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창 49:22~24, 마 13:31~32)

  • 잡초 잡초
  • 958
  • 0

첨부 1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창 49:22~24, 마 13:31~32)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고 채소입니다. 오이는 무엇일까요? 오이는 채소가 아니고 과일입니다. 감자는 무엇일까요? 감자는 뿌리가 아니고 줄기입니다. 바나나는 여러해살이 풀입니다. 양파는 채소가 아니고 백합의 일종입니다. 우리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채소이든 과일이든 가지는 나무 없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든 열매는 가지에 맺힌다는 사실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지는 필수적입니다.

  나무에 가지가 무성한 것은 열매를 맺기에 가장 좋은 조건입니다. 더구나 샘 곁에 심겨진 나무의 가지란 무성하고 싱싱합니다. 이런 나무 가지는 열매 맺기에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이런 나무 가지가 복된 나무 가지입니다.

  야곱의 고통이란 네 아내를 통한 12아들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내들과 아들들 간의 알력과 갈등이 문제의 화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야곱의 아들에 대한 편애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사소한 차이점들은 그대로 놔두라. 그러나 주관적인 편애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없애라”고 하였습니다. 편애는 항상 또 다른 상처를 남깁니다. 야곱의 편애로 요셉은 팔려가고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야곱은 요셉에게 과분한 축복을 합니다.

  유대 전승에서는 장자는 다른 아들의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범한 죄로 말미암아 장자의 축복을 빼앗깁니다. 대신 장자의 축복이 요셉에게 전해집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축복하기를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담을 넘은 무성한 가지가 될 것이라고 풍성한 축복을 선언합니다.

  우리 집에 있는 나무의 가지가 담을 넘어 옆집으로 가면 이웃으로 넘어간 가지에서 열린 열매는 내 것이 아니라 이웃의 것입니다. 법적으로도 가지가 우리 집으로 넘어와서 열린 열매는 내가 먹어도 됩니다. 가지가 담을 넘으면 이웃을 풍성하게 하고 유익하게 합니다.

  성경은 담을 넘는 가지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려로 해석합니다. 곡식을 수확할 때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포도열매를 다 따지 말고 떨어진 포도열매를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이나 고아들이나 나그네들이 먹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는 가을에 감을 딸 때 다 따지 않고 조금 남겨 놓았습니다. 이것을 ‘까치밥’이라 불렀습니다. 까치들이 먹기 위해 남겨 둔 것입니다. 담을 넘는 가지는 우리의 것이지만 남을 위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에게는 “천하만국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야곱은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본회퍼는 크리스천을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나의 일은 남의 일로 해야 합니다. 타인의 필요를 따라 나의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한 것을 보세요. 샘 곁에 있는 무성한 가지입니다. 담을 넘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나무는 아니지만, 나무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가지가 나무를 대신하여 열매를 맺고, 나무를 대신하여 무성하게 자랍니다. 우리도 마르지 않는 샘이신 그리스도 곁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과 세상을 향해 담을 넘는 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축복의 가지는 샘 곁에 무성한 가지입니다.

  본문 22절을 보세요.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고 합니다. 가지가 축복입니다. 왜요? 열매 때문에 가지가 축복입니다. 열매가 잘 열리면 가지가 영광을 누립니다. 가지가 담을 넘고, 힘이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씨가 땅에 묻혀서 발아하고, 나무가 자라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물과 공기와 흙입니다.

