시는구나.' - 이 확신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숨었던 산지'에서 나오게 되고 모든 두려움들은 순식간에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울의 생각에는 그저 그 석류나무 밑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것밖에 다른 아무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진 백성을 모을 길은 전무했습니다.
  그저 수비에 급급하고 간신히 현상 유지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뜻이 계시다.'라는 확신 하나로 일단 전장에 돌입하자말자, 모든 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모든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면서 오직 파죽지세로 승리를 향해 치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확신 못 가진 사람과 가진 사람의 신앙생활은 엄청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자는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저 현 상태에 만족하고 그것만 잃지 않겠다고 버둥거리고, 교회생활에서도 그런 버릇을 꼭 같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현상 유지'만 하려는 것은 진보가 없을 뿐 아니라 사실상 그 유지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은 일반 사회생활에서도 상식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사업을 하는 사람은 계속 상품 개발을 하고 거래처를 더 많이 확보하려고 노력해야만 최소한의 현상 유지라도 될 수 있는 것이며, 직장인 역시 부단히 배우고 또한 자신의 실력도 계속 쌓아가야만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기만 한다면 안전하게 현상 유지가 될 것 같지만, 그것은 남들이 다 하는 '은행의 변리'도 못 버는 손해이며 결국에 가서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되는' 꼴을 당할 뿐인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꼭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철칙입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하려 하지 않고 그저 무사안일하게만 사는 사람에게 어떻게 발전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축복이 따라올 수가 있겠습니까?
  이 전투하는 지상교회의 최전선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려고 하지 아니하면 늘 뒷전으로 도망치는 '영적 탈주병'들, 아니 신자라 하면서도 오히려 '블레셋 사람에게 징용된 자'들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패배주의 의식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확신으로써 단연코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지 않으실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매사에 절로 사기충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구속사에 있어서 정말 위대한 일들을 하고 계시는구나.'라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교회중심으로 사는 신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연전연승이 절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 몸보신하겠다고 '숨어 있던 산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이미 블레셋을 우리의 손에 붙이셨음'을 확신하며 힘차게 전진함으로써 모든 불리한 전세를 뒤엎는 통쾌한 역전승을 맛볼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 전쟁의 결론을 두고 본문의 제일 마지막 절에 "23a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 이미 여호와의 뜻이었습니다.
  절대적 열세에 몰려 있던 이스라엘을 위한 큰 구원은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에 벌써부터 결정된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호와의 구원은 자기의 '현실 계산'에만 사로잡혀 겁을 내고 그저 제자리에 '현상 유지'만 하면서 앉아 있던 사울 왕을 통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 왕자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않고 대신 '여호와께서 과연 어떻게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실지'를 찾기 시작했던 바로 '그날에' 그 구원의 돌파구는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기로 뜻하신 것'을 확신하며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와 블레셋 고지를 향한 험한 길을 기어 올라갔던 바로 '그날에' 그 구원의 큰 역사는 단숨에 성취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병사가 참호 속에 머리를 박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면 결국 그 자리에서 죽든지 포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병사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적군의 공격이 있을 때면 총을 내밀고 머리를 들고 사격을 해야 하며 때로는 참호에서 뛰어 나와서 돌격을 해야만 합니다. 
  만약 일개 병사가 스스로 피아간의 전력을 비교하고 승패의 가능성을 분석하여 행동한다면 그것은 자멸의 지름길이 될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병사는 오직 자기 지휘관에게 모든 정세 판단을 맡기고 그의 작전 명령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무조건 복종해야만 비로소 승리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경향교회의 후임 당회장으로 섬기게 되었을 때에 원로목사님께서 가르쳐 주신 체험적인 교훈을 저도 평생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는 당신의 50년 목회 사역 중에 어떤 어려운 문제에 대한 판단의 기로에 서게 될 때면 그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라는 원칙만을 따라서 결정을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다.'라고 확신되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일을 진행해 나가셨습니다.
  저 하늘 위에 계신 대장께 모든 상황 판단과 작전을 다 맡기고 그저 순종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경향의 지난 30여 년 동안 연전연승을 이끌어낸 전술이었고 기적들을 낳은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은 혹시 스스로가 움츠리고 앉아 있는 '석류나무 밑'이나 원수 사단이 몰아넣은 '구덩이' 속에 멈추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아무 일에도 진보는커녕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 없이 그저 매일의 현실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영적 교착 상태'에서 반드시, 그리고 하루빨리 빠져나와야만 합니다.
  '여호와의 뜻을 찾는' 기도를 통하여 그 모든 현실 안주의 자리를 탈피하고 '여호와의 뜻을 확신하는' 행동을 통하여 이미 우리를 위하여 결정되어 있는 큰 구원의 축복, 통쾌한 역전승의 기쁨을 개인과 가정과 사회생활과 또한 교회생활을 통하여 꼭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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