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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목마르다 (요 19:28~29) - 가상칠언(제5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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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목마르다 (요 19:28~29) - 가상칠언(제5언)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섯 번째로 하신 말씀은 육체의 고통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까지 전인이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머리가 가시에 찔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맞고, 날카로운 뼈 조각이 달린 채찍에 온 몸이 찢기고, 손목과 발목에 대못이 박히며, 귀로는 온갖 모욕과 조롱과 비방을 듣고, 혀는 갈증으로 타는 외적인 고통들을 겪으셨습니다. 죄 덩어리를 향하여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그분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철저한 준비가 고통 실제까지 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신 척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진노하셨고, 버리시는 시늉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림당하시는 순간에 예수님은 견딜 수 없는 내적인 고통으로 인해 절규하셨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단지 십자가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 생애가 고난이었습니다. 무한하신 분께서 육체로 자신을 제한하여 시간 속에 계신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고, 거룩하신 분께서 죄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티 없이 순결한 처녀가 평생을 음탕한 폭력배들 속에 지내야 하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괴로움이 그분의 생애 동안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여년 고난의 세월을 영원 형벌과 비교하자면 지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겪으신 고난’이 어떻게 선택받은 모든 이의 ‘영원한 지옥 형벌’을 대속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단지 한 인간의 고난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무한하신 존재가 받은 고난이었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그분이 영원히 형벌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의 존재 자체가 영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온전히 다 받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지옥 고통의 일부를 잠깐 맛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받으셨던 고난의 밀도와 강도는 인류가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 받았어야 할 형벌의 총계와 동일합니다. 그분의 무한하신 위엄이 시간적인 무한성을 대신한 셈이지요.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참으로 지옥의 고통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고 죽으셨다는 표현이 우리 감성을 크게 자극하여 감동시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신성은 불변하는 것이라 고난당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이유 중의 하나도 대신해서 고난 받고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난 받았던 기관은 그리스도의 ‘인성’이었고, 고난 받으신 주체는 그리스도의 ‘인격’이었습니다. 

고난은 인성이 받았지만 고난의 효력은 신인이신 그분의 인격에 의존합니다. 자식의 악행을 고치기 위해 자기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린 부모에 비유해봅시다. 고난 받은 기관은 그의 종아리이지만 그 인격 자체가 고난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또한 그 고난의 효력은 근본적으로 그의 종아리가 아니라 그의 인격에서 비롯됩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구분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분의 인성이 받으신 고난은 그분의 인격 때문에 무한한 공로가 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하신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십자가 고통을 언급한 유일한 표현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이 타는 고통을 감내하셨던 그분의 고통을 실감하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감질 나는 표현입니다. 이것마저도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라는 부연 설명 때문에 안타까운 감정을 반감시킵니다. 우레의 아들이라 불렸다가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면 요한은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얼마나 목 마르셨을까’를 느낄 수 있도록 극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분은 목마름의 고통까지도 실제로 느끼시는 분이라는 ‘사실’만 담담하게 증언합니다. 영이라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천사나 부활체도 목마르지 않습니다(계 7:16). 그분께서 목마르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온전한 사람이셨음을 말해줍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감성적으로 강렬하게 느껴보고자 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겪으신 고통이 내 마음에 실제로 와 닿는다면 그것은 큰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느낌’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성을 중심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사실’에 대해서 간과하기 쉽습니다. 언제나 ‘느낌’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보다는 고통을 참기가 훨씬 쉬우셨을 것이라는 잘못된 느낌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목마름’까지도 동일하게 느끼시는 분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분도 시장하여 배고프셨고(막 11:12), 행로에 곤하여 털썩 주저앉으셨고(요 4:6), 뱃전에서 주무시기도 하셨습니다(마 8:24). 그분께서 온전한 인간이 아니셨다면,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휼하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온전히 대속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그분께서 인간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인간인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지요. 하지만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그분이 온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가현설’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도 그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인 것처럼 생각한 이단이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예수님의 신성은 부인하고 오직 모범적인 인간으로만 보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온전한 신이심을 부인하거나 온전한 인간이심을 부인할 때 모두 이단이 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모든 신비한 요소들까지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는 모든 기적을 무시하고 도덕적인 교훈만 취하려 합니다. 신앙생활도 이 땅을 살아가는데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하게 됩니다. 부활이나 내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신비한 측면에만 몰두하면서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기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활 후 내세의 삶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서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무관심해집니다. 이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과는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상식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별종의 인간이 됩니다. 이처럼 사실을 바르게 인지하고 있지 못할 때, 그 삶까지도 바르지 못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주님의 신성과 함께 인성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그분께서 죄의 용서를 위해 대신 간구하셨고(막 2:10),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시면서도 자식의 도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의 생수를 주신 분께서 저주의 목마름을 겪으셨습니다(요 4:13-14, 7:37-39). 

우리 주님은 둘 중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분은 신과 같은 인간도 아니고, 인간 같은 신도 아닙니다. 반인 반신도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인간이시기만 하셨다면 그분의 죽음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만 하셨다면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고난 받거나 죽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온전한 신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셨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목마름을 느끼셨기 때문에 우리의 목마름을 대속하실 수 있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은 실제의 목마름을 말씀하신 것인 동시에 또한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으로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었습니다(29). 이렇게 함으로써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 69:21)라는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기록된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면서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사역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역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셨습니다. 열심히 사역하고 계실 때뿐만 아니라,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성경은 예수님께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목이 타는 순간에도 그분께서는 기꺼이 기록된 말씀을 이루려 하셨고 마침내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철저하게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내게 유익이 될 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기는 쉬우나, 내게 손해가 될 때도 그 권위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신나고 즐거울 때 말씀을 기억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조차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있기란 힘겹습니다. 제 삶을 돌아볼 때도, 작은 유익 때문에 말씀을 외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존중한다 하였으나, 막상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세상의 가르침에 굴복하고 마는 때가 많았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좁은 정도를 걷다가도 가끔 편법을 사용하여 곤궁에 처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사로잡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았다면, 참으로 내 삶 속에 말씀이 이루어지는데 혼신을 다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 되었겠지요. 우리가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했다면, 우리 공동체의 모습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참으로 주의 말씀으로 부지런히 양육해왔다면, 그들의 모습 또한 지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허물과 잘못들을 회개하면서 다시금 기도를 드려봅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빨리 가기보다 바르게 가게 하시고, 성공적인 삶이기보다 성경적인 삶이게 하여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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