  물이 없으면 절대 나무는 자라지 못합니다. 아무리 공기가 맑고 좋다고 하더라도, 흙이 좋다고 하더라도 물이 없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공기가 좋아도 물이 없으면 안 됩니다. 흙이 좋아도 물이 없으면 안 됩니다. 현재 전 세계가 사막화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흙은 괜찮은데 강수량이 적으니까 점점 사막이 넓어져 가고 있습니다. 정말 공기가 좋은 곳이지만 비가 오지 않고 물이 없으면 나무는 자라지 못합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점점 땅이 먼지만 일으키게 됩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좋은 땅도 푸석푸석하고 영양가가 없는 땅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마르지 않는 샘은 나무가 자라는데 제일 필요한 필수조건입니다. 물이 항상 있다는 것은 나무가 자라기 위한 최상의 여건을 말합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샘 곁에 심겨진 것이 축복입니다. 시편 1편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스겔 19:10에는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라고 합니다. 나무가 시냇가에 심겨지고 싶다고 심겨집니까? 나무의 의지가 있습니까? 어쩌다보니 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시냇가의 나무는 축복받은 나무입니다. 샘 곁에 무성한 가지는 그래서 축복받은 가지입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건물이 붕괴되거나 지진을 만나 매몰되었을 때 인간의 생존능력은 20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기네스북에 기록된 최장의 생존자는 오스트리아의 안트레아 마하베츠로 1979년 18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인체에는 물이 70%입니다. 어류는 물이 80%입니다. 물 속의 미생물은 물이 95%나 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물이 많습니다. 지구의 표면적의 4분의 3이 바다와 빙원과 호수와 하천 등의 형태로 물이 약 13억 3000만 입방 킬로미터나 됩니다.

  옛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신화에는 니나라는 물의 여신이 있습니다. 니나는 인류 창조의 신 에아의 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하셨던 니네베(니느웨)의 수호신은 니나입니다. 니나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니나가 모든 인간의 삶을 주관합니다. 물이 없으면 인간의 생명도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물의 신이 아닙니다. 물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 창조 둘째 날에 물을 만드셨습니다. 물을 만드신 다음에 식물과 천체와 어류와 조류와 동물과 인간 모두를 만드셨습니다. 물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살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루시 쇼는 그녀의 책 ‘물댄 동산 같은 내 영혼’에서 “물은 태초부터 창조의 근본요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신학자 구로디안은 “물은 창조의 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물은 창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4:13-14에는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물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물이 되셔서 모든 것을 살리시고 모든 것과 함께 하십니다.

  사막 한 가운데 지어진 성 마카리우스 수도원은 사막이지만 오아시스 지역입니다. 비록 사막이지만 오아시스의 물이 있기에 수도원 안에는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가 있으니 자연히 새도 있습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물만 있으면 나무는 얼마든지 자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귀합니다. 그래서 샘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시는 물의 문제는 그들에게 항상 염려거리였습니다. 또 그 지방에서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오면 기적이었습니다.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온 사람은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그래서 축복의 사람인 것을 사람들이 인정했습니다. 또 부족 간의 전쟁에서 상대의 우물을 돌로 매워버리는 것이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을 따라 다니는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초지나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는 하나님께 근원을 두는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물을 버리는 자입니다. 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입니다. 물을 터진 웅덩이에 보관하는 자입니다. 예레미야 2:13에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물이 좋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축복의 가지는 담을 넘습니다.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고 합니다. 담을 넘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월담이나 월장이란 힘이 있어야 뻗어나간다는 말입니다. 물은 힘입니다. 물은 나무로 하여금 담을 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는 뿌리, 가지, 줄기, 잎, 열매를 가집니다. 잎 과 열매는 가지에 붙어 있습니다. 관상수나 유실수 할 것 없이 잎은 가지에 붙어 있습니다. 열매는 가지에 열립니다. 뿌리는 열매를 가지지 않고, 줄기는 잎을 가지지 않습니다. 가지는 나무에서도 소중한 부분입니다.

  이제 봄이 되어 가지에 물이 오르는 계절입니다. 겨우내 나무에는 물이 오르지 않습니다. 물이 오르면 나무가 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봄이 되면 다시 물이 오릅니다. 가물 때 보면 제일 먼저 가지부터 마릅니다. 물이 풍성하면 제일 먼저 가지가 싱싱해지고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가지가 힘이 있어야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열매가 남을 유익하게 합니다. 힘이 없는 가지는 담을 넘지 못합니다. 힘이 없는 가지는 자기 하나 지탱하기도 힘듭니다. 가지가 담을 넘는 힘이 있어야 옆집을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의 비유를 보세요. 작은 씨가 싹이 나고 자라 가지가 무성한 나무가 됩니다. 작은 가지지만 자라면 공중의 새가 와서 깃들이는 무성한 나무가 됩니다. 작지만 힘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멕시코의 엘 로사리오에 가면 매년 큰 축제가 있습니다. 해발 3,500미터의 산에 마리포사 나비 1억 마리가량이 캐나다에서 와서 나뭇가지에 앉아 있습니다. 산이 높아 제법 걸어 올라가기가 힘이 든 곳이었습니다. 오야멜 전나무의 가지마다 나비들이 앉아 가지가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나비의 무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비 한 마리의 무게는 가볍지만 가지가 처질만큼 나비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정말 산 전체가 나비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나비들도 나무 가지의 힘을 믿고 와 있을 것 아닙니까? 힘없는 가지에는 나비도 안 올 것입니다.

  요한복음 15:5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합니다. 나무 때문에 가지가 든든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지인 우리가 든든합니다. 나무가 든든해야 가지도 든든합니다. 가지가 든든해야 열매도 충실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지인 우리도 든든하게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요셉의 가문은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었습니다. 담장을 넘는 힘 있는 가지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의 지파가 형성되고 자손들에게 가서 이 말은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의 가문은 대가 이어져 갈수록 힘 있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삶은 문자 그대로 풍파 많은 세상의 삶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그처럼 격랑의 세월을 산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팔려갔습니다. 애굽에 가서 친위대장의 집에 종살이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하였습니다. 꿈 해몽을 잘 하여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굽에 7년 동안의 큰 기근을 슬기롭게 지나게 하고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세계적 국가였던 애굽의 총리가 되어 국가의 살림을 맡아 했습니다. 그의 힘은 담을 넘어갔습니다.

  요셉의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어 어디로 어떻게 영향을 주었습니까? 첫째는 자신을 넘어 가족을 살렸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러 가나안에서부터 애굽에 와서 요셉을 만났습니다. 그 후에 야곱과 70명의 식구들이 애굽에 이주하였습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온 가족이 살게 되고 애굽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마치 큰 홍수 때 노아 한사람이 온 가족을 구한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있는 곳의 이웃을 살렸습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번성하였고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는 감옥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내 집을 넘어 공동체를 살려야 합니다. 셋째는 이웃을 넘어 세상을 살렸습니다. 애굽에 7년 동안의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애굽뿐만 아니라 가나안과 다른 나라도 살렸습니다. 각 나라에서 애굽에 식량을 구하러 몰려왔던 것입니다.

  이웃과 나라와 세계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담을 넘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더 힘 있게 뻗어야 합니다. 이사야 11:1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야가 날 것을 말씀합니다. 메시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결실을 했습니까? 그 가지가 담을 넘어 전 세계를 향해 뻗었습니다. 현재 65억 명의 세계인 가운데 33%인 약 21억5천만 명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가지가 힘차게 뻗어 나간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3에는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합니다. 이제 문 안에서 우리끼리 아기자기하게 살 것이 아니라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가지가 문 밖으로, 담장을 넘어 나가야 합니다. 영문 밖에서 무엇을 할까요? 문 밖의 사람을 살리고, 섬기고, 이끌고, 도와주고, 필요를 공급해야 합니다. 담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해야 합니다.


결론 

  이제 우리도 담을 넘어야 합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라 담을 넘은 가지가 됩시다. 우리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 뻗어나갑시다. 그들이 나를 통해 부요하게 되고, 복 받게 되고, 구원받게 합시다.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시다. 우리가 담을 넘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뻗은 우리 가지의 열매가 이웃의 것이 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담을 넘어서 뭘 합니까? 다니엘 12:3에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합니다. 담을 넘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올해 주제가 ‘생명을 잉태하는 교회’입니다. 이제 나의 담을 넘어 가족에게, 친척에게, 이웃에게, 동료에게 뻗어 나가서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마르지 않는 샘인 그리스도 곁에서 무성하게 자란 가지가 됩시다. 그리고 담을 넘어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며 구원받도록 이끕시다.

  구체적으로 담을 넘어 누가 있나 살펴보세요. 믿지 않는 가족이 있습니까? 생명 없는 이웃이 있습니까? 아직도 영원한 나라를 모르는 동료가 있습니까?

  이들을 담 너머에 있는 그들을 다 주님께로 이끄는 무성한 가지 같은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